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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PG인 커플은 강했다

웹코믹 Something Positive에 최근 RPG 언급이 나와서 번역해보았습니다. 마이크와 타마라는 고등학교 때 둘이 좋아하는 SF 소설 배경으로 RPG 배경을 짜기도 했고 아들 이름은 만화책 주인공 이름과 스타트렉 배우 이름을 딴 오타쿠 커플이죠. 다음은 가이각스씨의 기일에 시작해 벌어진 작은 소동입니다.


Something Positive 2008년 3월 5일자

Something Positive 2008/3/5


Something Positive 2008년 3월 7일자

Something Positive 2008/3/7


타마라가 이식받은 피임 장치는 윗팔 피부 밑에 이식하면 계속해서 소량의 프로제스틴 호르몬을 분비해 배란을 억제하는 등 약 99% 확률로 피임 효과를 내는 작은 막대기로, 효과가 3년 가는 임플라논과 5년 가는 노플랜트 같은 제품이 있습니다. 타마라 말대로 어떻게 보면 꽤나 사이버펑크적인 기술이죠. 사이버펑크 2020 (Cyberpunk 2020)은 R. Talsorian Games에서 1988년에 사이버펑크 2013이라는 제목으로 1판이 나온 RPG로, 이후 나온 2판이 사이버펑크 2020입니다.

이 결투를 RPG로 한다면?

경고: 다음에 나오는 동영상은 리암 니슨이 주연한 1995년 영화 롭 로이 (Rob Roy)의 절정 장면입니다. 영화가 어떻게 끝나는지 알고 싶지 않은 분은 글을 펼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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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영화 롭 로이의 결정적인 결투 장면입니다. 로버트 로이 멕그레거의 친구 알랜 맥도널드를 살해하고 아내 메리 멕그레거를 겁탈한 아치볼드 커닝햄에게 멕그레거가 결투를 신청한 상황이죠. 본격적인 결투는 약 2분 50초 지점부터 볼 수 있고, 마지막 반전은 7분 지점 정도에서 볼 수 있습니다.

나오는 대사 중 중요한 것을 간단하게 번역하면…

2분 10초 지점

심판: 여러분은 명예의 문제로 이 자리에 섰소이다. 명예롭게 해결해야 하오. 등뒤에서 찌르기, 칼 던지기, 지정한 무기 외의 무기 사용은 금지하오. 상대가 항복한다면…
멕그레거: 항복은 없소.
커닝햄: 받지도 않을 것이며.
심판: 이것들이 내 말을 씹어!! …무기를 들고 내 신호에 따라 시작하시오.

7분 지점

커닝햄: (멕그레거의 목에 칼을 대고) 항복은 하지도 받지도 않는댔지.

이런 식으로 한쪽이 일방적으로 깨지다가 회심의 일격으로 상황을 뒤집는 싸움을 의도적이든,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든 RPG 규칙으로 표현한다면 어떤 식이 될까요? 제가 익숙한 것들로 예를 들어보자면…

포도원의 개들 (Dogs in the Vineyard): 판정에 걸린 것은 ‘커닝햄이 죽느냐, 멕그레거가 죽느냐.’ 참가자가 주인공 죽여먹을 각오 하고 되도록 작은 주사위만 쓰면서 부상이란 부상은 다 받고 엉망으로 깨지다가, 마지막에 남겨둔 큰 주사위로 받아치고 회심의 일격!

다만, 남은 주사위는 다 아니까 진행자랑 어느 정도는 짜고 치는 고스톱이어야겠죠. 진행자 역시 큰 주사위를 아낀다면 멕그레거가 나중에 갑자기 큰 주사위가 연이어 터지지 않는 한 연출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멕그레거 쪽에서 굴릴 수 있는 능력치에는 ‘커닝햄에 대한 증오 2d10’이라든지 ‘실전에서 단련한 클레이모어 실력 1d8’ 등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외에 인간관계도 굴릴 게 많겠죠. 커닝햄이 적이니까 ‘커닝햄 3d4’라든지, 여기서 죽으면 아내를 못 볼 테니까 ‘사랑하는 아내 3d8’ 같은 것도 굴릴 수 있을 테고요.

안방극장 대모험 (Primetime Adventures): 이쪽은 포도원의 개들보다 훨씬 우연의 역할이 크니까 주인공의 생명은 아마 걸기 어려울 테고, 그 대신 ‘멕그레거가 몬트로즈에게 검술로 이기느냐’ 같은 것을 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면 검술로는 진다고 해도 결정적인 순간에 저렇게 기사회생하는 서술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폴라리스 (Polaris): 롭 로이는 해피엔딩이라 살짝 안 어울리긴 하지만 서술 교섭으로 하기 괜찮은 판정이긴 하죠. 마음이 ‘그리고 멕그레거는 커닝햄을 죽이고야 말았다!’ 하고 서술한다면 후회가 ‘그러나 그러려면 커닝햄에게 일방적으로 져야 한다.’ 하면 마음이 ‘그러나 그러려면 아르가일 공작과 몬트로즈의 내기로 빚을 탕감받아야 한다.’ 그리고 후회는 ‘일은 그리 되었더라.’ 하고 끝내는 식.

