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어린 공포의 장, 원더랜드

짬짬이 틈을 내서 범용 RPG 규칙인 JAGS 배경 책 원더랜드를 읽었습니다. 2권인 진행자용 책은 현재 읽는 중. 공짜 RPG 책이 이렇게 질이 높을 수 있을까 놀라울 정도의 품질과 분량을 자랑하는군요. 풍부한 일러스트와 알찬 내용, 읽기 좋은 레이아웃… 아마추어 RPG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소비자와 생산자의 경계가 엷은 RPG에서는 당연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만…)

제목대로 원더랜드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어느정도 기반삼고 있지만 원작과는 전혀 다른 독창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장르는 현대 심리 공포물로서, 감염성 정신질환인 CPD에 의한 초현실적 환각과 이상행동으로 점점 생활이 붕괴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시작합니다. 하지만 환각이라기에는 석연찮은 점이 많은 것이 CPD이기도 하죠. 어째서 여러 사람이서 동시에 ‘에피소드’ (CPD 환각증세)를 겪으면서 모두 같은 경험을 기억하는지, 어째서 전혀 다른 사람들이 겪는 에피소드 사이에 공통되는 장소나 인물이 등장하는지, 어째서 에피소드가 환각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생생한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공통된 점이 있다면 원더랜드 역시 부조리하고 악의어린 유머를 추구한다는 점일 것입니다. 사무실 천장에 붙은 책상, 멀쩡히 돌아가는 반쪽짜리 TV, 색색의 갈기를 자랑하는 거대한 공룡, 자본주의를 숭배하는 거대한 신전 등, 원더랜드는 엉뚱하고 비정상인 상상이 광기어린 공포와 결코 멀지 않은 공간입니다.

이렇듯 비정상적인 사건으로 삶이 어긋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주인공은 반드시 무력한 피해자일 필요는 없습니다. 책에서는 모험과 공포의 균형, 즉 주인공에게 원더랜드의 공포와 싸울 힘이 얼마나 주어지는지 하는 문제가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말하자면 ‘크툴루의 부름’과 ‘버피’ 중 어느 쪽에 가까운 캠페인을 할지 결정하는 문제입니다. 원더랜드의 악의에 비참하게 잠식당하는 모습인가, 아니면 원더랜드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며 심지어는 원더랜드를 통해 강해지는 모습인가. 이런 고려사항을 자세히 다룬 RPG 책이 별로 없어서 더욱 호감이 가는 부분이군요.

전체적인 인상은 진행이 어려워 보이긴 하지만 매우 독특하고 매력적인 배경이라는 느낌입니다. 늘 번역의 압박에 시달리는 (…) RPG인으로서도 좋은 게, 참가자들이 굳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는 점입니다. 현실 부분이야 배경이 현대이니 따로 독서가 필요없고, 원더랜드 쪽에서는 주인공들이 아무것도 모르다가 직접 발로 뛰면서 서서히 알아가는 것도 재미있을 테니까요. 잘못 아는 것도 재미있습..(퍽)

본래 원더랜드는 JAGS를 사용하지만 규칙은 많이 들어가 있지 않으므로 다른 규칙으로 전환하는 것도 쉬워 보입니다. JAGS는 제가 다루기에는 조금 (많이) 복잡하지만 컨버젼 후에는 사용할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런 식으로 돌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광기와 해학과 공포의 장, 원더랜드에 빠져들기 위하여.

3 thoughts on “악의어린 공포의 장, 원더랜드

  1. ddowan

    구경은 해봤지만 역시 영어실력의 미숙함으로 금방 관심을 껐었습니다.
    확실히 레이아웃 등에 들어간 정성이 남달라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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