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이론적 분석

묘사적 규칙과 서사적 규칙 도식

RPG와 최적경험 2편 (아직 미완성, 비공개) 쓰다가 갈라져나온 내용입니다. 도식을 만들기는 했는데 그 글에는 딱히 들어갈 곳이 없어서 일단 여기에 올려놓죠. 이전에 썼던 가상현실과 극적 요소 논의를 시각화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도면은 OpenOffice Draw로 제작했습니다.

묘사적 규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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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은 서사 내에 존재합니다. 이야기의 구조나 진행과 같은 서사적 요소를 직접 다루지는 않고, 판정을 통해 전체 서사 내의 일부 사건을 확정합니다. 보통 전투규칙이 제일 정교하고 양도 많지만, 사회적이거나 정신적인 사건 역시 판정으로 처리할 수 있습니다. 물리적인 요소를 되도록 정교하게 규정하려고 할 수록 규칙이 복잡해집니다. 겁스, D&D 3.5 등. 7번째 바다 (7th Sea)나 세기의 혼 (Spirit of the Century)처럼 기본적으로 묘사적인 규칙에 서사적 요소를 추가한 절충형도 있습니다.

서사적 규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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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가 곧 게임입니다. 가장 순수한 형태에서는 서사가 끝나는 조건이나 결말의 향방도 규칙으로 결정합니다. 규칙으로 다루는 요소도 대개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호감도나 타락 등 극적인 것입니다. 서사를 규칙의 논리로 완전히 규정할 수는 없는 만큼 규칙은 보통 간결하고 해석의 폭이 큽니다. 결국 서사를 만들어가는 작용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 활동에 구조를 부여하는 것이 규칙의 역할입니다. 폴라리스 (Polaris), 달을 쏘다 (Shooting the Moon), 안방극장 대모험 (Primetime Adventures) 등.

진행자와 참가자 서술권 구분의 영향

최초의 RPG는 괴물을 죽이고 보물을 획득하는 던젼 탐사물이었습니다. 지금은 훨씬 다루는 내용이 다양해졌지만, 요즘은 과연 RPG가
던젼에서 벗어난 일이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대개의 RPG는 던젼 탐사보다는 복잡한 내용이기는 하지만, 외관이 던젼이 아니라고 해도 가장 기본적이고 손쉬운 구도는 일행이 외부
세계와 맞서 싸우는 것이니까요.

그 원인을 저는 전통적인 진행자/참가자 구분에서 찾습니다. 진행자는 ‘세계’를, 참가자는 ‘주인공 일행’을 맡아서 서술
영역을 분배하는 구조에서 참가자는 외부 세계에 대한 직접 서술권이 없습니다. 따라서 제안과 합의와 같은 보완적 수단으로 서술권자에게 의견을 알릴 수는 있지만 그렇다 해도 최종적인 결정권과 구체적인 표현은 서술권자의 권한입니다.

이러한 서술권 구분은 긴장감과 의외성의 원천이기도 하며, 따라서 대립에는 딱 적절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진행자가 제어하는 몬스터와 던젼에 참가자가 제어하는 주인공 일행이 맞서는 내용에 잘 맞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RPG가 던젼에서 나온 지금도 진행자의 서술 영역인 ‘세계’와 참가자의 서술 영역인 ‘주인공’의 대립은 계속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진행자와 참가자의 서술권 구분이 외부 세계와의 대립에 얼마나 적합하게 되어 있는지는 참가자가 세계와 대립 외의 상호작용을 하려고 할 때 나타납니다. 외부 세계의 요소를 예를 들어 이용하거나 조종하려고 하면 정보가 일단 부족합니다. 따라서 서술권자인 진행자에게 묻거나 진행자와 협의해서 설정으로 정보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도 진행자는 생각이 다를 수도 있는 등, 참가자가 직접 서술할 수 있는 영역인 주인공의 행동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듭니다.

그 결과 전통적인 진행자와 참가자 구분 속에서는 대립이 가장 편해집니다. 참가자는 자기 서술 영역이 아닌 세계를 움직이려고 하기보다는 자기 서술 영역인 주인공을 독자적으로 움직여 그 의지를 관철하려고 하고, 반대가 있으면 그 반대를 극복하는 형태가 대체로 가장 빠르고 쉽습니다. 그리고 정보와 제어권의 분리 때문에 이러한 대립은 더욱 긴장감이 넘치고 재미있어지지요.

그런 대립적 소재가 오랫동안 이어져온 것은 역으로 그러한 구도의 생명력과 재미를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주인공 일행 대 세계라고 해도 그
속에는 정치, 추리 등 굉장히 다양한 소재를 담을 수 있으니까요. 그런 면에서 진행자와 참가자 구도, 그리고 거기에서 가장 쉽게 나오는 주인공
일행 대 세계의 대립 구도에는 상당한 생명력과 유연성, 범용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인공 일행 대 세계라는 구도는 한계를 드러내기도 합니다. RPG의 소재가 다양해지면서 그만큼 나올 수 있는 이야기도 폭이 넓어졌는데, 일행의 모험을 벗어나 개별 주인공의 내밀한 이야기를 다룰 때는 종종 다른 참가자들은 구경을 해야 하고 (물론 관객 시점도 재밌을
수 있지만 적어도 직접 참가는 하지 못하죠), 주인공이 세계와 맞서 싸우는 대신 정보와 권력으로 세계를 이용할 때는 종종
위에 말한 정보와 서술권의 문제에 부딪힙니다.

그래서 RPG로 좀 더 다양한 소재와 이야기를 다루려면 서술권 분배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간단한 예로는 이번 공화국의 그림자에서 참가자가 주인공 (PC) 외에 조연 (NPC)도 맡은 것만 하더라도 이야기의 폭을 확 넓히고 일행의 제약을 줄이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세션 쪽 글 중에서도 그런 플레이 기록이 눈에 띄었고, 길드타운도 그런 예죠.) 마찬가지로 장면 연출권이라든지 세계 설정, 인물 등장 등 다양한 영역에 대한 서술권의 분배 형태가 이야기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결국 서술권 분배는 플레이를 위한 도구이고, 도구란 원하는 목적에 맞게 고르고 형성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인공 일행 대 세계라는 구도를 벗어나 좀 더 폭넓은 소재의 플레이를 편하게 하려면 서술권의 분배, 명시적·암묵적 규칙 등 놀이에 사용하는 도구도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어보입니다. 책에 있는 명시적 규칙으로 분배한다면 어떤 형태가 원하는 놀이의 모습에 어울리는가, 제안과 논의로 서술권 외의 영역에 영향을 미치려고 한다면 합의가 되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는가 등등. 그런 사고의 유희와 구조 분석이 제게는 RPG의 재미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판정, 합의와 서사적 규칙

유용한 사용이 까다로운 겁스 기능 용례 댓글에서 한 논의에 대한 제 생각입니다. 논의 자체는 서술에 직접 개입하는 규칙에 대한 것이었지만, 제가 제대로 대답하려면 서술권 개념 정립부터 해야 할 것 같아서 엮인글로 뺐습니다.

RPG 등 서사적 요소가 있는 놀이 속에서는 이런저런 사건이 벌어집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A는 죽었습니다.” “서울에는 비가 왔습니다.”) 말하는 것이 서술이며, 그 서술을 최종적으로 할 수 있는 권한을 서술권이라고 합니다.