또 어떤 규칙상 표현이 될까요? 멕그레거의 진을 완전히 빼놓고도 숨소리조차 흐트러지지 않은 커닝햄의 절제된 검술이라든지 두 사람의 힘과 체격 차이 등 이것저것 재밌는 요소가 많이 보이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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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마지막 빛 – 요정

캐나다 작가 가이 가브리엘 케이 (Guy Gavriel Kay) 작품 ‘태양의 마지막 빛 (The Last Light of the Sun)’에 요정이 나오길래 해당 대목을 옮겨봅니다. 이번에 하는 폴라리스 플레이 ‘별이 지다’에 도움이 될까 해서요. 배경은 우리 세계의 중세의 웨일즈 비슷한 땅입니다. 이야기 속의 알룬은 바이킹을 모티프로 한 에를링 족 약탈에서 방금 형을 잃고 그 잔당을 추적하는 중입니다.

숲에서 빠져나온 알룬은 공터로 나왔다. 그가 추격하는 기수가 숲속의 못을 돌아 남쪽으로 가는 모습이 보였다. 말없는 고함과 함께 그는 에를링족이 타고 왔던 말을 얕은 못으로 몰았다. 못을 바로 가로질러 상대를 가로막으러.

그 순간 말이 갑자기 멈추자 알룬은 낙마를 간신히 면했다.

말은 겁에 질려 히힝거리며 앞발을 들어 공중에 휘저었다. 그리고는 도로 앞발을 내리고는 제자리에 굳었다. 마치 뿌리박혀 다시는 움직이지 않을 것처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건에 대한 반응은 사람마다 다르게 마련이다. 경험에서 완전히 벗어난 신비는 그 반응을 더욱 과장한다. 어떤 사람은 겁에 질려 모든 것을 부인하고, 어떤 사람은 평생 품어온 꿈이 현실이 되는 기쁨에 몸을 떨 것이다. 또 어떤 이는 자신이 취했거나 홀렸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세상의 본질에 대한 깊은 신념을 삶의 기반으로 삼은 사람이라면 특히 이러한 순간에 취약하다. 예외도 있지만.

그날 밤 오윈의 둘째 아들이 그랬듯이 이미 삶이 조각조각 부서진 채 상처처럼 노출되고 약한 상태인 사람이라면 세상에 대한 그의 이해가 틀렸다는 확인을 오히려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은 한결같지 않으며, 삶에 대한 반응도 한결같지 않으니까. 이 사실을 똑똑히 보여주는 순간이 있다.

말이 뒷발로 섰을 때 알룬은 발이 등자에서 빠져나왔다. 그는 말갈기를 붙잡으며 떨어지지 않으려고 기를 썼고, 말의 앞발이 첨벙거리며 연못을 다시 쳤을 때야 간신히 자세를 안정시켰다. 칼이 얕은 물에 빠지자 그는 욕설을 내뱉으며 말을 몰려고 했지만, 말은 움직이지 않았다. 음악이 들려왔다. 알룬은 고개를 돌렸다.

있을 수 없는 빛이 다가오고 있었다. 달오름처럼 창백한, 그러나 오늘은 달이 없는 밤. 다가오면서 음악소리는 커졌고, 연못의 수면 위에 걷고 말을 몰며 지나가는 그 밝은 행렬이 알룬 아브 오윈 앞을 지나갔다. 빛은 그들 주변에, 그들 안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 밤의, 세상의 모든 것이 그 순간 변했다. 그 은빛을 내는 존재는 요정이었으며 알룬의 눈에는 그들이 ‘보였’기에.

그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요정이 여전히 보였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그의 신앙에 따르면 자드(주:이 세계에서 기독교의 신에 해당하는 존재)께 저주받은 이 악마들에게 당장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절박했다. 동시에 춤추며 지나가는 행렬 한가운데 가마에 앉은 키 크고 날씬한 여인, 하얀 옷과 순백의 피부, 밝아오는 은빛 광휘 속에 쉴새없이 머리색이 변하는 그녀에게 말에서 내려 무릎을 꿇고 싶은 충동이 끓어올랐다. 두 감정 사이에 그는 마치 그물에 걸린 듯 가슴이 답답해왔다. 음악은 점점 커지며 그의 심장박동처럼 높아만 갔다. 숨을 쉬라고 자신에게 되뇌어야 했다.

악령이라면 철로 물러나게 할 수 있으리라. 옛이야기에 따르면 그랬다. 그러나 검은 이미 떨어떠린 후였다. 태양의 표식(주:태양신인 자드의 숭배자들이 그리는 성호)을 그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손은 고삐를 잡은 채, 말은 못의 얕은 기슭에 움직이지 않고 서서, 둘은 숨쉬는 석상처럼 행렬을 지켜보았다. 달 없는 숲 깊은 곳에서 혼백의 빛에 힘입어 알룬은 처음으로 그가 탄 에를링 말의 안장 천에 이교도의 망치 상징이 새겨진 것을 보았다.

