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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PG와 최적 경험 1. 최적 경험을 위하여

산다는 게 쉽지 않지요. 갑작스레 무거운 얘기일 지도 모르습니다만, 살아간다는 것은 문제의 연속입니다. 우연한 재해나 사고로 일시에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고, 살아가는 의미를 찾지 못한 채 무의미한 나날을 보내기도 하고, 가장 가까운 가족부터 시작해 인간관계는 갈등의 연속이며, 먹고사는 일은 언제나 전쟁이지요. 인간의 욕망이나 꿈 같은 것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무심한 우주에 살아간다는 것은 혼란과 고통에 쉴새없이 마주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이러한 혼돈 속에서 인간은 자기 나름의 질서와 의미를 만들어가는 존재입니다. 어떤 역경 속에서도 그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이라는 종(種)의 비대한 뇌와 발달한 전두엽의 강점이지요. 똑같이 사고나 병으로 장애가 생긴 상황에서도 ‘난 틀렸어’ 하고 포기해버릴 수도 있고, ‘지금부터 시작이다!’ 하고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도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장애가 생긴 사실이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에 부여하는 내적 질서와 의미가 다른 것이지요.

사람이 내적 질서를 만들어가는 장치 중 하나가 최적 경험 (peak experience)입니다. 의식을 흐리게 하는 약물이나 단순한 유희와 같은 일회적인 쾌락을 통해 고통과 불안을 피하는 시도도 흔하지만, 이러한 것은 보통 심리적 에너지를 분산시키고, 사람의 정신에 질서를 잡아주거나 의식을 확장시키지 않습니다. 반면 일체감과 조화감, 무아지경의 환희 등의 특징이 있는 최적 경험은 창의성과 공감, 자긍심, 의지력, 그리고 장기적 행복감을 증진하는 등 내적 질서를 정립하는 효과가 보고된 바 있습니다. 최적 경험 개념을 상당 부분 정립한 심리학자 아브라함 마슬로우 (Abraham Maslow, 1908-1970)는 지속적인 최적 경험은 자아실현의 척도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마슬로우에게 최적 경험이 그야말로 최고봉 (peak)에서 겪는 것, 초월과 하나가 되는 대면상황이라면 피터 드러커 경영대학교 교수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Mihaly Csikszentmihalyi)는 최적 경험을 땅으로 끌어내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적 경험의 중요한 특징인 일체감과 행복감, 그리고 그 결과인 성격과 능력의 긍정적 변화를 종교와 신비주의의 영역에 남겨두지 않고 일상생활로 끌어낸 것이지요. 생업과 놀이의 자연스러운 리듬 속에서 행복과 몰입을 느끼고 자아의 질서를 확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주:제가 심리학도가 아니고 이 주제에 대해 철저한 문헌조사를 한 것이 아니므로 마슬로우와 칙센트미하이가 정립한 개념의 관계에 대한 생각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적 주시거나 이후에 새로운 것을 알게 되면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칙센트미하이는 이러한 일상 속의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최적 경험을 플로우 (Flow)라고 부릅니다. 그는 동명의 책을 통해, 도전이 되는 활동에 완전히 몰입해서 자의식과 불안을 잊고 순수한 즐거움에 빠져드는 플로우는 심리적 에너지를 분산하지 않고
집중해 자아를 키우고 내적 질서를 만든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경험은 예능, 학습, 노동, 감상,
가사, 놀이 등 어떤 활동에서든 느낄 수 있으며, 개인의 자긍심과 행복감을 크게 증진시켜 풍요로운 삶에 기여한다는 것이지요. 이를 위해 책에서는 삶의 다양한 양상에서 플로우를 얻을 수 있는 조언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몰입, 미치도록 행복한 나를 만난다’는 제목으로 한울림사에서 출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활동이 플로우를 일으킬까요? 플로우에는 크게 네 가지의 공통 요소가 보입니다.(주:책에서는 여덟 가지를 들었는데, 겹치는 부분이 있어 네 가지로 줄이고 약간 재배열했습니다.)

첫째, 자신의 능력으로 달성할 가능성이 있는 도전 활동일 때 플로우가 가장 많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즉, 행위자의 능력을 너무 초과하는 도전에는 불안감을 느끼거나 포기하기 쉽고, 반면 너무 쉬워서 도전의식을 느낄 수 없으면 자극이 부족해서 완전히 집중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플로우 경험에 중요한 성장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활동을 발전적으로 지속하다 보면 잘하게 되고, 발전한 상태에서도 몰입을 지속하려면 도전의 수위를 높여가야 하지요. 그 결과 계속 발전해가고 새로운 도전에 마주하는 자신을 느끼게 되고, 자긍심과 자신감이 향상합니다.

둘째, 플로우를 일으키는 활동에는 보통 명확한 목표가 있습니다. 게임이나 스포츠에는 목표가 자명하지만 (공주를 구출해라, 상대의 골에 공을 넣어라), 예술이나 창작활동에는 그 목표의 범위가 일반적으로 개방적입니다. 후자와 같은 상황에는 목표가 무엇인지, 즉 좋은 결과나 나쁜 결과가 어떤 모습인지 안목과 감을 기르는 것 자체가 플로우 달성에 중요합니다. 목표를 스스로 설정할 수 있으며, 어느 한 가지 정답이 없는 이와 같을 활동은 더욱 복합적인 특징을 띱니다.

셋째, 그 목표의 달성에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 즉각적인 피드백이 필요합니다. 행동 하나하나가 좋은지 나쁜지 평가할 기준이 있다면 그만큼 몸짓, 붓질, 단어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이며 빠져들게 됩니다. 후회되는 과거와 불안한 미래, 일상의 자잘한 걱정에서 벗어나 현재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이지요. 그만큼 이 활동과 그 결과를 통제할 가능성이 있다는 자신감이 들고, 세계와 타인의 변덕에 흔들리는 불안한 객체가 아닌, 운명을 자기 손에 쥔 주체로서의 자긍심을 느끼게 됩니다.

넷째, 그 활동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일상을 의식하지 않고 몰입해 자의식이 사라지는 것이야말로 플로우의 중요한 특징인 일체감과 행복감을 느끼는 중요한 조건입니다. 이러한 집중은 다른 세 가지 요소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 활동 자체에 대한 호오(好惡)나 주변 환경과도 관련이 깊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집중할 수 있고 그러고 싶은 활동을 선택하는 것, 그리고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도 플로우를 만드는 중요한 요소이지요.

이렇게 최적 경험, 혹은 플로우가 무엇인지 정립하고 나면 RPG에는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남습니다. RPG 자체가 워낙 복합적인 활동이라 RPG를 하는 능력이란 무엇인지, RPG를 할 때의 도전이란 어떤 성격인지, 또 어쩌면 가장 애매하게도 목표와 피드백이 어떤 것인지 모두 복잡한 문제입니다. 집중하는 것은 사안 자체는 간단하다고 할 수 있지만 실행은 말처럼 쉽지 않고요.

앞으로 올리는 글에서는 따라서 이러한 문제들을 풀어가 보겠습니다. 우선, RPG가 복합적인 활동인 만큼 RPG인의 능력도 복합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RPG가 ‘규칙’을 매개로 ‘서사’를 ‘함께’ 만들어가는 놀이라고 정의한다면, RPG라는 활동을 하는 능력은 크게 게임적, 창의적, 사회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 능력과 향상 방법을 차례대로 살펴보고, RPG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므로 결과물을 만들어가는 실질적인 주체인 팀의 능력도 다루어 보겠습니다.

다음은 능력에 맞는 도전의 문제입니다. RPG인의 능력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면 도전 역시 그렇게 나누어볼 수 있겠지요. 따라서 게임적이고 서사적인 측면에서 도전의 수위를 측정하고 높여가는 방법, 그리고 사회적인 면에서도 인간관계의 문제를 해결해가고 더욱 깊은 지적, 창의적, 감정적 교류를 나누는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겠습니다.

목표 설정은 RPG에는 간단한 얘기가 아닙니다. 팀 단위, 개인 단위, 그리고 등장인물의 목표가 각자 다를 수 있으니까요. 뿐만 아니라 게임적 목표, 서사적 목표, 그리고 개개인의 사회적 목표가 다르고 서로 긴장 관계에 있을 수 있습니다. 무엇이 좋은 목표인지 일률적으로 말할 수도 없기에 더욱 복잡한 것이 RPG의 목표 설정이지요.