전통적으로 RPG에서는 진행자와 참가자의 서술 영역이 다릅니다. 참가자는 보통 자신의 주인공의 행동, 반응 등이 서술 범위이며, 진행자는 주인공 외의 인물과 배경 세계가 서술 범위입니다. 즉, 원칙적으로 참가자는 주인공에 대해 서술권이 있으며, 진행자는
그 외의 모든 것에 대해 서술권이 있습니다.

물론 서술권의 분리가 절대적이라면 놀이는 애당초 있을 수 없습니다. 각자 따로 놀다가 끝날 뿐이죠. 그래서 RPG에는 자신의 원칙적인 서술 영역이 아닌 범위에 영향을 미칠 수단이 있습니다. 그 수단이란 크게 판정과 합의입니다.

예를 들어 주인공 갑이 조연 을을 설득한다고 할 때, 을의 서술권자인 진행자가 보기에 저건 을이 설득당할 만한 말이라고 생각하고
을이 설득당한다고 서술할 수 있습니다. 즉, 갑의 참가자는 자신의 서술 영역이 아닌 을의 행동에 갑의 행동을 통해 영향을
행사하려고 했고, 을의 서술권자인 진행자가 여기에 명시적으로 혹은 묵시적으로 동의해 그 서술을 했습니다. 이것이 자기 서술 영역
외에 영향을 미치는 수단 중 합의입니다.

반면 갑이 을을 설득하려는데 서술권자인 진행자가 생각하기에는 을이 쉽게 동의하지 않을 것 같다거나 을이 설득당할지 불확실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 갑이 설득이나 협박 등 판정을 통해 을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시도할 수 있습니다. 판정을 해서
갑이 성공하면 을은 설득당하고, 갑이 실패하면 을은 설득당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자기 서술 영역 외에 영향을 미치는 수단 중
판정
입니다.

그러나 판정으로 해결할 때에도 놀이 분위기가 건강하다면 어떤 종류의 합의는 전제하고 있습니다. 즉, 판정으로 결과가 달라질 수는 있다는 합의이지요. 위의 예에서 참가자와 진행자는 을이 판정을 통해 설득당할 수는 있다는 합의를 하고 있습니다. 진행자가 생각하기에 이 시점에서 갑이 무슨 짓을 해도 을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판정을 애당초 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얘 마음은 안 변해. 끝.’으로 끝내면 갑의 참가자의 극적 욕구 (을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무시당하는 결과가 됩니다. 따라서, 이 점을 상의하고 참가자의 욕구를 충족할 다른 방법이 있을까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당장 자기 집이 날라갈 상황에서 말만으로는 씨도 안 먹힐 것 같은데, 그 부분을 해결해주면 어떨까?” 하는 논의가 된다면 그건 또 다른 모험의 태동이기도 하죠.

이때 판정으로 을이 설득당할 수 있다는 합의가 없는데도, 즉 진행자가 생각하기에는 아예 판정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도 참가자와 그걸 조정하기 싫어서 을에게 말도 안 되는 높은 의지력을 부여하거나 갑의 판정에 역시 말도 안 되는 페널티를 주는 일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파토에 한 발짝 다가선 증세입니다. 판정의 바탕에 있는 합의를 무시했으니까요.

위의 예로는 설득이라는 묘사적 규칙을 들었지만, 서사적 규칙도 마찬가지입니다. 극적 요소를 직접 다루는 서사적 규칙을 사용할 때도 마찬가지로 제안이 괜찮다 싶으면 합의로 그냥 갈 수 있고, 불확실하거나 서로 의견이 다를 때 판정을 매개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서사적 규칙도 묘사적 규칙과 마찬가지로 판정을 할 때는 판정의 결과를 받아들일 것이며 그럴 수 없다면 서로 상의하고 조정하겠다는 합의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서사적 규칙이라고 해서 플레이의 기본 전제를 바꾸는 것은 아니며, 상호 존중과 예의의 중요성은 서사적 규칙을 사용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의외성의 4요소

RPG를 하다 보면 종종 예상하지 못하는 결과가 나오는 것이 재미이자 때로는 스트레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외성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전에 역할극에 대한 글에 썼던 것을 따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의외성의 첫 번째 원인으로는 정보 차단이 있습니다. 진행자가 다음에 무슨 적이나 상황을 내보낼지, 참가자가 진행자의 설정에 무슨 반응을 할지 모른다는 것이 가장 고전적이겠지요. 같이 노는 타인의 마음을 읽을 수 없는 상태에서 서로 서술권의 영역이 다른 점이 여럿이서 하는 놀이에서 의외성의 가장 큰 요인이라고 봅니다.

두 번째로는 상이한 극적 욕구가 있습니다. 위의 정보 차단과도 관련이 있는데, 사람이 원하는 것이 다 같지 않은 만큼 각자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는 긴장이 종종 예상치 못한 결과를 냅니다. 폴라리스 (Polaris)의 교섭 규칙처럼 아예 이것을 판정 규칙으로 활용하는 예도 볼 수 있고, 규칙상 위치는 없이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밀고 당기는 균형과 긴장이 있을 때 의외성이 가장 커지겠지요.

세 번째는 인물과 상황의 극적 상호작용입니다. 글을 쓸 때도 나타나는 현상인데, 인물과 상황을 움직이다 보면 자연스럽게 예상하지 못한 결과가 나올 때가 있습니다. A와 맺어주려고 했는데 자꾸 B하고 가까워진다든지, 치고받고 싸우게 하려고 했는데 친구가 된다든지. 이렇듯 인물이 독자적 생명력을 띠기도 한다는 점이 보드게임과 다른 RPG의 재미이겠지요. 심지어는 사전 논의를 통해 정보를 공유하고 극적 욕구를 서로 조화했을 때도 실제 상호작용의 결과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가 나오기도 합니다.

네 번째는 판정의 의외성입니다. 주사위나 카드 등 무작위의 요소가 있을 때 가장 강하게 나타나는데, 계속 펌블이 떠서 형편없는 적에게 주인공 일행이 몰살당한다든지 비교적 강한 적을 한 방의 크리로 단칼척살해버린다든지 하는 때가 가장 의외이겠죠. 무작위수가 아니라 하더라도 판정 과정 자체에서 정보 차단, 상이한 극적 욕구, 극적 상호작용 등 다른 의외성의 요소를 판정 규칙이 종종 끌어냅니다.

이렇게 의외성의 요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언급했듯 의외성은 재미를 증진할 수도 있고, 재미를 저해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의외성을 어떻게 하면 가장 적당한 수위로 조정할 수 있는가, 어느 요소를 살리고 어느 요소를 제한하고 싶은가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역할극에 대한 생각

종종 규칙 없는 RP (소위 역할극, 역극, 혹은 소꿉놀이)를 함께 하는 오체스님과 얼마 전에 한 얘기인데, 오체스님은 개인적으로 규칙 없는 놀이가 가장 좋다고 하시더군요. (주사위만 나오면 불안해하시는 모습에 짐작은 했습니다만..(..)) 반면 저는 규칙이 있는 편을 선호하고요. 제가 생각하기에 역할극이 RPG와 다른 점은 크게 다음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역할극은 놀이와 인간관계 사이에 분리가 없습니다. 진행 방향, 예를 들어 주인공이 괴물에게 이기느냐 지느냐 하는 문제는 모두 명시적, 혹은 묵시적 합의로 결정하고, 결정을 내릴 객관적이고 외부적인 기준이 없으므로 결국은 놀이 속 인물의 문제가 아닌 그 놀이를 하는 사람의 의사소통이 됩니다. 객관적 기준이 없는 만큼 이러한 의사결정을 인간관계와 분리하기는 더욱 어려워지고요.

