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한 RPG는 해보고 싶지만 하지 못하고 있는 것 중 하나입니다. 역사학도이신 기우님과 얘기하면서 든 생각이지만, 어째서 다른 RPG는 자료집 하나 달랑 읽거나 그나마도 안하고 편하게 진행하면서도 유독 현실세계 배경 RPG는 논문 하나 정도 쓸만큼은 공부하고 시작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건지 모를 일입니다. 역시 실제 있었던 장소, 실제 있었던 일인만큼 정확성의 부담이 있는 것일까요. 전에 시온님과의 대담에서 게임인만큼 정확성보다는 재미가 우선이라는 말이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또 실제 역사는 어떻게 보면 현대인에게 엘프 도시보다도, 외계인의 행성보다도 이질적인 곳이지요. 아무리 인간과 먼 존재를 연기한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그 관점은 현대인의 것일 수밖에 없지만, 이 지구에서 살아갔던 과거의 인간에게서야말로 우리는 진정 낯선 관점과 생각들을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 때문에 선택의 자유 또한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제한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역사는 실제로 어떻게 되었는지 이미 알고 있다는 점에서 한정성이 느껴지는 점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실제 역사에서 벗어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그래도 역시 한번 일어났던 일을 답습한다는 건 지루할지도 모릅니다. RPG는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이지 이미 일어났던 일을 재현하는 놀이는 아니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배경 RPG에 계속해서 매력을 느끼는 것은 우선 자료가 아주 많다는 점입니다. 왠만한 역사적 배경에는 어떤 RPG 자료집도 비교가 안될만큼 생생한 자료가 갖추어져 있죠. 영어로는 물론 우리말로도 말입니다. 따라서 번역의 압박이 덜합니..ㅠㅠ (퍽) 물론 정확성에 대한 압박을 지나치게 느끼면 시작조차 못하겠지만요.

사고의 이질성과 선택의 제한성 면에서는 무엇보다 주인공(PC)들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사회의 평균이나 편견이 반드시 주인공들을 구속할 필요는 없는 것이지요. 또 그런 제약들을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하는 것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편견들을 반드시 다룰 필요도 없습니다. 부각시키지 않고 적당히 넘어가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니까요. 위에서 말했듯 정확성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과도 일맥상통하지요.

또하나 역사 배경 RPG의 매력이라면 세계 설정에 따르는 개연성의 고민도 없어진다는 점입니다. 현실은 어쨌든 (대체로) 말이 되니까요. 7번째 바다의 테아에서처럼 신대륙이 없어져서 해적이 존재할 이유가 사라지지도 않고, 블루 로즈의 알디스에서처럼 국왕이 아무런 권력기반이 없어서 정권이 유지되는 게 이상한 경우도 없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런저런 이유로 역사 배경 내지는 대체역사 배경 RPG를 시작하고 싶어지는군요. 여전히 역사학도는 출입금지! (웃음) 고대 중동 역사 배경으로는 제노비아, 대체로 중세 중동 배경이지만 실제 역사와는 별 상관없는 천일야화,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해전 배경으로는 In Harm’s Way, 또 나폴레옹 전쟁이 배경이되 드래곤이 전쟁에 사용되는 대체역사 (나오미 노빅의 떼메레르 시리즈 기반) 등에 눈독을 들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