그러나 역으로 말하면 이렇듯 목표가 다양하고 복합적이며, 종종 긴장관계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RPG는 그만큼 복합적이고 재미있는 놀이이기도 합니다. 팀원간의 목표가 다르고, 또 등장인물 간의 목표가 다르다는 것은 그만큼 창의적인 긴장과 극중 재미의 원천인 갈등을 유발하니까요. 다만, 이 긴장이 지지부진한 분열이 되지 않으려면 팀 단위에서는 어느 정도 기본 목표에 대한 의사합치와 공통 가치가 필요하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따라서 팀 단위에서의 목표 설정과 그 범위를 먼저 생각해보고 팀원과 등장인물의 목표, 그리고 그 목표에 부합하는지 여부로 개별 활동을 평가할 수 있는 피드백을 다루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집중과 몰입의 문제를 생각해 보면서 RPG를 하는 시간에 집중을 하는 조건과 마음가짐, 그리고 환경 등을 다루어 보겠습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즐겁게 RPG를 즐기면서 RPG인으로서 우리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며 글을 맺을 계획입니다.

이렇게 RPG와 최적 경험 시리즈 시작합니다. 제게는 RPG뿐 아니라 놀고 창의하고 어우러져 산다는 것, 그리고 삶에 대해서까지 생각해보는 마음속 여행이 될 것 같군요. 이 여행에 많은 질책과 지적, 격려를 주시며 함께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아래는 글에 대한 대략의 계획입니다. 광열군의 ‘RPG에 좋은 캐릭터는 이래야 한다’ 시리즈를 보고 글에는 역시 계획성이 있어야 한다는 걸 느껴서 말이죠. 물론 이미 이 첫 글을 쓰면서도 달라진 만큼, 쓰면서 목차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RPG와 최적 경험 시리즈>
1. 최적 경험을 위하여
(1) 최적 경험과 플로우
(2) 플로우의 조건
(3) RPG와 플로우
2. RPG인의 능력
(1) 게임적 능력
(2) 서사적 능력
(3) 사회적 능력
(4) 팀의 능력
3. 도전을 수준에 맞추어가기
(1) 게임적 도전
(2) 서사적 도전
(3) 사회적 도전
4. RPG의 목적성과 피드백
(1) 팀 단위에서의 목적 설정
(2) 팀원 간 목적의 일치와 긴장
(3) 등장인물 간 목적의 일치와 긴장
(4) 피드백으로 목적 합치성 평가하기
5. 집중과 몰입
(1) 집중을 위한 조건
(2) 집중을 위한 마음가짐
(3) 집중을 위한 환경
(4) 결어

무의식적 판정에 대한 생각

사람이 하는 행동 중에는 의도적으로 하는 것도 많지만, 무의식적으로나 습관적으로 하는 것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원하지 않을 때도 말이죠. 때로는 행동이 의도와 전혀 다른 결과를 내기도 합니다. 친구나 선후배로만 생각했던 상대에게 고백을 받는다든지, 인상이 무서워서 상대가 쉽게 겁을 먹는다든지, 좀 심각한 예로는 아무 생각 없이 물건을 훔치는 도벽이 있다든지 하는 것이 그 예이겠지요.

위와 같은 상황을 표현하는 한 방법으로는 무의식 혹은 강제 판정이 있습니다. 위의 예를 순서대로 판정 규칙으로 설명하면 섹스어필 성공, 위협 판정 성공, 절도 성공 등이겠지요. 특히 그 인물의 특징을 표현하는 장단점이나 면모, 예를 들어 아름다운 외모, 도화살, 무서운 인상, 습관적 도벽 등과 연계해서 이들 장단점이나 면모를 발동할 때 판정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겁스에도 해당 규칙이 있겠지만 여기서는 제가 아는 세기의 혼 (Spirit of the Century)을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우선 인물의 면모에 나타난 특징, 배경, 장단점 등을 표현할 만한 상황에 직면합니다. ‘내가 관심 없는 상대에게만 인기가 있다’ 면모가 있는 인물이 동아리방에 선배와 같이 있다든지, ‘험상궂은 인상’ 면모가 있는 인물이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건다거가, ‘자신도 모르게 물건을 슬쩍한다’는 도벽 면모가 있는 인물이 백화점 진열대를 지난다든가 하는 것이 그 예이겠지요.
이런 상황이 되면 참가자나 진행자가 면모 강제 발동을 제안합니다. 강제 발동이란 면모를 인물에게 곤란하거나 불리한 (그리고 보는 사람에게는 재미있는!) 방향으로 발동하는 것으로서, 면모를 강제발동하면 해당 참가자는 극점수를 1점 받습니다. 강제발동을 피하려면 극점수를 진행자에게 1점 내지요. 여기서는 선배가 반해버린다거나, 말을 건 상대가 겁을 먹고 피한다거나, 진열대에서 물건을 슬쩍하는 방향으로 강제 발동을 제안하고 극점수를 참가자가 지급받으면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 강제발동을 실현하는 방법으로 강제 판정을 합니다. 판정의 결과가 생각과 다른다든지 (동아리 활동에 대해 선배를 설득하려고 친화력 판정을 했는데 엉뚱하게 선배를 반하게 하는 친화력 판정으로 둔갑), 사용하려던 것과 다른 기능을 자신도 모르게 사용한다든지 (친화력 판정을 하려고 했는데 위협을 굴렸다!), 전혀 판정을 할 생각이 아니었는데 강제발동의 결과로 하게 된다든지 (진열대를 무심히 지나다가 손놀림 기능으로 목걸이를 슬쩍) 하는 식으로 의도와는 다른 효과가 나겠지요.
그 외에 생각할 수 있는 예로는 습관적 거짓말 (기만 판정), 상습적 폭력 (주먹질 판정), 관심을 끊으려고 해도 참을 수 없는 호기심 (지각력 혹은 수사), 상습적 도박 (도박 판정), 자신도 모르게 남에게 명령하는 습관 (지도력) 등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판정까지 필요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이 버튼을 누르면 어떻게 될까?’) 판정 없이 강제발동만으로 충분하겠지요.
이와 같이 판정 규칙은 의도적으로 하려는 행동뿐만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 혹은 내는 결과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인물의 장단점, 배경과 같은 특징과 연계해서 사용하면 판정과 그 결과가 더욱 풍부하고 재밌어지지 않을까 싶군요.