물론 규칙이 있는 RPG에도 규칙 없이 합의로 결정하는 영역은 광범위합니다. 캠페인 설정이라든지, 인물 설정, 때에 따라서는 놀이의 진행 방향 등. 그러나 서로 진행 방향에 대해 의견이 다를 때, 혹은 결과에 대해서는 생각이 같아도 과정의 난이도나 따르는 대가에 대해 이견이 있을 때 이를 해소할 기준은 있습니다. (그 기준이 어떤 성격이기를 원하느냐에 따라 가장 좋은 규칙도 달라지겠지요.)

역할극에 그러한 기준이 없어서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은 보통 둘 중 하나입니다. 하나는 진행 방향에 대한 비생산적인 신경전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관계를 생각해 서로 조심하고 눈치보면서 자신의 욕구와 극적 재미를 양보하는 것입니다. 배려가 나쁜 건 아니지만, 인간관계의 논리인 배려가 놀이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면 어느쪽도 결과에 만족하지 못할 우려가 있습니다.

물론 역할극도 감이 맞는 사람끼리 하고 의사소통이 원활하면 얼마든지 재미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어렵기는 합니다. 기준이 없는 상태에서 모든 것을 합의해야 하고, 플레이와 좋은 감정을 유지하려면 서로 더 조심해야 하니까요. 적어도 놀이와 인간관계 사이에 규칙이라는 기준의 방벽이 없는 만큼 마음껏 밀고 당길 여유는 훨씬 적어집니다.

개인적으로는 제가 의견이 강하고 성격이 괄괄한 편이라 역할극을 할 때는 더 조심하게 됩니다. 특히 상대가 순응적인 성격일 때면 자칫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다 흘러갈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그런 성격인 만큼 상대 역시 강한 의견으로 반대해 오든, 아니면 규칙을 매개로 스스로 원하는 방향을 밀든 활발하게 반대하고 논의하고 부딪치는 편을 선호합니다.

반면 성격과 취향에 따라서는 그런 전투적(..)인 의사결정보다는 서로 배려하고 양보하는 화합을 더 중시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자기 의견을 존중해주고 감각이 잘 맞는 상대가 있다면 상대에게 떠밀리거나 플레이가 재미없을 우려는 많이 줄겠지요. 따라서, 중요한 것은 각자의 상황, 그리고 놀이와 인간관계를 얼마나 분리하는 것이 본인에게 재밌느냐인 것 같습니다.

두 번째, RPG에 비해 역할극은 긴장감과 의외성이 적습니다. 긴장감과 의외성의 원인은 크게 네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같이 플레이하는 다른 참여자의 생각과 결정을 완전히 예측할 수 없다는 점, 둘째는 참여자가 각자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나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긴장, 셋째는 인물과 상황의 상호 반응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의외성, 넷째는 주사위나 카드 등 규칙에서 나오는 우연의 요소입니다.

역할극에서는 의외성의 네 번째 요소인 규칙은 일단 배제하고 있고, 두 번째인 역동적 균형 역시 위에서 얘기한 조심성과 상호 배려 때문에 약해질 여지가 큽니다. 원하는 방향으로 밀고 나가다 보면 의견 충돌에 휘말릴 가능성은 커지고, 해소할 객관적 기준이 없는 만큼 이러한 충돌은 기피의 대상이 되니까요.

의외성의 첫 번째 요소인 정보 차단은 경과를 미리 얘기하고 정하는 것이 많을 수록 약해질 텐데, 역할극에는 위에 얘기한 이유로 의견 충돌의 완충지대를 둘 동기가 있으므로 제 경험상으로는 미리 정해두는 게 꽤 많아지더라고요. 남는 것은 의외성의 세 번째 요소인 상호 반응 정도인데, 이것도 경과를 이미 정해둔 정도에 비례해 약해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물론 긴장감과 의외성이 적다는 점 역시 취향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장점일 수 있습니다. 긴장감과 의외성이 적다는 얘기는 다시 말하면 안정적이고 안전하다는 얘기이기도 하니까요. 플레이의 방향에 따라 인물이 죽거나 인간관계가 돌이킬 수 없게 되거나, 원치 않는 극적 방향으로 흐르거나 하는 결과를 미리 차단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특히 놀이 속의 인물과 특정 극적 결과에 애착이 크면 클 수록 이러한 안정성은 큰 매력이기도 합니다.

이상과 같이 역할극과 RPG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제 개인적인 선호도야 있지만, 저에게 좋은 것이 다른 분에게도 좋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각자 원하는 게 다르니까요. 또한, 역할극을 하지 않는다 해도 놀이와 인간관계 분리의 정도라든지 의외성의 정도도 취향에 따라 조정할 수 있을 테고요. (다 규칙대로 하되, 참가자 동의 없이 주인공이 죽는 일은 없다든지.) 그런 점을 생각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도 역할극은 흥미로운 소재인 것 같습니다.

자료 중심 배경과 분위기 중심 배경

이전에 Story Games 게시판에서 보았던 개념인데, 이번에 승한님의 트랜스휴먼 스페이스 (Transhuman Space) 번역을 보면서 다시 생각이 나서 제가 이해한 대로 적어봅니다.

자료 중심 배경은 바로 트랜스휴먼 스페이스 같은 것으로, 대개의 전통적 RPG 규칙에 사용하는 설정은 자료 중심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세계의 모습은 다소간에 이미 잡혀 있으며, 구체적인 자료와 지명, 인물 설정 등이 추가 설정과 전개의 실마리가 됩니다. 자료 중심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꽤 많은 설정 자료를 (특히 진행자가) 읽고 익히는 것이 보통입니다.

분위기 중심 배경은 반면 자료가 비교적 적습니다. 책에 나오는 자료만으로는 완전한 캠페인 배경을 채워넣을 수 없을 정도이지요. 대신 창작과 즉흥의 기반이 될 만한 함의와 암시를 통해 설정에 대한 이해와 기대치를 조율하는 데 중점을 둡니다. 많은 인디 RPG에서 볼 수 있으며, 설정 분량 자체가 적고 구체적인 지명과 집단보다는 광범위의 상황 설정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포도원의 개들 (Dogs in the Vineyard)의 설정란 앞부분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번역은 로키가 대충대충)

다른 RPG를 많이 진행해 봤다면 진행자이든, 제작자이든 한 사람의 상상에 맞추어 일관성 있는 세계를 만들어가는 데 익숙할 것입니다. 개들은 그런 식으로 플레이하게 만든 게임이 아닙니다. 개들을 플레이할 때면 각 참가자의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모아서 공통 현실로 만듦으로써 일관된 세계를 만들어갑니다.

