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o Lupus Redux – 디안느와 디안느

얼마 전에 Canis SapiensHomo Lupus라는 글에서 늑대의 경우에 빗대어 여성이 다른 여성의 자녀를 입양하는 정치적 동기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프랑스 역사 속에서 그런 사례를 발견한 게 있어서 적어봅니다.

요즘 레오니 프리다의 카테리나 데 메디치 전기를 읽고 있는데 (이후 편의를 위해 프랑스식으로 카트린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당연히 카트린 얘기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은 그녀의 남편 앙리의 정부, 그리고 카트린의 육촌 언니기도 했던 디안느 드 프와티에이죠. 카트린이 몇년 동안의 결혼생활에도 임신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앙리는 필리파 두치라는 이탈리아 여성과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이후 필리파는 임신해서 딸을 낳았지요.

이 다음부터가 재밌는데, 앙리가 혼외에서 낳은 이 딸의 이름은 ‘디안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이미 앙리의 정부였던 디안느 드 프와티에의 이름을 딴 것일 확률이 높지요. 또한 필리파는 평생동안 많은 연금을 받으며 수녀원으로 들어갔고, 대신 그녀가 낳은 딸 디안느 드 프랑스는 디안느 드 프와티에가 키우게 되었습니다. 디안느에게는 사별한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두 성년의 딸이 있었으므로 어린 디안느를 키우기에 적격자로 판단되었지요. 왕세자비와의 혈연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고요.

이것은 디안느 드 프와티에에게 상당한 정치적 이익이었습니다. 앙리의 아이 이름에 자기 이름을 따게 하고 그 아이를 스스로 키움으로써 젊은 왕세자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디안느 드 프랑스는 왕세자 부부 슬하에 자식이 없는 원인이 앙리가 아닌 카트린이라는 산 증거였으므로 경쟁자인 왕세자비에게 한방 먹이는 결과도 되었고요. 한마디로 앙리의 아이를 맡음으로써 “앙리는 내꺼!” 를 기정사실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어린 디안느를 디안느 드 프와티에의 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정도니까요. 앙리보다 열아홉살 연상이었던 디안느가 그 나이에 출산을 했을 가능성은 희박한데도 말입니다.

여러모로 디안느 드 프와티에와 디안느 드 프랑스의 이야기는 어머니라는 지위가 가지는 정치적 이점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이 경우 연인의 서녀를 맡아줌으로써 그가 자신에게 갖는 신뢰를 과시하고, 미래를 위해 그 서녀에게도 어머니로서 미리 정을 붙여두는 것이겠죠. 나중에 디안느가 앙리와 카트린 사이에 태어난 자녀의 교육에도 큰 영향을 행사했다는 사실도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카트린으로서는 이가 안 갈릴래야 안 갈릴 수가 없었다는 것도…(…)

여담으로, 여섯살짜리 앙리가 카를로스 5세 신성 로마제국 황제의 볼모가 되기 위해 떠날 때, 일찍 어머니를 여읜 앙리에게 당시 스물 다섯의 디안느 드 프와티에가 작별의 입맞춤을 했다고 하죠. 여기서 우리는 키워서 잡아먹기의 전형을 볼 수 있습니..(퍽)

2 thoughts on “Homo Lupus Redux – 디안느와 디안느

  1. orches

    키워서 잡아먹기! 프린세스 메이커의 ‘아버지와의 엔딩’ 원형은 다름아닌.. [퍽] 더불어서 생각해보면 앙리가 사망한 후.. (오랜 세월동안 이를 갈았을) 카트린이 디안느에게 행한 복수의 칼날은.. 의외로 가벼웠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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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프메에서는 그래도 동갑이어야 되는 엔딩으로 알고 있으니 역시 디안느가 고수입..(퍽)

      예, 정말로 카트린의 복수랄 건 별게 없었죠. 권좌에서 밀어낸 정도면 자비에 더 가까우니까요. 역시 카트린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왜곡된 면이 많은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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