경청하고 대화하는 RPG 3: 우리가 모르는 것들

지난번 글에서는 문제를 해결하는 대화의 초기 목적은 정보 수집이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모르는 것들이 다음과 같이 많이 때문이지요.
1. 타인의 관점과 정보를 모른다
우리가 ‘아는’ 것은 현실 그 자체가 아닙니다. 현실에 대한 개별적인 해석이지요. 누구든지 감각 정보를 자신의 경험과 지식에 비추어 걸러내고 해석해서 의미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상식 수준의 얘기입니다. 그러한 걸러내기와 해석 과정을 거치지 않고 현실을, 즉 감각정보를 있는 그대로 다 받아들인다면 감각정보의 홍수에 묻혀서 살 뿐 사람으로서, 아니 동물로서도 기능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걸러내기와 해석 과정 때문에 입장에 따라 같은 현실에 대한 결론도 크게 다르다는 것도 역시 상식적인 얘기입니다. 같은 경기를 보면서 A팀 팬에게는 심판 오심인 것이 B팀 팬이 보기에는 심판의 명판정이고 B팀의 나이스 플레이입니다. A팀 팬도, B팀 팬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둘다 옳을 수 있습니다. A팀 팬과 B팀 팬은 같은 상황에서도 자신의 관점에 맞는 것을 선택해서 확대하고, 맞지 않는 정보는 무시하는 지극히 당연한 걸러내기와 해석 과정을 거쳤을 테니까요. 그들이 각각 선택한 정보 내에서는 아마 그들의 해석은 각자 옳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A팀과 B팀 팬이 서로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른다면 당연히 싸움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A팀 팬이 걸러내서 해석한 정보 (선을 넘지도 않았었는데! 그 심판은 경기 내내 A팀에 불리하게 판정했어!) 내에서 B팀 팬의 결론을 도출한다면 어불성설일 테고, 마찬가지로 B팀 팬이 걸러내서 해석한 정보 (휘두른 순간 공이 확 휘어져서 헛스윙했지! 그날 내내 A팀 경기는 엉망이었어!) 내에서 A팀 팬의 결론을 도출하는 것도 말이 안 되니까요.
스포츠 팬끼리 적당히 싸우는 건 스포츠의 재미 중 하나기도 합니다만, 인간관계를 해칠 수도 있는 문제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이럴 때에는 상대가 왜 나하고는 의견이 다른지, 즉 같은 상황에서 어떤 정보를 받아들이고 어떻게 해석했기에 그런 결론이 나오는지 들어보기 전에는 의견 차이의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상대는 다른 정보를 가지고 다른 해석을 해서 당연히 결론이 다른 것인데, 그 생각을 (원론적으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하지 못한 채 말이죠.
뿐만 아니라 입장에 따라 접근할 수 있는 정보 자체도 다릅니다. 플레이에 매번 늦는 참가자는 저녁 늦게까지 학원을 갔다가 허겁지겁 저녁을 먹고, 동생과 싸워서 컴퓨터를 쟁취해낸 후에야 플레이를 위해 접속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이러한 정보는 공유하기 전에는 그 참가자 외에는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상대방이 같은 현실을 어떻게 걸러내고 해석했는지, 그리고 자신이 모르는 어떤 정보를 아는지는 제대로 대화를 하고 문제를 해결하려면 필요한 정보입니다. 이 점을 모르면 자신이 취사선택한 정보를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해석하고, 자신이 접근할 수 있는 정보만 고려하는 반쪽 대화가 될 테니까요. 결국 공감대 없이 서로 목소리만 높일 뿐, 진정 주고받는 소통은 없기 쉽습니다. 그래서 상대의 관점과 정보를 알아내고 자신의 관점과 정보를 전달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대화의 중요한 시작점입니다.
2. 타인의 의도를 모른다
우리는 종종 타인의 의도를 타인이 한 행동의 결과에 따라 추정합니다. 예를 들어 참가자가 플레이에 늦어서 플레이에 곤란이 생겼다면 참가자는 플레이를 곤란하게 하려고 했다, 혹은 곤란해져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찬가지로 진행자가 일방통행식 진행을 해서 재미없어졌다면 진행자는 내 재미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는 의도가 나쁜 사람은 곧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저런 상종 못할 게으르고 무배려한 인간, 저런 천하의 독재자 하는 식으로 우리의 삶에는 악역이 꽤 많지요. 타인을 나쁜 사람,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그만큼 대화로 문제를 풀어내기는 어려워지고, 감정이 쌓이거나 큰 싸움이 벌어지기도 쉬워집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독심술사가 아닌 이상 타인의 의도를 모릅니다. 행동의 결과에 따라 추정할 뿐이지요. 자꾸 늦는 참가자는 자기 때문에 시간을 바꾸자고 하기가 미안해서 시간을 맞추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데 잘 안 되는 것일 수도 있고, 일방통행식 진행자는 참가자의 적극성이 부족해서 자꾸 진행이 표류하니까 어쩔 수 없이 일방적으로 이끄는 것일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행동의 의도와 결과는 서로 별개의 개념으로 취급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행동의 결과가 의도와 어긋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결과로부터 추정한 의도는 그저 추정일 뿐, 남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추정한 의도로 타인을 마음 속에서 악역으로 만들고 왜 당신은 무배려하고 무책임하느냐, 왜 마음대로 하려고만 하느냐 하고 윽박지르는 것도 비생산적이지요.
따라서 타인의 의도를 지레짐작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추정은 그저 추리, 혹은 가설로 남겨놓고 타인의 진짜 의도를 알아내는 편이 더 정확하고, 감정적 소모가 적습니다. A님이 의도적으로 플레이를 곤란하게 할 것 같지는 않지만 이러이러한 점이 힘든데, 이유를 알 수 있겠는지, 혹은 B님의 진행 속에서 참가자는 할일이 없어 보이는데 어떤 방향을 생각하고 계신지 하는 식의 대화는 한결 얘기할 거리가 있을 것입니다. 결국 이 문제에서도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요.
3. 타인에 대한 내 행동의 결과를 모른다
타인의 행동의 결과에서 타인의 의도를 추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은 자기 행동의 결과를 의도에 맞게 추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는 플레이를 곤란하게 할 의도가 없으니까 실제로 곤란하지 않을 것이며, 나는 독재자가 될 의도가 없으니까 실제로 참가자들은 내 진행을 독재로 받아들일 리 없다고 생각하기 쉽지요.
더욱 재미있는 것은, 상대가 자신의 의도와 다른 반응을 보이면 그것은 상대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경향도 있다는 점입니다. 내가 플레이를 곤란하게 하려는 것도 아닌데 왜 화를 내는지, 내가 독재적 진행을 하려는 것도 아닌데 왜 참가자가 할일이 없다고 그러는지 말이죠. 결국 자신의 좋은 의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상대를 원망하며 역시 머릿속의 악역을 늘리게 됩니다.
여기에서도 의도와 행동은 별개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의도가 좋다고 해서 행동의 결과가 반드시 좋지는 않으며, 좋은 의도가 나쁜 결과를 정당화하지는 못합니다. 또한, 의도란 복잡해서 자신의 마음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다고 자신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좋은 의도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비생산적인 옳고 그름에 대한 다툼에 빠지기 쉽지요.
결국 중요한 것은 의도보다는 행동의 결과이며, 대화의 목적은 의도가 좋았네 나빴네 다투는 것보다는 행동의 실제적 결과에서 생긴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참가자가 남을 배려하려고 시간을 바꾸자는 얘기를 꺼내지 않고 시간을 맞추려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자꾸 늦는다면 플레이가 곤란해지며, 진행자가 진행이 표류하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참가자가 낄 데가 없다면 재미가 없을 테니까요.
그래서 타인의 의도를 혼자 억측하지 않고, 또 자신의 의도에서 결과를 유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의도는 논의할 만하지만, 실질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의도보다는 결과입니다. 감정이 쌓이지 않게 생산적으로 논의한다는 점에서 의도에 대한 토론은 분명 가치가 있지만 (감정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다루겠습니다), 결국 의도와 결과는 별개이니까요.
4. 자신이 한 원인 제공을 모른다
위 1번에서 다루었듯 같은 상황에서도 사람마다 관점과 결론이 크게 다릅니다. 그리고 사람은 모든 것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기에 같은 문제에 대해서도 타인의 원인 제공을 크게 보고 자신의 원인 제공은 잘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당신이 잘못했다, 내가 잘했다 하는 시비가 흔히 붙는데, 이것이 무익하다는 것은 이미 이전 글에서 다루었습니다.
문제를 정말 해결하려고 한다면 잘잘못을 따지는 것보다 훨씬 유익한 논의는 원인 제공, 혹은 기여도입니다. 이것은 옳고 그름과는 다른 개념으로, 상황에 대한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정죄 없이 따져보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매번 늦는 참가자가 현실적인 시간으로 플레이 약속을 잡지 않은 점, 진행자가 참가자 이야기를 듣지 않고 진행하는 점은 그들이 상황에 한 기여이지만, 다른 참여자들도 마찬가지로 상황에 기여했을 수 있습니다. 플레이 시간을 다시 잡자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거나, 진행자에게 충분히 의견을 표현하지 않았다거나 하는 것이 그 예이지요.
원인 제공에 대해 대화하는 것은 둘다 잘못했다는 식의 얘기와는 다릅니다. 잘잘못을 따지는 것과는 별개의 얘기이니까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문제에 기여는 했을 수 있으며, 그것은 잘잘못을 따지는 문제와는 다릅니다. 또한 예를 들어 약속 시간에 늦는 것이 잘못이 없는 행동이라는 것도 아닙니다. 대화의 중점을 잘잘못에 둘 것인가, 문제 해결에 둘 것인가 중에서 후자를 선택한다면 정죄보다는 원인 제공 논의가 낫다는 것이지요.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목표라면 잘잘못과 별개로 기여도를 따지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또 있습니다. 거의 어떤 상황에서든 양측 모두, 비록 한쪽이 99%이고 다른쪽이 1%라도 기여도가 있게 마련이기에, 어느 한쪽의 일방적 잘못이라는 결론이 나면 다른 쪽의 원인 제공은 묻히기 쉽습니다. 그래서 진행자가 자신의 일방통행식 진행은 잘못이었다고 인정하고 행동을 고친다 하더라도, 참여를 잘 하지 않는 참가자의 원인 제공에 대응하지 않으면 같은 문제를 얼마든지 반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의 원인 제공, 혹은 기여도를 파악해야 하는데, 타인의 원인 제공은 비교적 알기 쉽지만 자신의 원인 제공은 상대적으로 인지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타인이 문제에 어떻게 기여했는지 모두 알아야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위에서 논한 바와 같죠. 그래서 자신이 문제에 어떻게 기여했는지 알아내고 타인이 어떻게 기여했는지 (정죄 없이) 알리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대화의 초석입니다.
5. 호기심의 관점으로 접근하라
오랜 옛날에 어느 위대한 성현은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이미 안다고 생각하면 탐구할 의욕도 생기지 않을 테니까요.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크고작은 문제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안다고 생각하면 대화를 통해서 알아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자신의 추정과 억측을 기반으로 하여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위 1~4번에서 다루었듯 타인의 개입이 있는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는 정보의 반쪽밖에 모릅니다. 그 정보를 수집하지 않는 한 혼자 추정할 뿐이지요. 모르는 상태에서 내리는 진단과 해결은 불완전하고 상대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 쉽습니다. 결국 혼자 납득할 뿐 상대의 협력을 끌어내기는 어렵지요. 그리고 그 추정이 실제와 맞아떨어졌다 하더라도 먼저 대화로 풀어내고 서로 이해하는 과정이 없이는 옳은 말도 상대의 공감을 이끌어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확실성의 관점으로 대화에 접근하면 문제는 해결하기 어려우며, 호기심의 관점으로 접근하면서 모르는 정보를 알아내려고 대화를 하면 혼자 생각하는 것보다 정확한 정보를 알아내고 상대의 공감과 협력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정보 수집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첩보전을 벌이거나 독심술을 시도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역시 상대의 관점과 의도, 자기 행동의 결과와 자신의 기여도를 알아내는 방법은 대화이며, 그 중에서도 발언보다는 경청이겠지요. 그래서 다음 글에서는 경청의 문제를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경청하고 대화하는 RPG 2: 옳고 그름은 무의미하다

대화를 할 때면 대화의 목적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평소에 편하게 하는 대화야 그냥 재미로 하지만, 얘기를 꺼내는 것조차 꺼려지는 곤란한 상황이거나 대화를 통해 뭔가를 결정하는 뚜렷한 기능이 있을 때에는 그 대화에 임하는 자신의 목표의식에 따라 대화가 크게 달라집니다.