이게 어떻게 보면 분위기 중심 설정의 기본 철학입니다. 이 세계는 대충 이런 곳이니 구체적인 부분은 스스로 채워가라. 거기서부터 생기는 해석 차이는 문제나 병리가 아니며, 오히려 공동 상상 공간을 짓는 재료라고 말이죠. 인디 RPG에 분위기 중심 설정이 많이 보이는 건 한편으로는 예산과 시간이 별로 없는 개인 제작자라는 배경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이들 규칙 자체의 즉흥적이고 협동적인 성격도 작용하지 않을까 합니다.

개인적 취향으로는 자료 분량은 적은 편을 선호하기는 합니다. 구체적인 자료가 많으면 일단 읽고 소화하는 시간이 들고, 저는 기억력이 별로인 데다 준비 많이 하는 걸 싫어하고 스타일에 즉흥성이 강해서 좀 하다 보면 어느새 원래 설정과는 딴세상이 돼버리거든요.

그래서 자료가 많은 설정이라도 즉흥의 발판으로 생각하는 태도가 필요한데, 저는 또 자료가 많으면 얽매이는지라 대범하게
무시해버리는 걸 또 잘 못하는 것 같아요. (“자..잠깐. 이 집단이 어디로 도망쳤었지? 지금 여기 나타나면 안 되는 거
아냐?!” (뒤적뒤적)) 그런 이유로 부담 없이 즐길 수 있고 즉흥을 뒷받침하는 게 목적인 분위기 중심 설정이 마음이
편하더군요.

제 취향 얘기에서 벗어나서 남의 취향 얘기도 하자면(?) 이런 쪽의 선호도는 또 놀이를 하는 목적, 즉 놀이를 하면서 재미를 느끼는 부분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많은 분량의 구체적인 자료를 제일 선호할 듯한 취향은 아무래도 모사주의
(Simulationism) 쪽? 가상 세계의 탐험에서 재미를 느낀다면 세계의 자세한 내적 논리와 일관성이라는 기반이 필요할
테니까요.

물론 자료 중심 배경과 분위기 중심 배경은 본질적으로 다르거나 서로 배척하는 개념은 아닙니다. 접근 차이는 있지만 자료 중심 배경이 제공하는 자료는 이미지를 형성하고 창작을 자극하는 역할을 하며, 분위기 중심 배경도 창작과 즉흥의 방향을 제공하고 이미지를 만들 정도의 자료는 제공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이 설정이 어느 분류에 속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설정 자료를 제공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 목적을 더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가이겠죠. 목적이 플레이를 손쉽게 시작하게 돕는 것이든, 치밀한 배경을 구성해
그 세계를 탐색하는 것이든, 창작의 기반과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이든, 서로 기대치와 이미지를 조율하는 것이든 그 목적에 이
정보가 꼭 필요한지 생각해가면서 하면 더욱 효과적인 설정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판정 – 가상현실과 극적 요소

이런저런 RPG 규칙을 접하다 보니 RPG 규칙에는 가상현실을 다루는 것과 극적 요소를 직접 다루는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승민님의 글 묘사 중심룰과 서사 중심룰과 같은 맥락이군요, 다 써놓고 나니..(..) 그 논지를 좀 더 상세하게 제 나름 발전시켰다고 생각해 주세요 (?).

가상현실 중심 규칙은 가상공간의 물리법칙과 논리를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둡니다. 예를 들어 힘센 사람이 무거운 바위를 성공적으로 들어올릴 확률은 힘이 약한 사람이 같은 일을 해낼 확률보다 높다든지 하는 식이죠. 가상현실에서 물리적으로 가능한 것과 성공할 만한 것은 참여자의 공감보다는 그 물리법칙을 표현하는 규칙으로 판단합니다. 장기 캠페인을 받쳐줄 만한 규칙의 분량과 범위에 대한 논의라든지, 다양한 상황을 표현하려면 규칙은 많은 게 좋다는 주장의 전제에는 규칙의 가상현실 표현 기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가상현실 중심 규칙은 D&D, 겁스 (GURPS), 7번째 바다 (7th Sea), WoD (World of Darkness) 등 제가 아는 모든 상용 규칙책의 근간을 이루고 있습니다. 퍼지 (FUDGE), 세기의 혼 (Spirit of the Century), 미딕 (Mythic Roleplaying), 과거의 그늘 (The Shadow of Yesterday) 등 많은 인디 RPG도 마찬가지죠. 판정은 기본적으로 실력과 상황 수정치에 따른 확률을 이용하는 굴림이며, 낙상이나 익사, 폭발 등 다양한 상황을 처리하는 규칙이 있기도 합니다.

반면 위에서 예를 든 규칙책에도 가상현실의 논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규칙도 있습니다. D20 계열이나 변형에서 볼 수 있는 액션 포인트라든지 겁스에서 추가 규칙으로 할 수 있는 CP 소모, 7번째 바다의 극주사위나 배경 규칙, WoD의 의지력 규칙, 미딕의 무작위 사건 생성 규칙, 과거의 그늘에서 특정 조건에 맞는 RP를 하면 성장하는 열쇠 규칙 등이 그 예입니다.

이들 규칙은 가상현실 속에 있는 등장인물의 실력이나 의지보다는 참여자의 극적 욕구를 반영하며, 가상현실 법칙을 표현한다기보다는 가상현실의 법칙에 저항하거나 서술을 조작합니다. 즉, 극적 요소를 직접 다룬다는 면에서 가상현실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둔 규칙과는 기능적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가상현실 법칙이 아닌 플레이의 극적 요소를 직접 다루는 규칙을 판정의 근간으로 삼는 규칙도 더러 있습니다. 포도원의 개들 (Dogs in the Vineyard)의 도전-응대식 판정, 폴라리스 (Polaris)의 서술 교섭, 수정주의 역사 (Revisionist History)의 반박 경매 규칙, 안방극장 대모험 (Primetime Adventures)의 장면 판정 등이 그 예이지요. 서술권의 대부분은 전통적으로 진행자의 역할인 만큼 참가자에게 서술권을 많이 주는 규칙일 수록 진행자와 참가자의 역할 분배도 분산적 성격을 보입니다.

이들 규칙책에서는 물리적으로 무엇이 가능한지는 참여자 간 공감으로 해결하며, 정말로 판정이 필요한 때는 극적 방향에 대해 의견이 갈릴 때입니다. (참가자: ‘경비를 다 죽여요!’ 진행자: ‘경비는 다 죽습니다!’ 참가자: ‘마왕도 죽여요!’ 진행자: ‘음… 그건 판정을 해볼까요?’) 포도원의 개들에서는 아무도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는다면 ‘달을 쏘아서 적의 머리에 떨어뜨려요’ 같은 선언도 통과합니다. 수정주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로 아무도 반박하지 않는다면 ‘장군은 한 달음에 산을 넘어 3만 대군을 맨주먹으로 죽였다’ 같은 글도 역사적 진실이 됩니다. (신화적인 분위기라면 오히려 환영할지도 모르죠.)

그래서 규칙의 가상현실 표현 기능을 중시한다면 포도원의 개들이나 안방극장 대모험 같은 규칙은 장기 캠페인을 하기에는 빈약하다거나, 상황 표현력이 부족하다고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상현실 속의 법칙을 표현하는 데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으니까요. 반면 저는 가상현실 표현보다는 극적 욕구 연출이 훨씬 우선이라 가상현실 표현 때문에 극적 욕구가 좌절되는 것은 잘 참지 못해서 극적 요소를 직접 다루는 규칙 쪽을 선호합니다. 결국 어느 쪽이 우선이느냐, 혹은 극적 욕구를 어떤 방식으로 충족하는 것을 선호하느냐 하는 문제겠죠.