그리고는 여왕을 다시 보며–잔잔한 수면을 건너는 저 빛나는 존재, 희망이나 추억만큼 아름다운 그녀가 여왕이 아니면 누구겠는가?–알룬은 누군가 그녀와 나란히 말을 모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갈기에 방울과 리본을 엮은 채 걸음걸이 경쾌한 작은 암말에 탄 것이 누구인지 알아보자 알룬은 가슴을 망치에 얻어맞은 기분이 되었다.

그는 입을 벌리고–거기까진 할 수 있었다–소리를 지르려 했다. 손이든 발이든 움직이려고, 말에서 내려 달려가려고. 그러나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그는 굳은 말 위에 굳어 앉아 형이 눈앞을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완전히 변했으되 전혀 변하지 않은, 마당에 죽어 쓰러져 있는데 여기서 밤의 연못 위로 말을 몰며, 알룬을 보거나 듣지 못하는 형은 한 손을 뻗어 요정 여왕의 새하얗고 섬세한 손을 맞잡고 있었다.

그들은 별빛 아래 못이 있는 공터로 나와 일제히 말없이 멈추었다. 순간 말들조차 침묵했다.

사제 케이니온 옆에 있는 사내가 태양의 표식을 그렸다. 사제도 뒤늦게 마찬가지로 했다. 숲 속의 연못, 우물, 떡갈나무 숲, 흙둔덕… 모두 반세계의 장소. 킨게일이 자드를 섬기기 전에, 신이 그들의 골짜기와 언덕에 찾아오기 전에 이교도의 성소였던 곳들.

숲 속의 못은 사제의 적이었다. 바티아라와 페리에르(주:프랑스에 해당)에서 건너온 첫 사제들은  바로 이런 물가에서 엄격한 기도문을 외우며경전을 읽어 거짓 영과 옛 마법을 쫓아냈다. 적어도 그러고자 노력은 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돌로 지은 예배당에서 신께 무릎을 꿇고서는 바로 쥐 뼈로 점을 치는 마녀에게 찾아가 미래를 묻거나 우물에 봉납물을 바치고는 했으니까. 아니면 별빛 아래 연못에. 케이니온은 입을 열었다.

“어서 갑시다. 물이고 숲일 뿐입니다.”

“아닙니다, 사제님.”

케이니온 옆의 사내, 태양의 표식을 그렸던 이는 정중하면서도 단호했다.

“왕자는 여기 있습니다. 보세요.”

그제야 케이니온은 물가에 선 말잔등에 가만히 앉은 소년을 보았다.

“자드여! 물로 들어갔어.”

누군가 말했다. 다른 사람이 대답했다.

“달이 없어. 달이 없는 밤이라고–홀린 거야.”

“음악이 들리나? 들어봐!”

시안이 갑자기 말했다.

“들리지 않소이다.”

루웨르트의 케이니온은 날카롭게 말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시안이 다시 말했다.

“보세요. 덫에 걸린 겁니다. 움직이지도 못하잖아요!”

말들은 이제 기수들의 기분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당연히 움직일 수 있지요.”

사제는 단숨에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 숲과 밤, 빠르고 단호한 움직임에는 익숙했다.

“사제님! 사제님, 그만-”

케이니온은 뒤에서 부르는 소리를 무시했다. 구하고 지켜야 할 영들이 있었다. 그의 과업. 어디선가 사냥하는 부엉이가 울었다. 밤의 숲에 어울리는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소음. 사람은 미지를 두려워하기에 어둠을 두려워핬다. 자드는 빛의 존재, 악마와 혼백에게서 그의 자녀를 지키는 피난처일지니.

그는 빠르게 기도하고 바로 얕은 물에 첨벙거리며 들어가며 젊은 왕자를 불렀다. 소년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옆에 다가서자 알룬 아브 오윈은 말을 하거나 고함을 치려는 듯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다. 케이니온은 충격에 숨을 삼켰다.

그리고 두렵게도 정말로 음악이 들려왔다. 저 앞에, 오른편에서 희미하게 뿔고동과 피리, 현악기와 방울 소리가 물결 없는 연못 위로… 케이니온은 자드의 신성한 이름을 불렀다. 태양의 표식을 그린 그는 에를링 말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말은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이들에게 그가 말과 씨름하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들의 영혼이, 신앙이 위험했다. 그는 손을 뻗어 아무 저항이 없는 오윈의 아들을 안장에서 끌어내렸다. 젊은이를 한쪽 어깨에 메고 그는 첨벙거리고 비틀거리며, 거의 넘어질 뻔하며 못에서 나와 알룬을 물가의 풀밭에 눕혔다. 그는 젊은이 곁에 무릎을 꿇고 목에 건 원반에 손을 대고 기도했다.