이때 대화의 목적이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라면 아예 얘기를 꺼내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즉 자신이 옳고 상대방은 그르다고 납득시키는 것이 대화의 진짜 목적이라면 그것은 애당초 불가능하거나 매우 비효율적인 목표이므로 침묵만 못합니다. 기껏 대화를 시작했다가 대판 싸움이 나고 후회하는 것은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목표였기에 그렇습니다.
옳고 그름이란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상대적입니다. 이것은 언쟁을 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알 수 있지요. 보통 어느쪽도 자신이 옳았고 상대방이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옳고 그름의 절대적인 기준이 있다면 대개의 사람에게 그것은  ‘내가 옳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각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방식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그 속에서는 옳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것은 상대도 마찬가지이기에 상대의 마음 속에서는 그가 옳고 내가 틀렸지요.
그래서 내가 옳고 네가 그르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대화는 스스로 옳다는 자신의 확신을 강화할 뿐, 상대를 납득시키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설사 설득한다고 하더라도 감정이 상하기 쉬우며, 관계를 손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정치 토론에 결론이 안 나는 이유이며, 우리말에서 ‘시비’라는 말의 어감이 부정적인 이유이기도 하겠지요. 옳고 그른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은 그야말로 시비가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누가 옳고 그른지 하는 문제는 사람의 자아 정체감과도 관련이 있으므로 더더욱 지기 어려운 문제이고, 결론을 내기도 어렵습니다. 여기서 내가 그르면 나는 바보이거나 나쁜 사람이 된다면, 누구든지 절대로 그르다는 인정을 하지 않겠지요. 혹은 한다고 하더라도 심리적 균형을 잃고 감정이 상할 것입니다. 내가 똑똑하거나 좋은 사람이라는 증명을 하려고 타인에게 그런 굴욕을 안겨주는 것도 다르게 보면 참 못할 짓입니다. (정체감에 대해서는 나중 글에서 다루겠습니다.) 그래서 옳고 그름을 가리는 대화는 결론을 내기도 어렵고, 낸다 하더라도 대가가 큰 비효율적인 활동입니다.
이렇듯 효용이 적은 시시비비가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대화의 목적이라면 한결 현실성이 있습니다만, 이때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는 문제가 남습니다. ‘내가 옳고 상대가 그르다고 상대를 설복시키는 것’이나 ‘내 해결책대로 상대가 따라오는 것’이 문제 해결의 수단이라면 역시 위의 결론이 안 나고 소모적인 시시비비로 돌아갑니다.
정말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면 우선 필요한 것은 정보입니다. 문제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해결할 수는 없겠지요. 그런데 특히 감정이 얽힌 문제일 수록 사람은 이미 모든 정보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참가자가 플레이에 매번 늦는다면 그 참가자는 무책임한 사람이고 일찍 와야 하며, 진행자가 일방통행식으로 진행한다면 그 진행자는 독재자이고 참가자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식으로 우리는 이미 문제와 해결책을 다 안다고 생각하고 대화에 임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 진단과 해결의 옳고 그름을 두고 역시 소모적인 대화를 하기 쉽지요.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을까요? 실은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가 모르는 것은 굉장히 많습니다. 자신의 관점은 알지만 타인의 관점은 모르고, 자신의 의도는 알지만 타인의 의도는 모르고, 타인이 한 행동이 자신에게 어떤 결과가 있었는지는 알지만 자신이 한 행동이 타인에게 어떤 결과가 있었는지는 모르며, 타인이 문제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는 알지만 자신이 한 기여는 잘 모릅니다.
이렇듯 모르는 것이 많다면, 먼저 모르는 정보를 알아야 문제 해결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정보를 알아내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대화이지요. 따라서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면 적어도 처음에는 그 목적은 정보를 알아내고, 상대가 모르는 정보를 알려주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다음 글에는 이렇듯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모르는 것들을 다루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대화의 초기 목적은 정보의 획득과 공유여야 한다는 점에 대해 논하도록 하겠습니다.

경청하고 대화하는 RPG 1: 문제의 제기

사람이 모여 하는 일이 다 그렇듯 RPG도 하다 보면 크고작은 문제가 발생하게 마련입니다. 참가자가 원하는 인물 설정이 마음에 안 드는데 차마 뭐라고 하기는 그래서 그대로 진행하는 일도 있고, 반대로 뭐라고 했다가 싸움이 나기도 하지요. 진행자의 일방통행식 진행이 불만일 수도 있고, 진행자가 참가자의 설정을 왜곡하거나 참가자를 괴롭히는 방향으로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가족이 옆에서 죽어가는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군요! 족쇄를 끊는다고요? 난이도는 초특급. 저런, 실패했습니다. 이번에는 눈앞에서 여동생이 칼에 찔립니다.”)
이러한 문제 앞에서 흔히 제시되는 해결책은 배려와 의사소통입니다만, 배려와 의사소통이 정확히 어떤 모습인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특히 배려와 의사소통이 각각 다음과 같은 형태가 되면 오히려 문제가 커질 수도 있습니다.
첫째, 배려가 침묵이 될 때. 기분이 나쁜데도 분위기를 깨지 말자고 생각하고 혼자 참는 것을 배려라고 생각하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냥 넘기면 대수롭지 않은 일도 많지만, 실제로 감정이 상하고 플레이에 문제가 있는데도 그냥 참고 있다 보면 감정은 점점 쌓이고 플레이는 그만큼 망가집니다.
게다가 무조건 침묵하는 배려는 타인에 대한 배려일 지는 몰라도 자신에 대한 배려는 부재한 반쪽 배려입니다. 분명히 자기 자신도 플레이에 참여하는 사람인데, 참여자 어느 한 사람이 무시당하는 것은 전원이 배려받는 건강한 분위기가 아닙니다. 그 무시가 자신이 스스로 하는 것이라도요.
두 번째 문제는 의사소통이 말다툼이 될 때입니다. 용기를 내서, 혹은 도저히 못 참고 말을 꺼냈는데, 그 결과 감정싸움과 언쟁이 일어나고 플레이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까지 손상이 오는 것 역시 건전한 의사소통은 아니겠지요. 왜 이런 인물을 만들었느냐, 왜 그런 진행을 하느냐, 참을 만큼 참았다, 왜 나한테만 이러는지 모르겠다, 당신은 왜 맨날 그러느냐.
역으로는 다들 역시 너무 조심하고 ‘배려’하느라 정작 중요한 얘기는 피하고, 아무 실질적인 해결도 변화도 없는 대화를 하는 것도 의사소통이 왜곡된 형태입니다. 아 예, 그렇게 생각하셨군요. 참고하겠습니다. 예 그건 몰랐네요. 앞으로 고치도록 하죠. 오늘 얘기해서 참 다행입니다. 등등 얘기하고 나서 다음번에도 또 똑같은 문제가 벌어진다면 그것도 아주 김빠지는 일이지요.
언쟁이든 예의바르고 공허한 대화이든 가장 큰 문제는 실질적으로는 소통이 없다는 것입니다. 각자 자기가 할 얘기를 하고, 상대의 얘기에는 제대로 귀기울이지 않을 때 이런 일이 벌어지기 쉽지요. 그나마 예의바르고 알맹이 없는 대화는 예의 면에서는 진일보한 것입니다만, 역시 쌍방향 소통과 이해가 없이는 시간낭비일 뿐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쓰려는 ‘경청하고 대화하는 RPG’ 시리즈에서는 RPG에서 의사소통의 문제를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플레이 중 문제가 생겼을 때는 물론이고 인물이나 배경 설정에 대해 토의할 때에, 앞으로 플레이가 나아갈 방향을 모색할 때에 등등 다양한 상황에서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일상생활에도 그렇고요.
글에 나오는 내용은 여러분이 이미 실행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미 하고 있는 것이라도 이론적으로 정리해서 생각해보면 더 체계적으로 실행하고, 무엇이 효과가 있고 무엇이 효과가 없는지 생각할 수 있겠지요. 또한 이 문제에 대해 토론을 하기에도 글이 있는 편이 좋을 테고요. 그래서 앞으로 이 문제에 대해 시간나는 대로 써내려가보려고 합니다.
(이번 글 시리즈는 이전에 쓰려고 했던 놀이와 대화 시리즈를 대체하며, 역시 내용은 Difficult Conversations에서 따온 것에 제 생각을 덧붙인 것입니다. 책의 구성을 따라가기는 영 안 맞아서 그냥 제가 원하는 구성으로 새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놀이와 대화 1-2: 감정에 대해 대화하기

지난번 ‘놀이와 대화’ 글에서는 대화에 드러나는 관점 차이, 즉 사건의 경위를 보는 시점의 차이, 상대와 자신의 의도와 결과에 대한 생각의 차이, 그리고 잘잘못에 대한 생각 차이를 다루어 보았습니다. 이번에는 그에 이어 모든 어려운 대화에 숨은 두 번째 대화, 감정에 대한 대화를 다루어 보겠습니다.

