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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닉스 3화 (4): 셀라나

푹신해보이는 의자와 탁자, 양탄자가 아늑한 방에서는 어색한 침묵이 그녀를 맞아주었다. 셀라나는 바닥에 엎드려 새 주인들의 눈치를
보고 있었고, 남자들은 섣불리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셀라나가 보기에는 세 명의 인간 남자가 그녀를 쳐다보고 있으리라는 데
생각이 미친 아라는 손가락의 반지를 붙잡아빼서 휙 던져버렸다. 마법의 막이 사라지면서 갑자기 몸이 가벼웠다.

“일어나.”

그녀는 셀라나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붙잡아 일으켰다. 낮에 켈냐와의 재회가 휘저은 기억이, 그녀가 건네준 목걸이의 수수께끼가 아직도
머릿속에 혼란스럽게 남아있는데 또 이런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오랜 악몽을 불러일으키는 굴종 같은 것은 다시는.

“다시는 누구에게도 무릎꿇지 말아라.”

손길에 흠칫했던 셀라나는 끌려 일어나면서 아라를 마주보고는 눈이 동그래졌다. 믿고 싶은데 믿기 두려운 것을 눈에 새기려는 그
눈빛을, 입을 반쯤 벌린 채 목소리도 울음도 나오지 않는 그 표정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라의
어깨를, 다음은 팔을 붙드는 손길은 마치 물에 빠진 사람처럼 절박했다.

“아… 아…”

그렇게 말도 제대로 한 마디 못하고 아라를 붙잡은 채 셀라나는 무너지듯 천천히 주저앉았다. 그녀의 발치에 구겨져 웅크린 혼란과
슬픔의 덩어리에서는 추운 밤중에 부는 바람처럼 외로운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러면서도 손은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아라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어서 벗어날 수도 없었다.

낮에 켈냐는 전사답게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기에 대응할 수 있었지만, 이런 상황은 대체 어찌해야 한다는 말인가. 도움을 청하며
둘러봐도 이 배신자 같은 일행놈들은 아무도 거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엘프 아이는, 처음으로 자유의 놀랍고 두려운 바람이 뺨에 어렴풋이 스친 노예는 무엇을 바라는 것인가, 자신조차 추스리지 못하는
여자에게. 몸이 떨려오는 것을 깨닫고 아라는 흠칫 놀랐다. 침묵이 너무 길어지는 것을 견딜 수 없어 그녀는 쭈뼛쭈뼛 손을 뻗어
흐느낌으로 들썩이는 셀라나의 어깨를 툭툭 처주었다.

“약하게 굴지 말거라.”

셀라나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곁눈질하자 일행이라는 자들은 틀림없이 재밌어하고 있었다, 이 상황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말해도 좋을 텐데.”

지카리공의 눈빛은 흐뭇했다. 아라는 평생 처음으로 드래고니안을 공격하고 싶다는 자살충동을 느꼈다.

“익… 마법사 네가 어떻게 좀 해보거라!”

그녀는 옷자락을 두고 셀라나와 줄다리기를 시작했다. 그놈의 하프엘프는 오늘따라 왜 없어서 떠넘길 수도 없잖은가.

“잘 어울리는데 뭘 그래요.”

지카리공은 몰라도 마법사라면 나중에 보복을 할 수 있으리라고 아라는 이를 갈며 생각했다. 마법사가 셀라나 곁에 다가와 무릎을
꿇더니 작게 속삭이자 손에 금빛 광채가 떠올랐다. 희미하게 빛나는 손을 그가 셀라나 위로 움직이자 하얀 피부에 뚜렷했던 멍과
상처가 아무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별로 남자가 손대는 거 좋아하지 않을 걸.”

랜돌프는 의자 팔걸이에 팔을 걸치고 다리는 꼰 채 쳐다보지도 않고 툭 말했다.

“그냥 네가 돌보는게 나을 거다.”

그 말에 아라는 옷자락에서 셀라나의 손가락을 풀려던 손에 힘이 빠졌다. 그 기분이라면 이가 갈리도록 잘 알고 있었다. 보호와
지도의 대상이었던 남자가 평생 처음으로 두려워졌던 순간의 기억은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셀라나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감싸쥐었다.

그 감촉에 셀라나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고통과 놀람의 흔적은 역력했지만, 처음의 충격보다
한결 안정되고 또렷한 눈빛에 아라는 안도했다.