잠시 후 알룬 아브 오윈은 눈을 깜박이더니 고개를 저었다. 숨을 들이쉬고 눈을 감자 케이니온은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 눈빛은 가슴이 찢어질 듯했기에.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낮고 억양 없이 젊은이는 말했다.

“보았습니다. 형을요. 요정들과 있었어요.”

“그럴 리가 없네.”

케이니온의 목소리는 확고했다.

“자네는 마음이 슬픈 데다 외지에 나와 있고, 적을 죽이지 않았는가. 잘못 본 게야. 있을 수 있는 일이네, 오윈의 아들이여. 전에도 본 일이 있어. 잃어버린 이를 그리는 마음에 어디서나 그들을 보게 되지. 해가 뜨면 신의 자비로 착각을 깨달을 걸세.”

“형을 보았습니다.”

강조조차 필요없는 그 조용한 확신은 열의나 고집보다도 사제를 불안하게 했다. 알룬은 눈을 뜨고 케이니온을 올려다보았다.

“그 말은 신성 모독이네. 나는 사제로서-”

“보았어요.”

케이니온은 어깨 너머로 일행을 돌아보았다. 멀어서 듣지는 못했으리라. 연못은 유리처럼 고요했고, 숲속 공터에는 바람 한 점 없었다. 음악 비슷한 것도 들리지 않았다. 자신도 착각했을 것이다. 이런 장소의 기묘함에 그도 완전히 면역일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에게도 이곳과 비슷한 다른 곳에 대한 기억이 있었다. 언제나 떠오르면 밀쳐버리고 하는… 그도 오류를 범하는 사람, 선을 거부하는 시대에 선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필부일 뿐.

다시 부엉이 울음이 이제는 물 건너에서 들려왔다. 케이니온은 나무 위 창공에 가득한 별을 올려보았다.

에를링 말은 고개를 젓더니 히힝거리며 차분하게 못에서 걸어나왔다. 말은 고개를 숙이고 근처에서 풀을 뜯었다. 그 일상적인 광경을 케이니온은 잠시 지켜보았다. 그는 다시 알룬에게 주의를 돌리며 심호흡을 했다.

“같이 가세나, 알룬. 예배당에서 함께 기도하지 않겠나?”

“물론입니다.”

알룬 아브 오윈은 지나칠 정도로 차분했다. 그는 도움 없이 일어나 앉더니 일어섰다. 그리고는 바로 연못으로 걸어들어갔다.

케이니온은 만류하려고 한 손을 들다가 소년이 허리를 굽혀 물에 빠졌던 칼을 집어드는 것을 보고 침묵했다. 알룬은 물에서 걸어나왔다.

“요정은 이제 갔습니다.”

마당 저편, 나무 무성한 비탈에 빛이 있었다.

횃불이 아니었다. 창백하고, 움직이지 않고, 깜박이지도 않는 빛.

그는 마치 추적자를 피해 숨는 사람처럼 얕게 숨을 쉬었다. 눈을 꼭 감았다. 다시 떴을 때에도 빛은 여전했다. 마당에는 이제 아무도 없었다. 해가 뜰 때가지 아직 한참 남은 봄의 밤중, 바람은 부드럽고 별빛은 밝았다. 고대로부터의 영광과 고통을 그리는 별들의 모양, 자드 신앙이 북쪽으로 오기 전부터 있었던 별자리. 인간과 짐승, 신과 반신. 밤은 무겁고 무한했다. 마치 빠져들 듯이.

비탈에 빛이 있었다. 알룬은 검대를 풀고 검을 떨어뜨렸다. 그는 마당 문을 빠져나가 언덕을 올랐다.

그가 철을 떨어뜨리는 모습이 보인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고 있다. 이제 그녀를 볼 수 있다는 뜻. 요정이 지날 때 못에 들어온 인간은 때로 그 이후에도 요정을 볼 수 있게 된다.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보이지 않은 채 지켜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 그녀는 억지로 제자리에 서서 기다린다.

그녀는 여왕보다 키가 작았다. 알룬보다 머리 반쯤. 그는 그녀가 선 곳 바로 밑에서 멈추었다. 덤불 곁에, 탁 트인 비탈에 함께 서서. 그녀는 어린 나무 뒤에 반쯤 숨었다가 그가 멈추자 나왔지만, 여전히 나무에 손을 대고 있었다. 미동도 없이, 언제든 도망칠 준비를 하고. 알룬이 안다고 생각했던 이 세상에 선 요정.

가녀린 몸에, 손가락은 아주 길고 미간은 넓었다. 얼굴은 작았지만 아이 얼굴은 아니었다. 녹색 옷은 양팔과 무릎을 드러냈다. 허리에는 꽃을 띠처럼 두르고 있었다. 색깔이 계속해서 어지럽게 변하는 머리에도 꽃을 엮고 있었다. 별빛밖에 없었지만, 요정 자신이 내는 빛으로 볼 수 있었다. 마당에서 몇 발짝 걸어나온 것만으로도 얼마나 멀리 왔는지 새삼 알 수 있었다. 이야기 속의 반세계, 그가 지금 있는 곳. 이야기 속에서 사람들은 바로 이런 공간에서 길을 잃었다. 영영 돌아오지 않거나 백년 후에야 돌아와서 알던 이는 모두 죽은 후. 얇은 옷을 통해 작은 가슴이 보였다. 요정도 추위를 느낄까?