1. 감정 회피의 문제점

보통 감정은 대화의 주제가 아닌 주변적인 문제, 혹은 방해물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아예 못 참고 감정을 막 쏟아내는 게 아닌 이상은 ‘이성적인’ 대화에 감정을 끌어들이고 감정 이야기를 하는 것은 기피 행동이지요.

그러나 감정은 외면한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표현하지 않은 감정은 새어나오거나 분출하게 마련입니다.

감정이 대화에 새어나오는 예로 대표적인 것은 감정의 대리물로 대화 중 옳고 그름을 따지고 외부적 기준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난번 글에서 예를 든 M과 P의 대화가 그렇습니다.

M: P’는 왜 다른 주인공들하고 동떨어지는 거죠? 일행이 안 모이고 있어서…
P: 걔는 원래 그런 성격이라서 할 수 없어요.
M: 하지만 그건 주인공 성격이잖아요. 그걸 핑계로 전체의 재미를 저해하면 안 되죠.
P: ……

여기서 M은 자기 감정 얘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M의 말은 분명히 감정적입니다. 이성적 기준을 빌어서 얘기하고 있어도 사실 중심은 P가 ‘핑계’를 대고 있다거나 ‘재미를 저해’한다는 말을 통해 드러나는 짜증스러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감정은 어떤 식으로든 대화에 드러나게 마련인데도 그 실체를 외면하고 대신 옳고 그름만 따지는 것은 비생산적인 (역설적이게도) 감정 싸움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마찬가지로 감정을 외면한 채 억누르고 또 억누르다 보면 어느 순간 참지 못하고 폭발해버리는 일도 적잖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후회할 말이나 행동을 하고 인간관계가 돌이킬 수 없어져버리기도 하지요. 이렇게 봐도 감정을 부인하는 것은 감정을 다스리기는커녕 오히려 감정에 지배당하는 지름길입니다.

2. 감정을 직시하고 분석하기

물론 감정을 직시하고 대화에 생산적으로 끌어들이기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사람은 자신의 감정보다는 타인에 대한 배려를 우선해야 한다고 배우며, 또 감정, 특히 분노, 질투, 두려움 같은 부정적인 감정에 대한 부끄러움과 죄책감이 흔히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감정을 부인하고 왜곡하는 것은 거의 본능적인 반응입니다. 타인에게는 물론이고 자기 자신에게마저.

그래서 감정이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며, 좋은 사람도 얼마든지 부정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분노나 질투를 느낀다고 해서 그 감정이 곧 자기 자신은 아닙니다. 자신이 느낄 수 있는 많은 감정 중 하나일 뿐이죠. 원인을 공략해서 극복하고 해결할 대상이기는 하지만, 그 실체를 외면해서는 극복은 더 어려워집니다.

감정의 실체를 파악하려면 감정을 세분화해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M은 P에게 짜증이 난다고만 생각하기 쉽지만, 조금 나누어 보면 사실 그 실체는 훨씬 복잡할 수 있습니다. P에 대한 분노 외에도 캠페인 상태에 대한 실망감,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진행자인 자신의 무능이라는 두려움과 부담감, 협조하지 않고 있는 P에 대한 당황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감정은 알지 못한 채, 아니 자신은 감정 따위 없이 철저히 이성적이라고 믿으면서 이 모든 감정의 무게를 P에게 한꺼번에 풀어버리는 것은 별로 생산적이지 못하겠지요.

또한, 감정을 다른 것으로 둔갑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감정을 직시하고 표현하는 어려움은 감정 대화를 감정 아닌 것으로 해결하려는 데서도 드러납니다. ‘좋은 참가자라면 일행 융합에도 협조할 거야.’라는 심판이나 ‘왜 캠페인을 망치려는 거지?’라는 의도 단정, ‘당신은 배려심이 부족해요.’라는 평가, ‘이제부터는 일행과 함께 다니면 돼요.’라는 문제 해결은 감정이 아닙니다. 감정의 대체물일 따름이죠. 감정은 자신이 느끼는 것이지, 타인에 대한 판단이 아닙니다. 감정을 다른 것으로 둔갑시키려는 시도는 감정을 회피하는 또 다른 수단일 뿐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파악하면 감정과 교섭하기도 한결 수월해집니다. 감정은 절대적인 것이 아닌 만큼 인식에 따라 달라집니다. 따라서 지난 번 글에서 다룬 관점 차이를 하나씩 생각해 보면 감정을 다스리기가 좋아집니다. 사건의 경위, 상대와 자신의 의도와 행동의 결과, 사건의 원인 기여가 정말로 M이 생각한 그대로인가. P의 관점은 M의 관점과는 한결 다르지 않을까. 그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만으로도 감정의 압박을 덜 수 있으며, 그만큼 상대의 관점에 귀기울이고 문제 해결을 향해 나아갈 마음의 준비가 됩니다.

3. 감정에 대해 대화하기

자신의 감정을 파악하면 비로소 감정에 대해 생산적으로 대화할 수 있습니다. 감정을 무시해야 할 부산물로 치부하는 대신 대화 중 직접 다루고, 심판, 단정, 평가, 문제 해결 대신 자신이 무엇을 느끼는지 정직하게 이야기하면 감정은 대화에서 다룰 수 있는 사안 중 하나가 됩니다. 예를 들어 위의 M과 P의 대화에서 M이 감정이 실린 가치 평가를 하는 대신 감정을 정직하게 얘기한다면 대화는 한결 달라지겠지요.

M: 하지만 그건 주인공 성격이잖아요. 그걸 핑계로 전체의 재미를 저해하면 안 되죠.

대신에

M: 근데 일행이 잘 모이지 않아서 저로서는 진행하기가 조금 어려웠어요. 캠페인이 잘 안 되고 있는 것 같아서 당황스럽기도 했고요. 계속 일행이 흩어지면 잘할  수 있을까 걱정도 좀 되는데, P님 생각은 어떠세요?

하는 식이 될 수 있을 테니까요. 인정하지 못하는 감정이 대화에 새어나가서 내가 잘했다 네가 못했다는 싸움이 되는 대신 감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상대의 감정 역시 들어줄 자세가 되었다는 표시를 할 수 있으니까요. (눈썰미 있는 분은 1-1에서 다룬 관점 대화도 들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P의 의도가 나쁘다고 단정짓는 대신 자신에게 어떤 영향이 있는지를 다루니까요. 종합적으로 다루는 것은 2부에 할 예정입니다만, 일단 맛배기 (?))

이렇게 감정을 다룰 때면 자기 감정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감정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관심을 품고 경청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관점 차이와 마찬가지로 상대와 자신의 감정도 문제를 해결하려면 필요한 정보이니까요.

또한, 위에서 얘기한 감정에 대한 죄책감과 두려움 문제를 피하려면 자신의 것이든 상대의 것이든 감정을 평가하지 않고 일단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 인정이 곧 동의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그 감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왜 너는 그렇게 느끼느냐 혹은 내가 이런 감정이 있다니 참 바보다 하고 심판하지 않는다는 것뿐입니다.

물론 감정 얘기를 나누다 보면 자신의 것이든 타인의 것이든 비합리적이고 말도 안 되는 감정도 종종 있을 것입니다. 그런 감정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고 설득하고 싶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감정은 이성이 아닌 만큼 논리를 따르지 않습니다. 그런 감정은 잘못되었다고 논리적으로 주장하려는 것은 감정에 대한 외면과 부정직함, 그리고 억압을 유발할 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학습하는 대화를 통해 인식을 조정해 가면서 감정 역시 변화시키고 조절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려면 먼저 감정을 인정하고 감정에 대해 정직하게 대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대상은 다스릴 수도 없게 마련이지요. 감정의 존재와 그 성격에 대해 자신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정직해야 감정에 지배당하는 대신 감정을 제어하고, 감정을 비롯한 주변 문제를 생산적으로 해결할 기반을 쌓을 수 있습니다.

놀이와 대화 1-1: 관점 차이

RPG란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회적인 상황이라 별별 문제가 다 생깁니다. 다음과 같은 상황을 생각해 보죠.

캠페인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참가자 중 P의 주인공 P’가 나머지 일행을 거들떠도 보지 않아서 일행이 섞이지 않고 자꾸 평행 진행이 됩니다. 따라서 진행자 M과 다른 참가자들은 다소 짜증이 나는 상태입니다.