참고로 극적 욕구나 연출 얘기는 이야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제 마음대로 가야 성이 찬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시나리오 중심 진행은 거의 가상현실 중심 규칙의 특권에 가깝습니다. 극적 요소를 직접 조작하는 규칙은 시나리오에 나올 만한 요소들을 바로 움직일 수 있으므로 누구 한 사람이 앞으로 이야기를 예상하거나 준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니까요. 따라서 이러한 규칙을 할 때는 다른 참여자와 의견이 충돌하고 그 충돌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극적 의외성과 역동성을 극대화할 수 있습니다. 준비하는 부담이 적거나 없다는 점도 개인적으로 매력적이고요.

대비해 놓기는 했지만 물론 가상현실 표현과 극적 요소의 조작은 서로 조화할 수 없는 개념은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 보완하죠. 예를 들어, 제가 얘기한 극적 욕구와 가상현실의 충돌 부분을 많은 가상현실 중심 규칙에서는 극적 요소를 직접 다루는 규칙으로 보완하고 있습니다. 이번 판정은 극적 욕구상 꼭 성공했으면 좋겠는데 가상현실 법칙상 확률이 낮아서 극점수를 소모한다든지요. 그런 규칙은 자원 관리 도전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전술적 재미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구분의 효용은 무엇일까요? 심심해서 제가 보기에는 어떤 규칙의 목적이 무엇이고 그 목적을 얼마나 잘 수행하는지, 그리고 그러한 규칙이 RPG의 재미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기능적으로 분석하는 기준으로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가상현실 표현이 자신의 재미에 얼마나 중요한지, 극적 요소를 직접 조작하는 것이 몰입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등등. 이러한 판단은 전에 적었듯 규칙의 선택, 수정, 제작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판정 스트레스와 참가자 서술권

며칠 전에 승한님과 진행자의 필요성과 서술권 분배에 대해 나눈 대화에서 떠오른 생각인데, 많은 참가자가 주사위 결과에 집착하고 실패를 두려워하는 원인이 서술권 분배 방식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전통적인 RPG 역할 분배에서 진행자는 주변 세계와 조연에 대한 것을 서술하고, 참가자는 그 참가자가 맡은 주인공이 하는 언행을 서술합니다. 주인공이 하는 판정은 참가자의 서술 영역과 진행자의 서술 영역 사이에서 일어나므로 판정 규칙은 성공 여부에 따라 참가자의 서술권을 확장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화살로 오크의 눈을 꿰뚫습니다.” 하는 참가자 선언과 그에 따른 판정을 생각해 보죠. 성공했을 때는 참가자의 서술이 진행자의 서술 없이도 진행자의 서술 영역인 주인공 외부에 작용하며, 참가자가 서술하는 목적인 극적, 게임적 목적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실패했을 때는 주인공의 이미지와 같은 극적 목적이나 오크를 쓰러뜨리는 게임적 목적을 달성할 수 없으며, 무엇보다 주인공의 행동이라는 제한적인 서술 영역에서마저 참가자의 서술을 관철할 수 없다는 느낌을 받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성공보다 실패가 재미없어지고 주사위 결과에 집착하게 됩니다.

물론 판정 실패가 판정 성공보다 불리한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기는 합니다. 또한, 게임적 관점에서 보면 캐릭터 성장이나 전술적 판단을 통해 판정 성공률을 높이려는 노력 자체도 게임의 재미이지요. 그러나 그 점을 보존하면서도 판정 실패에도 극적 재미나 게임적 도전을 부여하면 참가자의 재미가 주사위 굴림에 의존하는 현상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갈등 판정 개념을 도입하는 것입니다. 판정에 무엇을 걸지 결정해서 성공과 실패가 둘 다 재미있도록 조절하는 것이죠. 판정에 성공하면 화살로 오크 눈을 맞추고 실패하면 헛손질로 끝이 아니라, 성공하면 휘황한 궁술을 본 오크들이 겁을 먹고 못 쫓아오고 실패하면 성난 오크들이 일제히 추적해 온다든가.

갈등 판정에서는 무엇을 걸지 않는지 하는 문제가 무엇을 거는지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놀라운 궁술을 선보이는 건 같게 해서 참가자의 극적 욕구를 충족하되, 성공하면 오크 수장을 일격에 쓰러뜨려서 오크가 조직적인 저항을 못하게 하지만 실패하면 졸개를 쓰러뜨려서 괜히 이쪽이 숨은 위치만 들키고 오크들이 조직적으로 반격해 온다든지요.

갈등 판정의 승패에 거는 결과 결정에는 참가자가 참여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면 참가자의 극적 욕구가 진행에 직접 반영되며, 실패도 참가자에게 재미있을 가능성이 더 커지니까요. 이것은 참가자의 서술권이 전통적인 참가자의 서술 영역보다 넓어지는 결과가 되므로 가상현실의 환상은 깨지기 쉽습니다. 참가자가 마음대로 제어할 수 없는 외부 가상현실이 있다면 활을 쏘는 행동의 극적 결과를 참가자가 정할 수 있을 리 없으니까요. 가상현실을 경험하는 재미가 중요하다면 갈등 판정의 결과는 진행자가 정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생각하면 진행자의 권한이 강하고 가상현실 경험을 중시하는 RPG에서 참가자의 극적 욕구를 실현하기 어려운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을 통해 뭔가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는 있는데 그 실현이 판정 성공에 달렸다면 재미가 확률에 의존하는 데다, 진행자에게 극적 권한이 대부분 있으니 참가자가 원하는 상황이 나오는 것도 안정적이지 않죠.

그래도 팀내 의사소통이 활발하고 참가자의 욕구를 진행자가 활발하게 반영한다면 많이 보완할 수 있는 점이니까, 게임성과 가상현실 경험을 보존이 중요하다면 진행자 중심 체제를 유지하면서 의사 소통의 활성화로 참가자의 극적 욕구 충족을 최대한 도모하는 것이 나을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참가자에게 폭넓은 서술 권한을 주는 편이 참가자의 극적 욕구 실현에 더 직접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가상현실 경험보다는 극적이고 역동적인 공통 서사와 극적 욕구 실현을 중시하는 제 취향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방식이 좋은지는 목적을 전제하지 않고는 논할 수 없는 문제라, 목적과 상관없이 모두에게 객관적으로 좋은 방법이란 없으니까요.

물론 특정 목적을 실현하는 데 어떤 방식이 적합한지는 생산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문제라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갈등 판정 개념 도입은 실패가 성공보다 재미없는 현상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목적에는 참가자가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게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만, 가상현실의 환상 유지라는 또 다른 목적이 중요하다면 진행자가 그 결정의 주체가 되는 것이 좋다는 것이 제 결론입니다. 

바바와 나 – 내가 바바 히데카즈에게 배운 것

2004년 12월, 처음 RPG를 시작했을 때 저는 RPG라는 취미가 어떤 것인지 굉장히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글을 읽는 것부터 시작했지요. 처음 찾은 것이 존 킴 (영문)의 글, 그리고 제가 처음 가입한 RPG 사이트였던 다이스&챗 강좌/토의 란에 있는 바바 히데카즈의 마스터링 강좌였습니다.