목이 메어서 아팠다.

“어떻게… 어째서 내게 당신이 보이는 거죠?”

그녀가 말을 할 수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가 알아들을 수 있을지도. 요정의 머리는 창백해지며 거의 하얘지더니 다시 거의 금빛으로 돌아왔다.

“당신 연못에 있었죠. 내가… 당신을 구했어요.”

단순이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그 목소리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가 평생 하프로 연주한 것은 음악이 아니었음을. 노래를 제대로 부른 적도 없다는 것을. 조심하지 않으면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어떻게… 어째서?”

그녀의 목소리에 비하면 자기 목소리는 거칠게 들렸다. 별빛 밝은 공기를 멍들게 하는 소리.

“말이 물가에서 멈추게 했죠. 여왕에게 더 다가갔더라면 살해당했을 거에요.”

질문 하나는 대답을 받았지만 하나는 대답이 없었다. 말을 잇기가 어려웠다.

“거기 형이 있었어요.”

“당신 형은 죽었어요. 그의 영혼은 여왕의 행렬에 있죠.”

“어째서?”

요정의 머리는 이제 붉어지며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녀의 빛으로 볼 수 있었다.

“영혼을 내가 여왕께 데려갔어요. 오늘 전투에서 처음 죽은 이.”

다이 형은 나갔을 때 무기가 없었다. 처음 죽은 이.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그것이 그녀의 설명이었다. 알룬은 축축하고 차가운 풀에 무릎을 꿇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채 속삭였다.

“당신을 미워해야 하는데.”

“난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요.”

요정의 목소리는 음악이었다. 그는 말을 곰씹으며 그녀를, 브린의 딸, 형의 시신이 누운 방에 있는 여자를 떠올렸다. 평생 다시 하프를 연주할 수 있을까.

“여왕은… 여왕은 영혼을 어떻게…?”

요정은 처음으로 작고 하얀 이를 보이며 미소지었다.

“그는 여왕께 사랑받을 거에요. 당신네 세상에서 온 이들, 인간이었던 그들에게 여왕은 매혹당하죠.”

“영원히?”

머리는 보랏빛이 되었다. 작고 가냘픈 몸이 연녹색 옷 아래 너무나 희었다.

“영원한 게 뭐가 있나요?”

가슴이 텅 빈 느낌. 형이 있던 자리, 채워지지 않을 공허.

“그 다음에는? 그는… 어떻게 되죠?”

사제처럼, 지혜로운 아이처럼 엄숙하게, 그보다 훨씬 나이많은 존재의 엄숙함으로 그녀는 말했다.

“여왕이 싫증을 내면 그들은 행렬을 떠나가요.”

“어디로 가죠?”

목소리의 달콤한 음악…

“나는 지혜롭지 않아요. 나는 모른답니다. 물어본 적이 없어요.”

“유령이 될 거야.”

별빛 아래 무릎을 꿇은 알룬은 그런 확신이 들었다.

“혼자 떠도는 혼백, 길잃은 영혼.”

“나는 몰라요. 당신들의 태양신이 데려가지 않을까요?”

그는 풀에 손을 얹었다. 시원하고 일상적인 그 감촉. 배운 바에 따르면 자드는 지금 세상 아래, 그분의 자녀를 위해 괴물과 싸우고 있을 터. 그는 그녀 목소리의 음악 없이 그녀의 말을 반복했다.

“모릅니다. 오늘밤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어요. 왜 연못에서 날… 구했죠?”

그녀가 대답하지 않았던 그 질문에 요정은 물처럼 물결치는 동작으로 두 손을 벌렸다.

“왜 당신이 죽어야 해요?”

“어차피 죽을 목숨이잖아요.”

“그래서 어둠을 향해 달릴 건가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녀는 한 발짝 다가왔다. 무릎 꿇은 채 움직이지 않는 그에게 손을 뻗으며. 손이 얼굴에 닿기 직전에 그는 눈을 감았다. 가히 압도적인 갈망의 존재. 자신을, 이 세상을 떠나고 싶은 욕구.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밤공기 속에, 그녀 주변에 꽃향기가 가득했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알룬은 입을 열었다.

“가르침… 가르침을 받았어요. 빛이 있을 거라고.”

“그렇다면 당신 형에게도 그렇겠죠. 그게 진실이라면.”

손가락이 움직이더니 그의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손이 떨리자 그제야 그는 그녀도 그만큼 두렵고 흥분한 것을 깨달았다. 나란히 움직이되 닿지 않는 두 세계.