예, 별로 명랑발랄한 상황은 아닙니다. 이런 식의 사건들 때문에 한이 맺혀서(..?) 곤란한 행동유형이라는 글을 쓰기도 했고요.

이렇게 문제가 생겼을 때 생각할 수 있는 해결책은 몇 가지가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따르는 대가가 있지요. 아예 팀에서 자를 수도 있지만, 이건 P와의 인간관계에는 거의 치명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게 곤란하면 캠페인 중단한다고 하고 P만 따돌린 후 나머지 사람끼리 모이는 방법도 있지만, 얍씰한 건 차치하고서라도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 아무 말 없이 P와 P’는 무시하고 진행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건 서로 계속 오해와 감정이 쌓이기에 딱 좋은 방법이기도 하죠.

역시 가장 정공법이며 생산적인 해결책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겠지만, 이게 또 쉽지만은 않습니다. 서로 예의 차리느라 어색하고 곤란한 침묵으로 빠져들거나 정말 캠페인 파토날 만한 감정싸움으로 가기 쉬우니까요. 예를 들어 이런 대화가 되기 십상입니다.

M: P’는 왜 다른 주인공들하고 동떨어지는 거죠? 일행이 안 모이고 있어서…
P: 걔는 원래 그런 성격이라서 할 수 없어요.
M: 하지만 그건 주인공 성격이잖아요. 그걸 핑계로 전체의 재미를 저해하면 안 되죠.
P: ……

그러면 이 짤막한 대화를 중심으로 이 대화 속에 숨은 다른 대화들을 분석해 보겠습니다. 그것이 이 글과 다음번 글에서 다룰 세 가지 대화 중 첫 번째, 관점에 대한 대화입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하는 대화는 문제가 정확히 무엇인지, 어떤 경위로 문제가 생겼는지 하는 내용이 들어갑니다. 우리는 문제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확신이 있는 일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실 우리는 문제의 경위를 모른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모른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위의 예에서 P가 주인공 P’의 성격을 핑계로 독불장군 노릇을 하는 게 문제인 건 명백한데. 따라서 P의 RP가 문제이고, 허구적 주인공의 성격으로 자기 행동을 변호하는 행동이 잘못이고, 따라서 문제의 원인은 P이며 P가 자기 잘못을 인정해야 하는데.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그건 M의 관점입니다. P의 관점에서 본 이 상황은 전혀 다를 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P가 정말로 주인공의 성격을 핑계대고 문제를 일으키는지 P의 속마음은 P밖에 모릅니다. 핑계라는 건 P의 행동에 대한 M의 평가일 뿐이죠. 마지막으로, P의 행동이 문제의 원인이라는 것도 M의 생각입니다.

위의 문단에서 빠진 것은 바로 P의 관점입니다. M과 P의 이야기 중 우리는 M의 이야기만을 듣고 있는 셈이죠. M이 옳은데 그게 무슨 상관이느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만, M이 하는 말이 구구절절 옳다고 해도 옳다는 것은 해결책이 되지 않습니다. 갈등상황 자체가 관점의 갈등이기에 (P의 RP에 대한 관점의 차이) P의 관점을 들어보지도 않고 설득하려는 것은 아무 설득력이 없으니까요.

그런 면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대화는 근본적으로 자기 주장을 투척하는 대화가 아닌 학습하는 대화가 되어야 합니다. 관점 차이 자체가 갈등을 유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먼저 무슨 관점 차이가 있는지 알아야 갈등을 해소할 수 있습니다.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해결할 수 있는데, 서로 관점을 이해하기 전에는 문제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니까요.

이러한 관점 차이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Difficult Conversations에서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경위, 의도와 결과, 원인에 관한 관점 차이이지요.

1. 경위에 대한 관점 차이

우선, 상황이 여기까지 온 경위에 대한 생각은 다들 다소간에 다릅니다. RPG를 할 때면 놀라운 재미와 놀라운 두통(..)의 근원이 되는 것이 바로 사람은 모두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같은 상황에 있어도 사람마다 기존 경험, 들어오는 정보, 세계관, 성격 등에 따라 상황을 전혀 다르게 보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타인의 관점을 알고 있다고, 혹은 상대가 나의 관점을 안다고 생각하는 확신은 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와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며, 전혀 다른 세상을 보고 있으니까요. 마찬가지로 저쪽의 관점 따위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은 위에 얘기한 대로입니다.

예시로 돌아가자면 같은 상황이라도 문제의 경위에 대한 P의 생각은 아마 M과 전혀 다를 것입니다. P가 보기에는 자신이 맡은 주인공인 P’의 성격을 충실히 살리는 RP를 하면서 일행을 합치는 계기를 진행자 M이 만들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자신의 행동이 문제라고 하니 충분히 당황스러울 수 있겠죠.

또한, P는 주인공의 성격 RP를 훨씬 중시하는 팀 출신일 수도 있고, 일행을 뭉치게 하는 주도적인 역할은 진행자가 맡는 것에 익숙할 수도 있습니다. 이전 팀에서는 주인공 성격을 충분히 살리지 못했다고 주의를 들은 일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랬는데 이번에는 주인공 성격을 살린다고 진행자가 뭐라고 한다면 충분히 당황스러울 수 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서로 얘기하고 파악하지 않으면 이런 차이를 알 수조차 없다는 점입니다. 관점 차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환상적인(..) 생각, 혹은 상대의 관점은 중요하지 않다는 독선적인 생각도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겠죠.

2. 의도와 결과의 차이

사람은 보통 어떤 의도를 품고 행동을 합니다. 사회적인 상황에서 그 행동은 상대에게 어떤 결과를 일으키는 일이 많습니다. 위의 예에서 P’의 무덤덤하고 비사교적인 성격에 충실하려고 했던 P의 행동은 M과 다른 참가자들을 짜증나게 하는 결과를 유발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 역시 얘기하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 신경 써서 파악은 할 수 있겠습니다만 (속칭 ‘알아서 눈치 깔기’), 결국 M이 확실히 아는 것은 M 자신의 의도, 그리고 P의 행동이 M에게 일으킨 결과뿐입니다. 마찬가지로 P 역시 자신의 의도와 M의 행동이 P에게 미친 영향밖에는 확실히 알지 못하지요.

사람은 다 보는 관점이 다른데도, 그리고 한 사람이 보유한 정보는 이렇듯 제한적인데도 사람은 상대의 의도를 훤히 안다고 확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정확히는 우리에게 유발한 결과를 기준으로 상대의 의도를 단정짓죠. P의 행동은 나를 불쾌하게 했다는 결과에서 P는 이기적인 의도로 행동했다는 의도를 유추하고, M의 지적은 나를 당황하게 했다는 결과에서 M은 나를 제멋대로 조종하려고 한다는 의도를 유추하는 등.

이게 얼마나 비생산적인지는 길게 얘기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정보가 부정확하니 문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고, 문제를 모르니 해결하기도 어렵죠. 뿐만 아니라 상대에게 최악의 의도를 부여해 버리면 상대는 더 이상 상종할 수조차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결국 생산적인 문제 해결보다는 이 못된 사람을 찍어누르는 방향으로 가기 쉽습니다. (결국 길게 얘기했다..(…))

여기에서도 역시 확신을 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의도와 상대 행동의 결과. 상대가 알고 있는 것은 상대의 의도와 우리 행동의 결과뿐. 결과에서 의도를 유추하는 것은 섣부릅니다. 대화를 통해 이 정보의 차이를 줄여가야 제대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3. 원인 제공

문제가 내 탓인지 남 탓인지 얘기하라고 하면 후자를 고르는 일이 아마 대개의 사람은 압도적으로 많을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정당화에 강하니까요. 그리고 바로 그래서 잘못을 따지는 것은 비생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네가 잘못했다’는 얘기를 들으면 우선 사람은 방어적으로 되고, 변화에 저항하게 됩니다. (이건 나중에 다룰 정체성 대화와도 관련이 깊습니다.)

물론 자기가 잘못했다고 깨끗이 인정하고 고치겠다고 하는, 정말로 객관적이고 공정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조차 완전한 해결책은 되지 못합니다. 상대 역시 문제에 원인을 제공한 일이 많으니까요. 이것이 바로 잘잘못과 별개의 개념으로서의 원인 제공입니다.

위의 예로 돌아가 보면, P의 RP가 문제의 큰 부분을 차지할 수도 있지만 M 역시 원인을 제공했을 수 있습니다. 그건 둘 다 잘못이라거나 서로 사과하라거나 하는 시시비비 얘기가 아니라 앞으로 같은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는 상호 행동 교정의 문제이죠.