바바의 글은 여러모로 논란이 많은 것 같고, 저도 그의 논지에 모두 동조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마스터링 강좌를 비롯한 그의 글은 굉장히 도움이 되는 조언을 많이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의 글은 제가 RPG를 하는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그 영향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그 과정에서 나름 재해석이나 비판도 들어갔지만요.

그래서 다른 분에게도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에, 그리고 같이 토론해볼 수 있게 제가 바바 히데카즈의 글에서 배운 것들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1. RPG는 게임이다 (+ α)

아마도 제일 논란이 큰 대목인 것 같아서 제일 먼저 적습니다. 바바 히데카즈는 상당히 강한 어조로 RPG는 게임이라고 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게임으로 플레이하지 않으면 수준 향상을 할 수가 없으므로 RPG의 진정한 재미를 느낄 수 없고 발전도 없으니까 게임이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논의하겠다고 했다는 것이 저의 이해입니다.

즉, ‘RPG는 게임으로밖에 할 수 없으므로 게임이다’라기보다는 ‘RPG는 게임으로 해야 질리지 않고 오래 하므로 게임으로 플레이하고 논해야 한다’는 것이 바바 히데카즈의 주장인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주장이 기본적으로 옳다고 봅니다. 규범적인 논의라기보다는 논리적 범주의 논의이기는 했지만 RPG가 코스티캔의 게임론에 나오는 게임의 요소를 모두 갖추었다는 요지로 글을 쓴 적도 있죠. 특히 규칙하고 관련해서 플레이 내용상 중심적인 부분을 규칙의, 즉 게임의 대상으로 만들어서 그에 따르는 효과를 활용하면 더욱 즐거운 플레이가 되니까요.

그러나 RPG가 게임이라는 주장은 옳긴 옳되 불완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RPG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두 게임으로 설명할 수 없으며, 이것은 바바가 주장하는 수준 향상을 지향하는 RPG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둘째, 이것이 바바의 맹점이었다고 생각하는데, 게임이 아니어도 RPG에서 방법론을 고려하면서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는 영역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묶어주는 하나의 키워드는 바로 서사, 서술, 혹은 극(劇)입니다.

RPG가 게임이라는 주장이 불완전한 첫 번째 이유는 RPG에는 게임적 요소 외에도 극적 요소가 있어서입니다. 이것은 바바가 혐오해 마지않는, 방법론이나 발전이 없는 규칙 무시성 덩실덩실 RPG뿐 아니라 계속 높은 수준을 지향하는 RPG 플레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RPG가 게임이라는 것만으로는 RPG를 논하기에 불완전하다고 봅니다.

바바가 RPG의 극적 요소를 논하지 않은 데에는 나름 배경이 있기는 합니다. 체계도, 방법론도, 규칙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없이 ‘재밌으면 그만이야’ 식의 시장 전략이 일본 RPG에 미친 악영향에 대해 바바가 얼마나 이를 가는지 보면 이해할 수 있죠. (재밌으면 그만이라는 말 자체는 맞지만, 어떻게 하면 재밌는데? 하는 의문에 대한 대답이 되는 방법론이 부재했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하지만, 그건 바바가 글을 썼던 특수한 배경일 뿐이지 RPG 에 게임적 요소 외에 극적 요소도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RPG의 게임성에 충실하다 보면 극적 서술은 저절로 나오니까 굳이 논할 필요가 없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확실히 극을 돕는 도구로써 규칙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고, 저도 규칙이 서사와 따로 놀지 않고 적극적으로 서사를 뒷받침하는 플레이야말로 가장 효율적이고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규칙의 도구성 참조.)

그러나 저처럼 규칙과 서사의 관계를 밀접하게 본다 해도 규칙과 게임성은 서사를 도울 뿐이지 서사 그 자체는 될 수 없습니다. 극적 감각이나 집단적 서술의 흐름에는 게임성과는 다른 방법론과 발전 방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포도원의 개들 (Dogs in the Vineyard)에서 능력치를 서술해서 판정에 추가로 주사위를 얻는 것은 게임적 판단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 순간에 어떤 능력치를 어떤 식으로 서술하면 재미있을지는 극적 판단의 영역입니다. 두 가지는 서로 보완하는 관계이기는 하지만 한쪽을 잘하는 것이 반드시 다른쪽도 잘한다는 뜻은 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서술에도 방법론과 발전이 있다는 점은 RPG가 게임이라는 주장이 불완전한 두 번째 이유와 바로 이어집니다.

RPG가 게임이라는 주장이 불완전한 두 번째 이유는 게임적 요소 외에 극적 요소에서도 수준 향상을 할 수 있어서 그렇습니다. RPG가 게임이라는 바바의 주장에는 규범적인 데가 있다는 말은 이미 했습니다. 게임이 아니면 수준 향상을 논할 수 없고, 수준 향상이 없으면 RPG계에 발전이 없으므로 게임 아닌 RPG는 논의가 무의미하다는 의미에서 말이죠.

그러나 게임이 아닌 극적 영역에도 분명 방법론을 세우고 수준 향상을 꾀할 수 있습니다. RPG와 영화나 소설의 기법을 접목한다든지, 즉흥극과 RPG를 연계한다든지 하는 다양한 시도, RPG 특유의 집단적 서술을 다루는 이론과 방법론 등을 볼 수 있습니다. 바바는 RPG가 게임이 아니라면 연기 지도를 받을 수도 없지 않느냐며 발전의 여지를 부인하지만, 실은 게임이 아닌 영역에서도 발전을 위한 방법론은 얼마든지 있으며 계속해 높은 수준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RPG에 게임이 아닌 영역은 실존할 뿐만 아니라, 인정한다 하더라도 RPG계에 해가 될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게임이 아니면 발전도 없다는 전제야말로 바바의 맹점이었다고 보고요.

2. RPG를 정말 즐기려면 발전을 추구해야 한다

바바가 쓰는 모든 글의 진짜 핵심이며, RPG는 게임이며 게임이어야 한다는 주장의 기반이기도 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 사이에 잘못된, 정확히는 불완전한 논리 단계가 들어가서 RPG는 게임이라는 결론에도 불완전한 데가 생겼다는 점은 위에서 논증한 바와 같습니다.

그러나 RPG를 질리지 않고 계속 즐기려면 계속해서 높은 수준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은 흠이 없다고 봅니다. 특히 주목하고 싶은 부분이라면 RPG에서 계속 높은 수준을 추구하지 않으면 결국 다른 놀이를 하게 된다는 주장입니다.

제 생각에 RPG의 고유한 재미는 극과 게임성, 사회성의 결합이라고 봅니다. 이중 어느 한두 가지에서 RPG보다 우월한 오락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수준 높은 극적 재미만 생각한다면 책이나 영화가 나을 수도 있고, 게임성만을 생각한다면 CRPG나 체스가 나을 수도 있겠죠. 함께 모여서 즐겁게 노는 것만을 생각한다면 그냥 술을 마시거나 수다를 떠는 게 낫습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를 결합하면서 높은 자유도를 추구할 때에만 RPG를 하는 진짜 의미가 나오면서 다른 활동에 대한 비교우위가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재미의 요소를 의미있게 결합하려고 하면서 발전의 필요성과 즐거움이 나오는 것이고요.

