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의 소중함

예전에 참가자의 실력에 대한 글에서도 다루었던 얘기이지만, RPG라는 놀이의 기반을 이루는 것은 바로 ‘약속’입니다. 어떤 시간까지 어떤 장소에 모이겠다거나, 어떤 IRC 채널에 들어가겠다거나, 다음 주까지 글을 올리겠다거나, 등등. 약속은 RPG 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생활의 기반이기도 합니다. 약속을 통해 사람은 다른 사람의 행동을 자기 계획에 넣고 행동할 수 있게 되고, 약속을 통해서만 사람이 같이 뭔가를 한다는 것이 가능해지죠.

그런데 이렇게 RPG에서든 삶에서든 근원적이고 중요한 조건인 약속을 어기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사회생활 속에서도 물론 벌어지는 일이지만, RPG 같은 경우는 삶에서 우선순위가 높지 않은 놀이이기 때문에 약속을 어기고도 크게 미안해하지 않는 경우도 보게 됩니다.

물론 RPG는 놀이일 뿐입니다. 따라서 RPG보다 중요한 일이 생겼을 때 약속을 못 지키는 것은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습니다. (뭐라고 하면 이상한 사람이니 연락을 끊는게 상책.) 하지만 여기서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의 필수사항, 즉 사전통보의 필요성이 나오지요.

삶에서 다른 일이 벌어져서 RPG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정상적인 사회인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어떤 식으로든, 그리고 최대한 빨리 알리지 않는 것은 무계획성과 나태, 무배려함, 그리고 무례를 광고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RPG 자체는 놀이이고, 가상현실일 뿐입니다. 하지만 함께 RPG를 하는 사람들은 각자의 생활과 계획이 있는 진짜 사람들입니다. 비록 인터넷으로만 만날지는 몰라도 비디오게임 스프라이트나 인공지능이 아닌 것입니다. 약속도 지키지 않고 사전통보도 하지 않은 사람을 기다리는 것 외에도 할 일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은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강조하고 있다)

사람은 타인이 약속한 행동에 기반해서 자기 계획을 세웁니다. 누군가가 부득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사전통보를 해오면 그 계획을 수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 통보도 없이 나타나지도 않으면 원래 계획을 추진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상황에 맞게 계획을 수정할 수도 없습니다. 약속과 사전통보를 둘다 게을리하면 다른 사람을 그런 불확실성과 시간낭비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죄없는 자, 돌을 던지라’고 했던가요. 돌을 집어서 제 이마부터 찍고(..) 내려놓으려 합니다. 저도 말없이 약속을 어긴 적이 꽤 되지요. 게다가 그중 다수는 진행한다고 사람 모으고 나서 늦잠을 잔 행태여서 더욱 할말은 없습니다. (어흑) 또 시험기간 중에 미처 생각을 못하고 말없이 안나간 경우도 있었고… 때문에 통보없이 약속을 어기는 게 무슨 악의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라는 건 잘 압니다. 그저 잠시 생각이 부족했거나 아차하는 순간 잊었을 뿐이죠. 하지만 타인의 시간과 계획에 미치는 영향은 악의가 있는 경우와 똑같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약속을 좀더 잘 지키고, 안될 때는 사전통보를 하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다 뻔할 뻔자인 소리이긴 하지만 다음과 같은 방법들이 생각의 시작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글은 약속과 사전통보 자체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참여자 축출이나 캠페인 중단 등은 굳이 다루지 않겠습니다.)

1. 지킬 수 있는 약속만 한다

기본 중의 기본이지요. 약속은 의지력으로 억지로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활습관과 다른 활동의 상호작용이 맞아떨어져야 안정적으로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일어날 수 있는 시간인지, 깨어있을 수 있는 시간인지, 다른 일과 겹치지는 않는지 같은 사전 고려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합니다.

2. 의미있는 의견수렴

마찬가지로 팀 단위에서 시간을 정할 때도 이러한 사전 고려가 모두에게 적용되고 있는가 확인해야 합니다. 자칫하면 목소리 큰 몇명의 얘기대로 정해지고, 소극적인 사람들은 무리가 있는 시간대로 결정될 위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시간대에 개인적으로 무리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얘기하는 자세가 필요하겠지요. 정 모임에서 소리내어 얘기하기가 힘들다면 다른 사람 (예를 들어 진행자)에게 개인적으로 상의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3. 효과적 사전통보

위에서 통보는 ‘최대한 빨리’라고 했지만, 사실 중요한 것은 빨리 통보하는 것 자체보다는 효과적으로 통보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너무 빨리, 그리고 말 한마디로만 사전통보가 이루어져서 막상 약속시간에는 그런 통보가 있었다는 것도 잊은 (그리고 잊혀진) 경험도 있죠.