예를 들어 주인공 P’가 좀 비사교적인 성격이라도 일행과 융화할 수 있도록 M이 좀 더 적극적으로 계기를 제공할 수도 있었는데 P가 자기 인물의 성격을 희생해 가면서 스스로 융화하기를 기대하는 것 역시 일행이 합치지 못하는 문제에 원인이 될 수 있었겠죠. 물론 P’의 성격이 비사교적이라 일행을 무시할 것이라는 P의 태도 역시 원인 제공을 했겠고요.

둘  다 원인 제공을 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M이 P가 잘못이라고 몰아붙인다고 하는 것은 따라서 크게 두 가지 부작용이 있습니다. 첫 번째, P가 심리적 방어성이 발동해서 행동을 교정하기는 더 어려워집니다. 둘째, P의 탓이 크고 P가 이를 인정해도 M의 원인 제공은 그냥 지나가므로 같은 문제가 재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잘잘못을 떠나 문제의 원인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문제에 기여한 행동을 교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플레이 중, 그리고 어떤 사회적 상황에서든 문제가 발생할 때면 사람마다 관점이 다르게 마련이고, 그 관점 차이 자체가 갈등을 유발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관점을 알 수 있을 뿐, 상대의 관점은 알기 어렵습니다. 상대의 관점을 모르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고요.

그래서 문제의 경위에 대한 상대방의 관점, 상대의 의도와 자신이 한 행동이 상대에게 유발한 결과, 그리고 문제의 원인에 기여한 점을 서로 이야기해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확신을 상대에게 전달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상대가 아는 정보를 수집하려는 학습하는 대화가 문제를 해결하는 생산적 대화의 기본이 됩니다.

놀이와 대화: 플레이 중 문제에 대응하기

이전에 RPG를 곤란하게 하는 행동유형 7가지를 나름 적은 일이 있었습니다만, 이전에 성일님 지적도 있었듯 ‘나 저 사람 싫어’로 끝나면 발전이 없죠. 물론 RPG 팀 구성하기와 같은 글을 통해 서로 스타일이 맞고 안 맞는 사람을 가려내는 방법을 제시하기도 했으니 방법론이 아예 없다고 보지는 않습니다만, 문제 행동유형 글 자체는 건설적인 얘기라기보다는 거의 살풀이에 가깝기는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집 방식만으로는 플레이 중 생기는 모든 문제에 대응할 수 없기도 합니다. 모집을 신중하게 한다 해도 모집 단계에는 알 수 없었던 문제가 나중에 드러날 수도 있으니까요. 플레이 중 참여자 사정이 달라졌을 수도 있고, 참여자 사이에 악감정이 생길 수도 있고, 성격이 잘 안 맞을 수도 있고요.

플레이 중 문제가 생길 때는 여러 가지 대안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잘 얘기해서 해결한다든지, 플레이를 끝낸다든지, 문제가 되는 참여자를 축출한다든지. 그러나 종종 얘기를 꺼내기 자체가 어려운 일이 많고, 그래서 문제를 회피한 결과 감정은 상하고 플레이는 재미없어지는 일도 상당히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저도 그런 일이 많았고요.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한 방법론으로 플레이 중 생기는 민감한 문제에 대응하고, 문제를 해결하면서도 관계를 손상하지 않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대화법을 몇 부로 나누어서 소개해볼까 합니다. 내용은 더글래스 스톤 (Douglas Stone) 외 2인 著 ‘어려운 대화 (Difficult Conversations)’를 기반으로 합니다. RPG에 적용하고 있지만 방법론 자체는 어떤 대화에도 적용할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하죠.

글의 구성은 다음과 같이 할 예정입니다. 제가 쓴 이전 요약본을 참조한 것이라 책을 참조하면서 또 달라질 수 있겠지만요.

  1. 세 가지 대화
    1.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1. 서로 다른 관점
      2. 의도와 결과의 차이
      3. 원인 제공
    2. 감정에 대한 대화
    3. 정체성 대화
  2. 대화를 시작하기
    1. 제3의 관점에서 시작하라
    2. 문제 해결을 향한 공동 접근
  3. 대화와 경청
    1. 정보수집을 위한 질문
    2. 바꿔 말해서 명확화하기
    3. 상대의 감정 인정하기
    4. 진의를 이야기하기
    5. 주도적 문제 해결
  4. 결론과 정리

RPG란 결국은 인간관계인 만큼 인간관계와 대화의 기술을 활용하고 발전시키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무슨 만병통치약은 아니고 이런 것을 고려하면 한결 부드러워진다는 얘기 정도지만요. 놀이 중 발생하는 문제가 왜 건드리기 어려운 소재인지, 그리고 어려운 대화를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대화로 바꿔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볼 기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뻔해지자

RPG인을 위한 즉흥 기법을 다루는 블로그 글 시리즈에서 Being Obvious라는 글이 크게 와닿더군요. 직역하면 ‘뻔해지기’ 정도인데, 문맥을 보면 ‘무리하지 않기’ 혹은 ‘억지 쓰지 않기’에 가깝습니다. 한 마디로 드라마틱하게 하려고, 혹은 무섭게 하려고, 혹은 웃기려고 무리하면 보통 역효과가 나고, 스스로 보기에 가장 자연스러운 전개를 하는 게 가장 효과가 크다는 얘기입니다. 우선 억지를 부리면 티가 나게 마련이고, 별로 감동이나 재미가 없습니다. 게다가 사람은 모두 생각하는 게 달라서 자신에게는 그저 자연스러운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참신하고 놀라운 일이 많거든요.

뻔해지라는 것은 그렇다고 일부러 지루해지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죠. 예를 들어 서부극에서 정의의 보안관이 자기 친구를 죽인 범죄자와 마주쳤는데 총도 뽑지 않고, 자기 정체도 드러내지 않고 지켜만 보다가 범죄자가 사라지는 걸 방관하는 건 지루하고, 앞뒤 사정을 생각하면 자연스럽지도 않습니다. (의외로 RPG 참가자에게는 꽤 볼 수 있긴 합니다만…) 반면 결사의 총격전을 벌인다거나 협박을 주고받는 건 훨씬 자연스럽고, 또 재밌습니다. 갑자기 UFO가 내려서 두 사람 다 납치해서 사라지는 걸로 끝~이라면 웬만큼 특이한 서부극이 아니면 재미없고 억지스럽습니다. (근데 왠지 해보고 싶..)

글을 보면서 저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도 되었던 게, 저는 예전에는 극적으로 꾸미려고 너무 무리를 하는 일이 많아서 애를 먹었거든요. 요즘은 그런 경향은 많이 줄었지만 저 글을 보니 그때 뭘 잘못하고 있었는지 더욱 와닿았습니다. 요새도 가끔 빠지는 함정이기는 합니다. 아무래도 뭔가 참신하고 놀라운 걸 해보자는 건 특히 진행을 할 때면 강한 유혹이니까요.

어떻게 보면 보통 참가를 진행보다 편하게 생각하는 것도 참가자는 자기 인물을 생각해서 뻔한 것만 하면 되는 반면 진행자는 뭔가 대단한 걸 꾸며야 한다는 부담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진행자도 그냥 뻔하고 자연스럽게 해도 된다는 인식에서 시작해 이를 뒷받침하는 방법론과 기법을 쌓으면 진행도 훨씬 편하게 할 수 있는 작업이 되고, 자유도와 극적 감동을 둘 다 성취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신에게는 뻔해도 남에게는 꼭 그렇지 않으니까 굳이 억지로 꾸밀 필요는 없다는 것, 뻔하고 자연스러운 전개에는 무리하게 꾸민 것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감동과 진실성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 훨씬 편하고 재미있는 플레이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2007/10/27 추가 부분 (승민님 답글을 보고 보충했습니다)

뻔해지자는 것은 ‘뻔하고 전형적인 이야기를 유지하자’는 뜻은 아니며 (제 첫 답글에서 그런 인상이 들었을 수는 있겠습니다만), 진행자 혼자 판단으로 이야기를 전형적으로 유지하자는 뜻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보다는 ‘모든 참여자가 스스로 생각하기에’ 뻔하고 자연스럽게 하다 보면 집단 서술의 역동성에 힘입어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온다는 거죠.

예를 들어 친구를 죽인 남자와 술집에서 마주친 정의의 보안관이라면, 참가자가 생각하기에 그 보안관의 뻔한 반응 중에는 바로 총을 꺼내는 게 있을 수도 있고, 주먹을 휘두르는 것, 옆에 자리잡고 협박하는 것도 할 수 있겠죠. 마찬가지로 살인자의 반응 중 진행자가 생각하기에 뻔한 것도 마주 총을 꺼내는 것, 비웃음, 줄행랑 등 여러 가지가 가능합니다. 이런 식으로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연스러운 진행을 하면 그게 상대에게는 종종 예상치 못한 반응이기도 하고, 결과적으로는 비교적 전형적인 이야기가 된다 하더라도 그 속에 직접 참여하는 재미는 변함없죠.