제가 RPG 블로그를 쓰기 시작한 것도 따지고 보면 강박적으로 글을 쓰니까 바바 히데카즈의 영향입니다. 발전을 추구하면서 RPG를 정말 재미있게 즐기려면 글로 생각을 정리하고 기록하는 작업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이제 400편을 넘어가는 글들은 어떻게 보면 모두 ‘어떻게 하면 더 재밌지?’라는 단 하나의 질문에 대해 제시하는 답입니다. 어느 하나도 절대적인 최종 결론은 없지만, 그 모색 자체가 즐거움이기도 하죠.

3. 규칙을 많이 접해라

또 하나 많이 영향을 받은 부분이라면 규칙을 여러 가지 접해보라는 충고였습니다. 당시에는 갓 시작했던 차라 D&D 클래식과 AD&D 정도밖에 몰랐는데, 그 얘기를 보고 호기심이 동해서 다양한 RPG를 읽고 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이제는 이상한 규칙만 합니 어떤 규칙이 어떤 용도에 적합한지, 끌어올 수 있는 시도나 발상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제 취향에 맞는 규칙이 어떤 것인지 자연스럽게 익혀갔고 플레이도 그만큼 풍부해졌다고 생각합니다.

4. 규칙은 중요하다

바바 히데카즈의 파워 플레이와 론 에드워즈의 System Does Matter (영문)에 특히 영향을 받아 제 나름 생각해본 것이 규칙의 도구성이니 규칙의 효과 같은 것입니다. 제가 이해한 대로 규칙의 중요성을 정리하자면 규칙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않지만 일정한 예측 가능성과 경향성을 형성하기는 하며, 이러한 효과가 원하는 플레이를 지원하는 것이야말로 좋은 규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이 제가 바바 히데카즈에게 배운 것들입니다. 이해한 바에는 변형도 있고 가미도 있지만, 결국 핵심은 계속 새로운 생각과 실험, 시도가 아닌가 합니다. RPG는 그만큼 자유스럽고 다양한 놀이이며, 그런 끝없는 새로움이 제게는 RPG의 진짜 재미이니까요.

규칙은 도구다

세션 게시판을 검색하다가 천승민님의 1년 전 글 룰의 본분을 우연히 보고 쓰는 답글입니다.  원문이 옛날 글이라서 승민님의 현재 의견을 얼마나 반영하는지는 조심스럽지만, 예전에 RPG에서 규칙의 영역이라는 글에서 한 토론과 연관성이 보이고 규칙의 영역을 더 직접적으로 다룰 수 있을 것 같더군요. 승민님의 블로그글 묘사 중심룰과 서사 중심룰에 나름 반론이라면 반론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쪽에 엮습니다. (황무지에 업데이트를 보고 싶어서 그런다는 소문은 사실무근이라고 부정합니다 (?))

규칙의 도구성

기본적으로 저는 규칙, 혹은 룰은 플레이를 돕는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승민님 글에 달린 덧글 중 신승백님이 말씀하시는 지향성의 문제죠. 철저하게 전술적이고 수치화된 워게임식 전투 중심이 원하는 플레이의 형태라면 D&D 3.5는 더없이 좋은 규칙, 즉 도구입니다. 반면 인물의 배경과 인간관계, 감정 등이 원하는 플레이의 중심이라면 승민님과 다른 분들이 말씀하신 이유로 규칙과 서사는 두 마리 토끼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후자와 같은 플레이를 D&D 3.5 규칙을 사용해서 할 수 없다는 얘기는 절대 아닙니다. 당연히 할 수 있고, 그런 훌륭한 서사적 플레이도 실제로 많이 나와있죠. 하지만, 규칙이 이끄는 방향으로 따라가려고 할 때 (피트와 클래스, 수치 등) 플레이의 중요 사항 (망국의 엘프 왕자)에서 주의가 분산된다면 그 분산을 극복하려고 소모하는 시간과 에너지는 효율 면에서는 좀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규칙의 여백

신승백님께서 말씀하신 AD&D에서 나타난 현상도 꽤 일반적입니다. 애매모호한 부분, 즉 규칙이 허술하거나 다루지 않는 부분에서 원하는 플레이를 하는 것 말이죠. 저도 WoD 계열 규칙에 대해 생각이 같은데, 사실상 WoD가 정말로 지향하는 플레이는 바로 이 애매모호한 부분에서 많이 이루어지는 것 같거든요.

제가 그나마 조금 아는 뱀파이어를 예로 들면, 뱀파이어는 정치적 플레이를 지향한다고 하지만 규칙에서 정치물을 지원하는 지향성은 별로 없는 느낌이었습니다. 일반 기능 판정과 동료, 연줄 등 몇 가지 장점은 있지만 정치적 구조라든지 인간관계 그 자체를 다루는 규칙은 없는 걸로 알거든요. 결국 정말로 정치적인 플레이는 규칙과 별로 상관없이 이루어집니다. 진행자가 재량에 따라 상황을 만들고, 참가자가 그 속에서 필요에 따라 기능 판정을 하기도 하고 제안을 하기도 하지만 규칙은 정치적 상황의 내용은 다루지 않죠.

규칙을 타는 플레이

이처럼 규칙이 비는 부분에서, 말하자면 ‘규칙을 피하며’ 원하는 플레이를 하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이긴 하지만, 다른 방법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D&D 3.5가 수치화된 전술적 전투를 재미있게 지원하듯, 극적이고 서사적인 캠페인이라든지 미묘한 연애 심리, 비정한 정치, 가슴 아픈 비극 등을 직접 규칙의 내용으로 다루는 규칙을 사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말하자면 규칙을 피하는 대신 규칙의 흐름을 타고 플레이하는 것이죠. 규칙과 플레이 스타일이 두 마리 토끼가 아닌 한 마리 토끼, 아니면 최소한 한 방향으로 나란히 달려가는 두 마리 토끼가 되는… 이 대목이 위의 ‘규칙의 영역’ 글에서 승민님과 토론했던 부분, 즉 어떤 부분이 규칙의 영역에 적합하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부분과도 닿는 것 같습니다.

규칙과 서사가 두 마리 토끼가 되는 것이 무슨 문제냐고 묻는다면 뭐, 재미가 있다면 딱히 문제는 없다는 것이 1차적인 대답입니다. 예전에 승한님이 쓰신 RPG의 전제에 대한 답글에서 성일님도 말씀하셨듯, RPG는 자신이 재미있는 것만한 게 없죠. 다만, 플레이의 진짜 지향점을 규칙의 여백에서 다루는 방식은 개별 취향을 벗어나 순수히 효용적인 분석을 할 때 좀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분은 위에 링크한 규칙의 영역 글 본문에서 다룬 내용과 직접 연관이 있습니다.

‘규칙의 영역’에서도 예를 들었지만 여기서도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위에서 얘기한 뱀파이어 예시를 확장해 보죠. 뱀파이어 규칙에 몽테뉴 궁정음모 규칙처럼 폐쇄된 사회 (예를 들어 한 도시의 혈족 사회) 내에서 복잡하게 얽힌 부탁과 협박, 비밀 관계를 다루는 규칙을 넣는다고 가정해 보지요. 여기서 궁정음모 규칙이 그 목적에 비추어 얼마나 완성도 높은 규칙인지는 일단 논외로 하겠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좀 있지만, 어쨌든 뱀파이어의 지향이라고 하는 정치를 직접 다루는 규칙이라는 점에 의미를 두고 논의를 진행합니다.