아니, 가끔은 닿기도 했다. 입을 열었지만, 미처 말하기 전에 놀라울 정도로 빠른 움직임, 부재를 느꼈다. 하려고 했던 말은 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조차 몰랐다. 고개를 들자 그녀는 이미 열 발짝 떨어져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어린 나무에 기대어 언제든 도망치려고 몸을 반쯤 돌리고 있었다. 머리는 까마귀처럼 새까맸다.

돌아보자 누군가 비탈을 올라오고 있었다. 놀라지는 않았다. 놀람이라는 감정이 피처럼 흘러나간 기분이었다.

그날밤 알룬 아브 오윈은 아직 젊었다. 올라오는, 게다가 알룬이 아닌 요정을 바라보며 올라오는 사람을 알아본 순간 그는 평생 다시는 놀랄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브린 아프 휴울은 언덕을 올라와 알룬 옆에 웅크려 앉았다. 덩치 큰 사내는 풀을 몇 포기 뜯으며, 멀지 않은 곳에 선 빛나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어떻게 그녀가 보이는 겁니까?”

알룬은 낮게 물었다. 브린은 커다란 손바닥 사이에 풀잎을 문질렀다.

“반평생 전에 그 못에 들어간 일이 있었네. 여자에게 거절당하고 나서 혼자 숲을 걷고 있었지. 바보같은 짓이었지만, 여자에게 빠진다는 게 그렇지.”

“제가 그랬는지는 어떻게…?”

“시안의 부하가 보고하더군. 자네가 에를링을 둘 죽이고 케이니온이 꺼내올 때까지 연못에서 홀려 있었다고.”

“그가… 시안이 알고…?”

“아니네. 부하가 얘기한 건 거기까지야. 그 의미는 이해하지 못했지.”

“당신은 이해하신 겁니까?”

“그랬지.”

“그 오랜 세월… 그들이 보였던 겁니까?”

“볼 수는 있었지. 자주 보지는 못했어. 그들은 우리를 피하니까. 이 요정은… 좀 다르더군. 종종 여기에 오지. 아마 계속 같은 요정인 것 같아. 여기 브린펠에 있을 때면 가끔 보이지.”

“그랬는데 안 올라왔습니까?”

브린은 처음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대답은 간결했다.

“올라오기 두려웠네.”

“우리를 해칠 것 같지는 않아요.”

요정은 침묵하며 가녀린 나무 곁에 서서, 여전히 반쯤 도망칠 것 같은 모습으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이곳으로 이끄는 것만으로도 해칠 수 있네. 돌아오기가 어려워지거든. 자네도 옛이야기는 많이 들었겠지. 나는… 세상에서 할 일이 많네. 이제는 자네도 마찬가지지.”

케이니온이 아래 마당에서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아직 우리를 떠나는 것은 허용할 수 없네.’

알룬은 브린을 보며 그 말에 담긴 무게를 생각했다. 그 평생의 부담을.

“여기 올라오려고 칼을 푸셨죠.”

브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네가 나보다 용감하게 둘 수야 있나.”

그는 밤하늘에 커다란 윤곽을 그리며 일어섰다.

“밤새 쭈그려 앉기에는 너무 늙고 뚱뚱해졌구만.”

나무 곁에 선 빛나는 모습은 다시 대여섯 발짝 물러났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철이 아직도… 아파요.”

브린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 목소리를 들은 것은 처음이리라. 그 오랜 세월 이 목소리의 음악을 모르고… 반평생 전부터. 알고서도 말하지도 않고, 접근하지도 않은 그 의지력에 알룬은 감탄했다.

“칼은 풀었는…”

브린은 말을 멈추더니 조용히 욕설을 내뱉고 신발 발목에 꽂은 나이프를 꺼냈다.

“사과하오. 그럴 의도는 아니었소, 정령이여.”

그는 몸을 돌리더니 강하게 앞으로 내딛으며 팔을 휘저어 나이프를 내던졌다. 칼은 밤하늘을 가로질러 크게 호를 그리며 언덕에서 벗어나 울타리를 넘더니 빈 마당에 떨어졌다.

저렇게도 멀리… 자신은 할 수 없으리라고 알룬은 생각했다. 그는 옆에 선 브린을 쳐다보았다. 에를링 약탈자들이 해마다 봄이나 여름에 나타나던 시절에 볼간을 죽인, 그나 다이가 태어나기 전, 어둡고 냉엄하던 시절. 그러나 바로 오늘 소규모의 실패한 약탈 중에 죽었어도 옛날에 볼간의 무리에게 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죽은 것 아닌가. 그리고 영혼은…?

브린은 그에게 몸을 돌렸다.

“내려가세. 가야 해.”

알룬은 시원한 풀에 무릎꿇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영혼은?

“그녀는 존재해선 안 되는 거겠죠?”

“누가 그러나? 요정 이야기를 남긴 우리 조상들이 바보였나? 그들의 매혹과 위험 이야기를… 그녀의 종족은 우리보다 오래 이 땅에 있었지. 사제들이 얘기는, 빛에 대한 우리 소망을 위협하는 존재라는 거야.”

“그게 가르침입니까?”

