레이디 오브 페인과 ‘돌로레스’

시길을 수호하는 존재, 플레인스케이프 배경 최대의 수수께끼인 레이디 오브 페인이 19세기 영국 시인 알져논 찰스 스윈번 (Algernon Charles Swinburne)의 시 ‘돌로레스 (일곱 슬픔의 성모)’ (Dolores [Notre-Dame des Sept Douleurs])에서 나왔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문제의 시를 보니 실제로 꽤 그럴듯하더라고요. 정말로 ‘레이디 오브 페인’이라는 인물에 대한 찬가, 내지는 탄원, 내지는 연가, 혹은 만가의 성격을 가진 시입니다. 인간의 본원적인 욕망을 부정하는 기독교에 대한 문명비판적 내용도 있고…

Lady of Pain

플레인스케이프:토먼트판은 왠지 글래머

440줄에 달하는 비교적 긴 시이지만 왠지 팍팍 느낌이 와서 연휴기도 하겠다, 한번 번역해 보았습니다. 시의 내용은 위에서 말했듯 고통의 성모 돌로레스에게 바치는 기도입니다. 시에 나오는 돌로레스는 뭇 남자의 연인, 색정이 죽음과 만나는 경계에 있는 가학적 (혹은 피학적) 성욕자, 누구든지 가진 어둡고 소모적인 욕망의 얼굴, 기독교 이전 시대에 숭배되던 신성한 여성성과 닿아 있는 존재로 보이더군요. (이런 여자를 성모 마리아에 빗대다니 스윈번 욕 많이 먹었습..) 꽤 어두운 내용이고 폭력과 외설, 가학·피학적 성욕을 다룬 이미지도 많으니 주의하시길.

주석만 해도 서른개가 넘는 대규모 작업이었습니다. 외설과 역사와 신화를 넘나드는 스윈번의 대담한 상상력을 음미하면서 시길을 수호하는 ‘그분’의 흔적을 찾아보는 재미가 있을듯 합니다. ^^

돌로레스 원문

로키의 돌로레스 번역

긴 거 읽기 귀찮은 분들을 위해 이하는 시길의 레이디 오브 페인과 어울린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을 추려본 발췌문입니다.

차가운 눈꺼풀에 가린 보석같은 눈
잔혹한 붉은 입술은 독을 품은 꽃과 같도다
그대 신비롭고 엄숙한 돌로레스
우리 고통의 성모여

오 상아가 아닌, 그러나 지옥에서

천상
에 뻗은 손으로 지은 탑이여
오 진창에 피는 신비한 장미
오 금이 아닌 이윤의 집이여
오 꺼지지 않는 불의 집이여
우리 고통의 성모여!

그대 경멸하는 삶과 사랑이
우리에게 주는 고통은 정녕 공허하니
여인 중 지혜로우며 가장 지혜롭도다
우리 고통의 성모여.

누가 그대에게 지혜를 주었는가? 어떤 이야기가
그대를 찔렀으며, 어떤 환영이 그대를 때렸는가?
욕망이 처음 네 목줄기를 움켜잡았을 때, 돌로레스
그대는 순결한 처녀였는가?
모든 사내가 흠향하고 꺾을 수 있는
꽃송이의 겉은 어떤 봉오리였는가?
처음 그대에게 젖먹인 것은 어느 가슴이었는가?
어떤 죄가 그대에게 젖을 물렸는가?

문간에서 우리는 가벼이 사랑을 희롱하고
위축되며 포기하고 자제하네
사랑은 죽으나 그대는 영원한 것을
우리 고통의 성모여.

과실은 시들고 사랑은 죽어가고 시간은 방랑하나
그대는 영원의 숨결에서 양분을 얻고
무한의 변화 후에도 존재하며

죽음의 입맞춤
에서 힘을 얻는도다

괴이하고 열매없는 것들의 창백하고

독기
어린 여왕이도다.

이 입술에 닿은 자, 찰나에 변해버리고
미덕의 백합과 나른함이
죄악의 환희와 장미송이가
그대 발치에 흩어져

왕관
씌우고 어루만지며 사슬로 묶는도다
오 눈부신 불모의 돌로레스
우리 고통의 성모여.