규칙의 영역

규칙의 영역을 다룬 이전 글에서는 어떤 내용이 규칙의 영역이 되었을 때 발생하는 효과를 크게 두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첫 번째는 그 영역 내에서 하는 행동에 일정한 경향성을 형성한다는 점, 두 번째는 참가자가 상당 부분 독립적으로 판단하고 형성력을 갖는 영역이 된다는 점. (첫 번째 효과는 원문에서는 ‘포상’이라는 말을 썼었고 승민님은 진행자의 일방적인 포상이라는 뜻으로 해석하신 것 같은데, 저는 진행자의 포상을 말한 것이 아니라 규칙 자체의 포상, 즉 규칙상 유리한 방향으로 참가자 행동이 형성되는 경향성이 생긴다는 얘기였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경향성이라는 말로 대체해서 사용하겠습니다.) 뱀파이어 규칙에 궁정음모 규칙을 사용하면 이 두 효과가 어떻게 나타날지, 차례대로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 행동의 경향성. 어떤 규칙이 있으면 참가자는 그 규칙 속에서 가능하면 유리한 방향으로 행동하는 것이 1차적 반응이고, 이것이 규칙이 형성하는 경향성입니다. 이 경향성은 물론 극복할 수도 있습니다. 규칙상으로 불리하지만 인물 설정에는 어울리는 선택을 하는 식으로요. 하지만, 그게 반드시 선택 관계여야 할까요? 규칙상 유리한 것이 곧 설정에 어울린다면, 그리고 플레이 스타일에 어울린다면 ‘이기려는’ 본능을 극복하면서 굳이 에너지를 소모할 필요 없이 이기려는 본능이 곧 캐릭터나 플레이 스타일을 돕도록 할 수 있으니까요.

뱀파이어에 궁정음모 규칙을 사용한다는 예시도 같은 맥락입니다. 궁정음모 규칙을 사용하면서 규칙상 유리하려면, 곧 이기려고 한다면 우선 남의 부탁을 많이 들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부탁 점수가 쌓여서 필요할 때 돌려받을 수 있으니까요. 이 부탁을 들어주면 부탁 점수가 얼마나 쌓일지, 이 부탁을 하면 자기 부탁 점수가 얼마나 깎일지 하는 의사판단이 플레이의 중심이 되고, 이것은 실제로 부탁과 의무 관계가 복잡하게 쌓이는 폐쇄적이고 정치적인 사회에서 내리는 의사판단과 방향을 같이합니다. 부탁을 하고 들어주는 것은 단순한 숫자놀음이 아니라 RP와 판정도 들어가므로 그런 의사판단의 과정에서 사건과 서술 또한 쌓여가고요. 이런 식으로 규칙이 원하는 플레이를 지원하는 것이 규칙을 피하는 대신 규칙의 흐름을 타는 플레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부탁을 들어주는 건 가장 정석적이고 안전한 방법일 뿐이고, 좀 더 빠르지만 위험한 방법으로는 남을 협박하는 것도 있습니다. 협박으로 생기는 유용성 점수는 스스로 부탁 점수를 쌓을 필요가 없다는 점, 즉 대가성이 없다는 점에서 부탁보다 훨씬 효용은 높지만 대신 인간관계는 한층 나빠지고, 이 협박을 우려먹을 때마다 상대가 적이 되는 날은 가까워져 옵니다. 그 아슬아슬한 줄다리 타기도 정치 플레이의 또 다른 재미이고, 동시에 중요한 규칙상 (혹은 게임적) 의사판단이기도 하죠.

음모 규칙을 사용하지 않는 일반 플레이에서도 이러한 경향성은 진행자, 때로는 참가자가 생각하는 상식만큼 나타나기는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규칙에 그게 들어갔을 때만큼 직접적인 의사판단의 대상이 되거나 참가자 행동의 경향성을 강하게 형성하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관점에 따라서는 그게 오히려 장점일지도요. ‘규칙의 영역’에서 승민님이 말씀하신 반복성이나 제약성 문제하고도 관련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영역을 다루는 규칙이 없이는 내가 저 인물을 협박하면 그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내가 부탁을 들어주면 그가 내 부탁도 들어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진행자의 재량에 따라 꽤 폭넓게 형성할 수 있는 영역으로 남습니다. 이것은 합의에 따른 플레이라 해도 각자의 영역은 대개 존중되니까 어느 정도는 마찬가지이지요. 이 점은 규칙의 두 번째 효과, 즉 참가자의 독자적 상황 형성권으로 바로 이어집니다.

둘째, 참가자의 독자적 판단과 형성권. 일단 규칙의 영역에 들어온 사안은 진행자의 재량에 강력한 제재를 가하면서 참가자가 독자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영역이 되므로 그만큼 참가자의 상황 형성권을 증진시킨다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이고 엄격한 규칙일수록 진행자가 그 규칙에 반해서 규칙에 기반을 둔 참가자 판단을 부인하려면 무거운 ‘입증 책임’을 지게 되니까요.

다시 뱀파이어의 예로 돌아가면, 혈족인 철수는 나중에 영희에게 무슨 부탁을 할 날을 대비해서 열심히 부탁을 들어준다고 하죠. 그러던 어느 날, 철수가 뒤에서 조종하는 기업에 유리하도록 영희가 조종하는 언론사에서 기사를 내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궁정 음모 규칙을 사용하지 않을 때 진행자가 생각하기에 이 부탁은 영희가 안 들어줄 것 같다면 진행자 재량으로 안 들어줄 수도 있고, 합의에 따른 플레이라 하더라도 참가자가 능동적으로 목소리를 내서 ‘내가 영희에게 이러이러한 부탁을 들어줬으니 영희도 이런 부탁 정도는 들어줄 것 같다’라고 해야 합니다.

반면 궁정음모 규칙 같은 것을 사용해서 영희에게 들어준 부탁 점수가 4점이 있고 철수가 하는 부탁은 2점이라면, 왜 영희가 부탁을 안 들어주는지는 진행자가 설명할 몫이 됩니다. 그리고 그 결정에 참가자가 항변할 수 있는 기반도 한결 강해지지요. 그만큼 뭔가가 규칙의 영역에 들어오면 참가자가 독자적으로 예측하고 판단해서 상황을 형성할 여지는 넓어집니다.

규칙의 본분?

결국 하고 싶은 얘기는 규칙과 서사는 논리필연적으로 선택관계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워게임에서 시작한 역사적인 이유가 작용해서 규칙의 영역은 전투와 다른 판정, 물리규칙 정도로 제한된다고 흔히 생각하기도 하지만, 다른 영역을 다룸으로써 그 영역에서 규칙의 효과 (경향성 형성, 서사에 대한 참가자 재량 확대)를 낼 수도 있으니까요. 이렇듯 규칙에 본분이 있다면 플레이를 편하게 하는 도구로서이며, 원하는 플레이스타일을 구현할 때 규칙에 저항하지도 않고, 피하지도 않고 오히려 도움을 받는다면 그 구현은 한결 편해진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