알룬의 목소리는 쓰라렸다. 이곳, 별이 가득한 밤은 그녀의 빛 외에는 어두웠다.

그는 거의 의지에 반해 고개를 돌려, 여전히 나무에 기댄 그녀를 바라보았다. 머리색은 다시 밝았다. 나이프가 사라진 이후로. 그러나 다시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녀 손가락의 감촉을, 꽃향기를 생각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다시 다이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고 침묵했다.

“가르침이 진실임을 알잖나.”

요정은 나무 뒤에 서서 은은히 빛나며 머리칼이 동틀 적 동녘 하늘빛으로 물들었다. 브린 아프 휴울은 그녀가 아닌 알룬을 쳐다보았다.

“느낄 수 있잖나? 함께 내려가서 기도하세. 자네 형과 내 부하들을 위해, 그리고 우리를 위해.”

“그냥… 등 돌릴 수 있어요?”

움직이지도, 말도 하지 않고 그를 쳐다보는 요정을 알룬은 마주보았다.

“그래야 해. 평생 그래왔고. 자네도 이제 그래야 하네. 자네 영혼과 앞으로 할 일을 위해.”

그 목소리에서 뭔가 엿들은 알룬은 다시 브린을 올려보았다. 어둠 속에 별빛을 가린 그는 흔들림 없이 마주보았다. 30년 동안 칼을 들고 싸워온 전사가. 앞으로 할 일… 옛 이야기가 옳다면, 두 달 중 하나라도 오늘 떴더라면 요정을 볼 일은 없었으리라.

그러나 다이는 여전히 죽었겠지. 다른 모든 죽은 이도. 브린의 딸이 그렇게 도전했었고, 그는… 답할 말이 없어서 도망쳤었다. 가슴 속 공허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알룬은 다시 요정에게 몸을 돌리며 눈을 마주쳤다. 어쩌면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일어섰다.

“그를 지켜봐줘요.”

그렇게만 말했다. 그녀는 이해하겠지.

그녀는 몇 발짝 다가와 다시 어린 나무에 한 손을 얹은 채 마치 끌어안듯, 하나가 되듯 섰다. 브린은 등을 돌리고 단호한 결의로 비탈을 내려갔고, 알룬도 뒤돌아보지 않고 그를 따랐다. 그녀가 비탈에서, 다른 세계에서 그를 지켜보는 것을 알면서.

Something Positive – 하드웨어 사망사건 4~7부 (完)

4, 5, 6, 7부입니다. 특히 개인적으로 마지막 7부가 가장 와닿더군요. (..)

Something Positive 2005-05-25

Something Positive 2005년 5월 25일자

Something Positive 2005-05-26

Something Positive 2005년 5월 26일자

Something Positive 2005-05-27

Something Positive 2005년 5월 27일자

Something Positive 2005-05-28

Something Positive 2005년 5월 28일자

바로 그거다 피쥐양! 감정은 다치게 해봤자 자랑할 수도 없다고! (…)

Something Positive – 하드웨어 사망사건 1부

옛날 Something Positive 중에서 RPG 관련이 있어서 번역해봅니다. 이거나 저번에 번역한 것 외에도 RPG 얘기가 많이 나오는 만화이긴 하지만, 특히 2005년 5월에 한 시리즈는 문제 참가자 얘기가 재밌더라고요. 원본 만화는 여기에.

Somethng Positive 2005-05-22

Something Positive 2005년 5월 22일자

무릇 마스터의 진정한 친구란 캠페인 돌리기 피곤한 날에 단편으로 때워주는 존재..(크흑)

꿈 속의 RPG (?)

며칠 전에는 RPG 책을 읽는 꿈을 꿨습니다. 그것도 실존하는 책이 아니라 본 적도 없는 책을 말이죠. 깨어나서 생각해 보니 특이했던 건 책이 굉장히 고급이었다는 점입니다. 무슨 박물관 책처럼 커다랗고 무거운 양장본이었고, 표지는 검은색에 은회색으로 신비한 느낌의 문양이 크게 그려진 디자인이었다고 기억합니다. 얘기 들은 바로는 노빌리스가 그런 제본이 아닌가 하지만, 어쨌든 현실에서는 본 적이 없는 형태의 RPG 책이었습니다.

속도 굉장히 호화로워서, 종이도 두껍고 질이 좋더라고요. 그렇다고 막 번쩍거리는 종이는 아니고, 왜 글레이즈 페이퍼라고 하던가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페이지는 전부 흑백으로 꾸며졌고, 레이아웃도 엄청 고급스러운 느낌.