중요한 건 뻔해지는 걸 두려워하면 무리하는 역효과가 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진행자가 빠지기 쉬운 함정이라는 것도 그런 얘긴데, 예를 들어 보안관이 총을 겨누고 있는데 악당이 갑자기 ‘날 못 알아보겠어, 빌리? 내가 바로 네 친구라고!’ 하면서 악당을 죽인 다음에 스스로 죽은 척하고 서로 정체를 바꿨다거나 하는 소리를 하면… 뭐 하기에 따라서는 재미있을 수도 있습니다만, 별다른 감동이나 개연성을 못 느끼면서 억지로 꾸미려고 하면 실패할 위험이 높습니다. 악당하고 싸우는 게 너무 뻔한 진행이라는 이유로 보안관이 갑자기 바에 뛰어올라 노래를 부르거나 악당하고 어깨동무하고 술을 마신다고 해도 마찬가지죠.

결국 극적 재미는 억지로 재미있게 꾸미려는 노력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게 결론이라면 결론입니다. ‘재미있게 해야지’라고 생각해서 나온다기보다는 관심과 공감이 가는 인물과 상황을 설정하고 거기서부터 시작해 자연스럽게 나오는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을 수 있죠. 진행자 혼자 참신해보려고 기를 쓴다고 재미있는 것도 아니고, 전형성이나 예측성을 거부한다고 재미있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억지로 꾸미기보다는 인물과 상황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 상황마다 자신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전개를 해서 뻔해져보면 어떨까요. 

실패하면 안 되는 판정의 역설

판정 규칙이란 성공의 가능성과 마찬가지로 실패의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때로 판정이 실패하면 절대적으로 곤란한 경우도 생기지요. 잠긴 문을 못 빠져나가면 더이상 진행이 안되는 상황에서의 자물쇠 따기 판정이라든지, 진짜로 이 판정에 실패하면 세계가 멸망하는 상황이라든지, 주인공의 목숨이 걸려있다든지.

판정에서 성공하지 않으면 못 빠져나갈 정도로 주인공을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어도 곤란하지만, 진행자도 사람인지라 그런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럴 때는 세가지 정도 해결책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1. 판정 결과를 속인다

적이 주인공에게 실제 가한 피해가 32HP인데 한 20HP 정도로 속인다든지 하는 경우입니다. 주인공을 살리거나 진행의 정체를 막기 위한 전통적인 해결책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의문도 많이 드는 방법입니다. 특히 진행중 주사위 결과를 자주 속여야 한다면 규칙 선택이 잘못됐거나 파워 레벨을 잘못 설정한 등, 뭔가 오류가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판정 결과를 속이는 방식의 변형으로는 주사위 나온 것을 보고 적의 능력치나 판정 난이도를 낮춘다든지, 결과가 안좋게 나온 주사위를 적당히 무시하고 다시 굴리라고 한다든지, 판정 반복의 시간간격이나 벌점을 무시한채 재판정을 시킨다든지 하는 방법들이 있습니다. 편하고 유서깊은(..) 해결책이기는 하지만 자주 사용해야 한다면 규칙 선택이나 진행상의 문제가 있지 않나 한번쯤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모든 판정에 초인적인 난이도를 요구하고 있거나 모든 적이 다 주인공을 훨씬 뛰어넘는 능력자라면 특히 더…

2. 판정을 하지 않는다

정 실패를 바라지 않는다면 판정하지 않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역시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어서, 판정을 해야할만큼 성공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자꾸 판정을 하지 않고 지나간다면 규칙의 전부 혹은 일부가 유명무실해지기 쉽습니다.

대표적으로 전투능력에만 치중한 주인공 일행이 사회판정을 해야 할 경우, 사회판정은 판정 없이 연기로 지나가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차라리 모든 주인공이 전투능력에 치우쳐 있다면 사회판정 규칙은 그냥 무시할 수도 있겠지만, 만약 사회능력에 투자한 주인공이 있다면 사회판정의 부재는 그 주인공의 투자를 쓸모없게 만들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투를 판정 없이 지나가지는 않을테니 결과적으로 우리의 약골 주인공은 사회능력은 유명무실해졌고 전투능력은 떨어지니 다른 주인공보다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규칙책의 어떤 부분을 사용하고 어떤 부분을 사문화시킬지는 진행자와 참가자가 합의할 문제이지만, 그러한 합의가 뚜렷이 없는 한 판정규칙, 특히 주인공들이 투자한 능력의 판정규칙은 왠만해서는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1번과 2번 해결책은 또한 그 실행이 오직 진행자의 자비에 달려있다는 점에서 진행자의 자의성 문제가 생기기 쉬우며, 심지어는 진행자가 참가자를 가지고 노는 결과도 될 수 있기 때문에 불완전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인공으로서는 손도 댈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적들이 주인공을 흠씬 두들겨패다가 다 죽을 지경이 되자 ‘그러면 다음에 다시…’ 하고 핫핫핫 웃으며 사라진다든지 말이죠. 이럴 경우 참가자들은 주인공들의 운명에 대한 제어력을 완전히 빼앗기며, 무력감과 소극성에 빠질 수 있습니다.

3. 갈등판정의 개념을 도입한다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완전한 해결책은 이것입니다. 대개의 기성 규칙책은 갈등판정보다는 행동판정을 전제로 하고 있긴 하고 있기는 하지만, 갈등판정은 어떤 규칙에든 쉽게 적용할 수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지요. 갈등판정과 행동판정의 개념은 예전에 쓴 글을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실패하면 안 되는 판정에서 갈등판정의 활용은 꽤나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판정에 무엇이 걸려있는지 미리 정해놓기 때문에 실패하면 안되는 부분은 아예 판정에 걸지조차 않음으로써 이 문제를 비껴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물 속에서 우리에 갖힌 상태에서 자물쇠를 따고 탈출해야 한다면, 이 상황에 처하게 한 신을 (혹은 진행자를) 원망하기보다는 판정에 걸린 결과를 협상할 수 있습니다. 자물쇠따기 판정 실패 -> 주인공의 익사 혹은 진행자의 선심이라는 결과보다는, 판정에 걸린 결과를 자물쇠를 따느냐 마느냐가 아닌 다른 것으로 바꾸는 것이죠. 판정에 실패한다고 자물쇠를 따기에 실패하는 대신 실패하면 따는 것이 늦어서 동료를 도와주지 못한다든지, 볼썽사납게 따서 비웃음을 산다든지, 신발에 숨긴 자물쇠 따는 도구를 들킨다든지. 역으로 말하면 성공할 경우 자물쇠를 재빨리 따고 탈출해서 동료가 잡혀가는 것을 막거나, 멋지게 따서 탄성을 자아내거나, 신발에 숨긴 도구를 들키지 않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하면 주사위운이나 진행자의 자비에 의존하지 않아도 실패하면 안되는 판정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무엇보다 성공 못지않게 실패 역시 재미있게 만들 수 있습니다. 실패가 ‘도둑 A는 그렇게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꼬르륵.’으로 이어지는 것보다는 ‘이런, 물속에 갖혀있는 사이 전사 B가 잡혀갔습니다! 이젠 어쩌죠?’로 이어지는 것이 아무래도 더 재밌으니까요.

갈등판정의 활용에는 판정과 결과의 시간적 분리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얼마전에 진행한 바빌론 베이브 5화의 경우, 주인공 사사트는 도망노예들을 이끌고 사막을 건너기 위해 베두인들을 설득해야 했죠. 이 경우 판정에 걸린 것을 ‘베두인이 안내를 해주겠다고 동의할 것이냐’가 아닌 ‘베두인이 배신하지 않고 무사히 안내해줄 것이냐’로 바꿈으로써 일단 사막을 건너는 여정을 시작은 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판정의 결과설정에 따라서는 판정과 결과가 시간적으로 분리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판정과 결과가 시간상으로 따로 나타난다는 것은 또한 의외성이라는 흥미로운 극적 요소를 제시하기도 합니다. 주인공은 자신이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바로 알 수가 없으니까요. 물론 판정의 결과가 참가자의 예상범위에서 너무 벗어나면 곤란하다는 일반원칙은 지켜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판정에 실패해서는 안되는 경우의 해결책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위에 제시한 것 외에도 규칙책에 따라 달라지는 것들로는 극점수와 같은 추가 자원의 활용과 서술권의 활용 등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특히 던전이나 트롤베이브 같은 몇몇 인디 규칙책은 ‘참가자가 판정에 성공하면 진행자가 그 결과를 서술하고, 참가자가 실패하면 진행자가 그 결과를 서술한다’는 서술권 분리 규칙을 사용하고 있어서 흥미롭습니다.

이러한 규칙이 있는 경우는 참가자가 판정에 실패한다 하더라도 서술을 통해 그 결과가 최악으로 치닫는 것을 막을 수 있으며, 판정에 성공하는 것은 서술적 제어력을 잃는 결과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서술권을 얻기 위해 실패를 바라는 경우마저 생각할 수 있죠. 간단한 규칙이면서도 성공과 실패의 일반적인 관계를 변형시킨다는 점에서 흥미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