변화와 감정의 허기로
참을 수 없는 것들의 갈증으로
헌신의 쌍둥이인 절망으로
몸서리치게 만들고 찌르는 쾌락으로
욕망을 불태우는 즐거움
즐거움을 앞서 달리는 욕망
불길처럼 귀먹고
밤처럼 눈멀은 잔인함으로

그들이 모르는 어떤 주문을
바람에 날리는 낙엽과 같은 생에?
그 어떤 고문을, 꿈꾼 적 없고 들은 적도 없고
기록된 적도, 인지한 적도 없는?

비록 그대 입맞춤에는 피가 어려도
떨리고 쓰릴 때까지 찔러오는 고통
우리가 받드는 사랑보다 정녕 자비롭도다
마음이나 정신에 상처주지 않는
쓰디쓰고 부드러운 돌로레스
우리 고통의 성모여.

나는 가장 바깥의 문에서
죄가 곧 기도인 성소까지 들어왔도다

아 그대 민족, 그대 아이들, 그대 선택된 자들
날 때부터 부정한 표식, 일그러진 그들!
우리를 옥죄고 저주하는 신들
속일 비밀을 그들은 찾아냈으니
오직 그들만이 지혜롭도다
나 역시, 나마저 그리 선택해주오
오 나의 누이, 나의 배우자, 나의 어머니
우리 고통의 성모여.

그대 광란한 포옹의 욕망은
세월의 지혜보다 더하니
비록 꽃송이에 핏자국이 맺혀도
잎에는 눈물이 젖는다 해도

오 잠들지 않는 치명적인 돌로레스
우리 고통의 성모여.

그대의 매질 아래 도시가 붉게 물들던 때를
변화의 아이들과 그들의 신들을
그대 손이 화살처럼 흩던 시절을
바다에 젖은적 없던 모래를
그대 적의 피가 달구던 때를

세계는 그대가 길들인 말과 같아
열강이 그대 문간에 엎드렸도다
우리 고통의 성모여.

그대가 포기해도 그대의 삶은 그치지 않으리
그대는 악이 살해당할 때까지 살아가리라

아, 우리 미덕을 용서하오, 용서하오
우리 고통의 성모여.

우리가 누구라고 노래의 향료와 향기로
그대를 숭배하고 포옹하는가?
시간이 무엇이길래 그의 아이들이 그대를 대적하는가?
내가 누구길래 내 입술로 그대를 모욕하는가?
그대를 상처줄 수 있으나 고통은 그대를 기쁘게 하며
애무할 수 있으나 사랑은 그대를 쫓아버리리
그대를 흥분시킬 수 있는 연인은
지옥의 독사이니.

2 thoughts on “레이디 오브 페인과 ‘돌로레스’

  1. Wishsong

    확실히 레이디님은 멀리하기에는 너무 매력적이고,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위험하죠;

    토먼트 이야기이지만, 인형에 대고 욕을 해도 튀어나오고 숭배를 해도 튀어나오고.. 그분 그림자가 어른거릴때는 그냥 눈감고 귀막고 입다무는 게 상책인 것 같아요.

    다른 이야기이지만, 소설 디스크월드 시리즈에도 비슷한 분위기에(훨씬 유머감각이 있지만) ‘레이디’라는 여신이 있죠. 찾아서도 안 되고 불러도 결코 나올 여신이 아니지만, 사람들이 가장 절실하게 도움을 필요로 할때 변덕을 부려 나타난다고 하더군요.

    Reply
    1. 로키

      레이디는 무조건 멀리하고 싶은 분 아니었나요? (..) 가까이하기엔 너무 무서운 그대인 겁.. 플레인스케이프 설정에 따르면 레이디의 그림자에 뒤덮이면 온몸이 끔찍하게 베여서 죽는다고 하니 레이디가 나타나면 무조건 튀는게 상책이겠죠. 물론 언제 어디서나 나타날 수 있고 미로에 처박을 수도 있으니 눈길을 끌지 않는 게 최고겠지만요.

      변덕쟁이 레이디라… 패러디인 거려나요..(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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