삽화는 두 개밖에 기억이 안 나지만 둘 다 인상적이었습니다. 하나는 오른편 페이지 밑부분에 가로 7.5cm, 세로 7.5cm 정도 크기의 작은 정사각형 속에 추상 문양이 있었고, 그 밑에는 검은 배경에 금속성이 나는 흰색 혹은 엷은 은회색으로 알파벳이 아닌 뭔가 기하학적 느낌의 가상 문자가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가문 설명 들어가는 장의 첫머리, 삽화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빈 왼편 페이지에 역시 작은 정사각형으로, 30대쯤 돼 보이는 남자의 그늘이 드리운 얼굴이었습니다. 그늘에 가려서 눈은 안 보였지만 입매나 턱선에서 지적이고 강한 얼굴이라는 인상이 들었습니다. 양복 입은 모습과 로브 입은 모습이 똑같이 어울리고 위엄이 있을 것 같은 인상이었달까요. 밑에는 이름과 함께 지금 설명 들어가는 가문의 인물이라는 짤막한 설명이 있었습니다. 배경 부분을 읽으면서 알렌이라는 그 이름을 자꾸 본 걸로 봐서 아마 배경상 주요 인물 중 하나? 성은 M으로 시작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네요.

내용은 어두운 풍의 현대 판타지로, 현대의 마법사 가문들과 그들의 마법, 그리고 권력다툼을 다루는 내용의 RPG였던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WoD처럼 파벌 다툼과 현실 비판적 내용, 펜드래건처럼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대규모 서사, 그리고 아르스 마기카처럼 마법사들 간의 힘과 경쟁이라는 요소가 들어간? 규모도 있고 드라마틱해서, 읽으면서 어둡고 서사적인 분위기에 두근두근했었죠.

배경과 역사 설명이 끝나고 가문 설명 들어가는 부분은 완전히 검은 페이지에 표지에 있는 것과 비슷하게 신비한 느낌의 은회색 문양이 있었고 그 페이지를 넘기니까 위에 나온 알렌 그림과 첫 가문 설명이 나왔습니다. 가문 설명을 읽기 시작할 때쯤 잠이 깼습니다.

깨고 나니 내용을 거의 다 잊은 점이 아쉽더라고요. 현실적으로 RPG 회사가 그렇게 정성이 들어간 비싼 책을 만들어도 수익이 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뭐 하여튼 현실에서는 본 적도 없는 RPG 책을 꿈속에서 보다니, 저도 참 못 말리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로키, 가족 앞에서 커밍아웃?

며칠 전에는 가족과 같이 모이는 자리에서 졸지에 RPG인으로 커밍아웃을 당해버렸습니다. 아빠는 전부터 제가 RPG 하는 거 아셨고, 전에는 좀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요즘에는 일주일에 한 번 하는 거 못 하면 안 된다고 오히려 챙겨주시더라고요. 지난 토요일에도 새로 이사한 방에 아직 인터넷이 없으니까 저는 쉬겠다고 공고 내면 된다고 하는데, 아빠는 주말 동안에 개통할 방법이 없나 알아보라고 막 그러시더라고요. 결국은 방법을 못 찾아서 플레이를 하루 쉬었지만, 하여튼 그렇게 챙겨주시다니 마음은 뿌듯했죠..^-^

엄마랑 동생은 저 RPG 하는 거 잘 몰랐었는데, 다 모였을 때 인터넷 얘기하느라 말이 나와서 결국 알려져 버렸습..(..) 엄마는 별 신기한 게 다 있다고 웃으시고, 동생은 군대에서 애들 하는 거 봤다고 그러더라고요. 말만으로 하는 게임이라는 제 설명에 아빠는 무슨 게임이 그러냐고 하시는 등 재밌는 대화였습니다. 확실히 설명하기 좀 애매한 놀이이긴 하죠, RPG가.

게임 마스터가 뭔지 잘 모르시면서도 어쨌든 딸내미가 뭔가 마스터라니 부모님은 막연히 자랑스러우신 듯도..(..) 주로 뭔가 깜박 잊거나 하면 ‘무슨 게임 마스터가 그래?’ 하고 놀리는 용도인 듯은 합니다. (흑흑)

가족뿐 아니라 어제는 인턴 하는 곳에 첫 출근을 했는데,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와서 아직 컴퓨터도 없더라고요. 직원이 컴퓨터를 설치하는 동안 저는 할 일이 없으니까 가방에 가져온 안방극장 대모험 (Primetime Adventures) 책을 읽는데, 그러는 동안 다른 인턴들이 도착했더라고요. 뭔가 엄청 심각해 보여서 이미 일을 받은 줄 알았다는 얘기에 함께 웃으며 책을 슬쩍 가방에 넣었죠. 작고 낡은 페이퍼백이라 아마 소설책 정도로 알았던 것 같습니다. 좀 더 눈에 띄는 책이었더라면 졸지에 직장에서도 커밍아웃했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RPG를 한다는 것을 밝힐 것인가 말 것인가는 뭐 결국 개별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주로 설명하기 귀찮아서(..) 내버려 둡니다만… 특히 일하고 취미는 별개니까 직장에서 얘기할 필요는 못 느끼고요. 어쨌든 스포츠 같은 취미에 비하면 RPG는 꽤 틈새랄까, 그늘이랄까, 하는 곳에 있는 취미라는 생각은 들더군요. 그러거나 말거나 꾸역꾸역 재밌게 한다는 점이 저에게는 제일 중요하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