가장 좋은 방법은 통보를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모두에게 공지된 곳에 기록을 남기는 것입니다. 팀원들이 사용하는 게시판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죠. 이런 공간에 공지해 두면 통보가 다소 빨라도 기록이 남기 때문에 효과적인 통보가 가능합니다.

서로 MSN 같은 메신져에 등록되어 있다면 급할 때는 대화명에 공지하는 것도 가능하고, 핸드폰 번호를 주고받는 것도 흔히 하는 방법이죠. 어쨌든 필요할 때 서로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이 있어야 불확실성을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4. 포괄적 사전통보

약속을 어기는 이유가 계속 반복되거나 그때그때 연락을 주기 힘들 때는 포괄적인 사전통보도 한 방법입니다. ’30분 지날 때까지 못 나오면 학교 일 때문이에요’라든지, ‘제시간에 안 나오면 죽음의 골짜기에서 절망의 탑을 맨손으로 오르면서 어둠의 오크 군대와 싸우고 있기 때문이에요’라든지.

포괄적 사전통보는 통보가 된다는 면에서는 긍정적이지만, 그런 사유가 발생하는 일이 잦다면 그 참여자의 참여 내지는 캠페인의 존속 자체가 불투명하다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비정기 캠페인으로 돌리거나 주인공 일행에 가끔씩만 합류하는 인물을 설정하는 등 다양한 장치가 가능하겠고, 구체적인 합의사항은 각 팀의 사정에 따라 크게 달라지겠죠.

5. 다른 원인이 없나 확인한다

때로는 객관적으로 여건이 되는데 심적 부담 같은 다른 요인 때문에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진행에 대한 부담감이라든지, 팀원간의 갈등이라든지 하는 이유로 자기도 모르게 약속을 잊는다든지, 늦잠을 잔다든지 하는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지요. 이런 경우는 아직 캠페인 존속이 가능하고 모두가 원한다고 판단되면 기반 원인을 파악해서 해결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약속을 어기는 것은 증세일 뿐이고, 진짜 이유는 다른 곳에 있는 경우이니까요.

이상과 같이 RPG에서의 약속, 그리고 그에 부수된 문제인 사전통보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RPG는 분명 놀이일 뿐입니다. 하지만 함께 RPG를 하는 사람들은 충분히 배려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RPG야 하든 안하든 그만이지만 타인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는 결코 선택사항이 아니지요. 자신이 한 말을 지키는 것, 신뢰를 받을 자격을 보여주는 것, 그리고 사회인으로서 기본적인 예절을 지키는 것은 곧 자신의 긍지이니까요.

4 thoughts on “약속의 소중함

  1. 소년H

    그쵸.. RPG 자체야 안 해도 그만일 수 있지만 (..이라 말해도 일단 시작하고 나면 절대 그럴리 없지만) 일주일에 한 번 시간 내서 모였는데 못 하거나 이상하게 되어 버리면 열 받지요.

    (실은 그래서 사전 통보 해도 밉지만, 본인도 경험이 많아서 차마 말은 못 하겠다는 것은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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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저런..ㅋㅋ 확실히 애당초 약속을 지키는 게 가장 좋은 경우인 건 사실이고, 그래서 안정적으로 지킬 수 있는 시간대를 정하는 작업이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물론 최대한 감안해서 해도 그냥 약속을 잘 안 지키는 사람도 있으니 더욱 열받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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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물고기군

    요즘 로키님 만나기 참 힘드네요. 그래서 여기다 한번.

    http://apollina.egloos.com/l7
    저번에 말한 이상적인 남자를 만들기 위해 고민하는 여성 공돌이 이야기입니다. 생각할게 많은 주제치곤 결말이 상당히 빈약한게 흠이죠.(제목은 퀸과 루브의 연인)

    http://kr.blog.yahoo.com/silverrenjune
    요즘 포도원의 제다이를 하신다 해서 도움이 될까봐 한번 알려드립니다. 뭐, 큰 도움은 안되지만 JJK는 귀여움의 기염을 토하시는 이크리트 영감님이 대활약을 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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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좋은 링크 감사합니다. ^^ 잘 볼게요. 정말 오랜만이라서 더욱 반갑네요. 참, 그리고 앞으로는 특정 글과 관계없는 글은 방명록 (위의 Guestbook 링크)을 이용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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