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모드 대 스토리모드

얼마 전에 든 생각이지만, 어째서 RPG 플레이는 전투모드와 스토리 모드로 갈려버리는 것일까요?

아마도 D&D와 CRPG의 유산도 있다고 생각되지만, 전투를 하고 있지 않은 ‘스토리 모드’ 때는 풍부한 롤플레잉을 하던 플레이어들도 일단 전투만 들어가면 갑자기 기계적으로 된달까요. 개성이니 롤플레이니 전술이니 하는 건 저만치 내던지고 ‘때려요. 또 때려요. 또 때려요.’의 반복이 되는 느낌입니다. 그 때문에 전 GM으로서는 전투장면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나중에는 너무 지겨워지거든요..;; 몇몇 예외가 있다면 전투에 감정적인 동기가 있어서 캐릭터성을 확실히 살려주는 경우였죠.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상황에서 무슨 얼어죽을 롤플레잉이냐!”라고 항변하셔도 사실 할말은 없습니다. 또 많은 시스템이 때리고, 때리고, 때렸노라! 식의 전투를 유도하는 것도 사실이니까요. 치밀한 전술을 세울만큼 GM이 자세한 상황설명을 해주지 않는 경우도 태반일 테고요.

하지만 말입니다. 같은 전투라도 이런 전투가 더 재밌지 않을까요? 어떤 어스돈 (Earthdawn) 게임에서는 일행이 갓난아이를 보호하고 있는 동안 아이를 노리는 몬스터가 밤에 습격해 왔다고 합니다. 순식간에 한 PC는 아이를 안고 나무 위로 도망쳤습니다. 마법사가 주변을 환하게 밝히자 적 한마리가 나무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걸 볼 수 있었죠. 그러자 나무 위로 도망친 PC는 날개달린 윈들링 PC에게 아이를 맡겼고, 윈들링은 순식간에 아이를 안고 도망쳤습니다. 그러는 동안 소드마스터와 비스트마스터는 협공으로 적 하나를 해치우고, 또 하나는 부상을 입혀서 이성을 잃게 했죠. 그리고 나무 쪽으로 몰아넣자 나무에 올라갔던 PC가 도끼를 들고 뛰어내려 몬스터 머리를 박살냈습니다. 보통 전투 하나에 30분쯤 걸리는 어스돈에서 2라운드만에 상황 종료. (참고로 전원 여성 팀이었다고 합니다.)

위와 같은 예는 각 PC가 따로 적을 때리는 게 아니라 유기적으로 각자의 장점을 살려준 결과였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저항할 수 없는 어린 생명을 지킨다는 확실한 캐릭터 동기가 있었습니다. 주변상황도 그렇게까지 자세할 필요도 없었죠. 나무가 있다. 밤이라서 어둡다. 정도는 일반적으로 하는 묘사니까요. 어떻게 하면 전투가 좀더 캐릭터성을 살리고 박진감 넘칠 수 있는지 연구해 볼만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일단 재미있는 전투를 위한 몇가지 일반화된 원칙을 얘기하자면 이런 것이 있을듯 하군요.

1. 몰입

캐릭터에게 어떤 식으로든 전투에 감정이 개입되면 일단 전투가 극적으로 될 조건은 갖춰집니다. 물론 항상 믿었던 친구가 배신을 했다든가 하는 상황을 만들 수는 없겠지만, 위에서처럼 누군가를 지킨다든가 하는 상황은 만들 수 있겠죠. 언제나 만들어줄 수 있는 조건은 아니지만…

2. 무대

간단하게라도 전투의 현장에 뭔가 특징적인 것을 넣습니다. 반드시 플레이어가 활용할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활용할 가능성은 생기니까요. 가능하면 하나 이상의 PC가 가진 기능이나 특성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을 넣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제 팀 같은 경우라면 한 PC는 운동신경이 좋으니까 양쪽으로 절벽이 솟아오르는 협곡이라든가, 또다른 PC는 바람의 정령을 부리니까 바람이 많이 부는 해변이라든가요.

3. 장애

2번의 무대와 긴밀하게 연관되는 부분이지만, PC의 능력을 이용해 극복할 수 있는 장애를 주면 좀더 유기적인 협동이 가능하겠죠. 어두우니까 마법사가 불을 밝히는 게 고전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를 지키면서 싸우는 것 또한 하나의 장애에 해당하죠.

음…뭐 말하기는 쉽지만, 실행은 또다른 문제겠군요. 저 모든 걸 내다보기도 쉽지 않고…

2 thoughts on “전투모드 대 스토리모드

    1. 로키

      어스돈 (Earthdawn)은 1994년 FASA에서 1판이 나온 판타지 RPG로, 인간, 엘프, 드워프, 트롤, 오크 등이 PC 종족이고 이계의 위협으로부터 수백년 동안 숨어지내다가 최근에야 바깥 세상으로 나온 국가들이 서로 갈등하고 연합하며 문명을 재건하고, 모험가들은 아직 잔존한 이세계의 괴물들과 싸우면서 자신의 전설과 명성을 쌓아가는 내용입니다. 이건 키워드에도 추가해야겠군요.

      Reply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