“시…실례했습니다.”

아라가 손을 놓아주자 셀라나는 훌쩍이며 눈물을 닦았다. 옆에서 크세노바가 주문을 마치고 떨어져 앉자 그쪽에 눈이 간 셀라나는 그의
손빛과 자기 피부 위에 막 사라져가는 빛을 보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크세노바에게 물러나 앉으며 마주보았다.

“마…마법사…셨…”

“아까도 본 거 아닌가?”

카사노바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 공포에는 뭔가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이 있다는 직감에 아라는 물었다.

“왜 그러지?”

“며칠 전에도… 인간 마법사 분들이…”

셀라나는 말하는 것만으로 두려운 듯 시선을 낮추었다. 랜돌프는 대번에 자리에서 반쯤 몸을 일으키며 이를 드러냈다.

“그놈들이 가게에 왔었나?”

셀라나가 움츠러들자 아라는 그에게 경고하는 시선을 던지고 한쪽 무릎을 꿇으며 셀라나의 어깨를 감싸쥐었다.

“인간 마법사들이 페어리를 사갔느냐?”

셀라나는 다시 눈에 눈물이 고이면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외롭고 고통스러운 노예생활을 하면서 페어리들이 이 아이에게 얼마나 큰
의미였을지 생각하자 아라는 새삼 가슴이 아팠다. 그렇게 정성들여 꽃을 키우고 친구가 된 페어리들이 죽고 팔려갈 때마다 그 마음이
어땠을까.

손을 통해 전해오는 떨림과 셀라나의 내리뜬 눈빛을 보고 아라는 그 두려움에는 다른 이유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혹시
오늘의 ‘손님’들처럼 흑마법사들 역시 셀라나를 덤으로 얹어주기를 바랐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랬더라면 셀라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에미넴 숲에 있었던 흑마법사 실험실의 기억이 검고 끈끈한 기분을 남기고 스쳐갔다.

“아, 그러고 보니.”

흑마법사를 생각하니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카사… 아니 크세노바, 그 문양 다시 만들어보거라.”

젊은 마법사의 손짓에 공중에는 다시 그 기하학적인 무늬가 떠올랐다. 셀라나는 신기해서 입을 벌리고 쳐다보았다. 과연 프리포트 같은
인간 사회에 마법사란 흔치 않은 존재인 모양이었다.

“혹시 이런 문양이 그들의 옷이나 몸에 있었느냐?”

그 질문에 셀라나는 문양을 뚫어져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 사람들의 손등에…”

“역시.”

다시 확인을 얻고 아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자에 앉아 몸을 앞으로 숙인 랜돌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놈들이 맞군.”

“셀라나.”

부르자 셀라나는 바로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 표정에 두려움과 불안이 엇갈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눈빛은 맑고 예리했다. 다시 한 번 아라는 이 아이가 상당히 똑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네 앞에서 너무 많은 얘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

셀라나의 눈을 들여다보며 아라는 또렷하게 말했다. 정확하고 정직하게 상황을 설명하면 셀라나가 이해하고 잘 대응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혹시 일이 잘못될 때에 대비해, 우리뿐만 아니라 너의 안전을 위해서기도 하다.”

셀라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이 아이에 대한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니 많은 것을 묻지 말고 우리 질문에 답해주면 좋겠다. 그럴 수 있느냐?”

하프엘프는 더욱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처음으로 스스로 판단해 강제가 아닌 이유 있는 지시에 응하는 그녀의 눈빛은
집중력과 목표의식으로 더욱 강렬해졌다.

이어서 던진 질문마다 셀라나는 아는 대로 성심성의껏 답했다. 두세 달 정도 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흑마법사들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2주 전이었으며, 전 주인이 자랑하던 걸로 봐서는 상당량의 페어리 날개를 사간 것 같다는 말에 일행은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
사이에 간극이 길어지기 시작하자 아라는 현재는 더 물어볼 것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더 물을 것이 없다면…”

그녀는 셀라나에게 눈짓을 보냈다.

“회의를 하자.”

셀라나는 즉시 일어나서 익숙한 기색으로 소리 하나 없이 방으로 물러갔다.

일행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임무의 어려움과 상황의 거대함이 새삼 다가오면서 아무도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이윽고
카사노바… 아니 크세노바는 한숨을 쉬었다. 젊은 사람치고 한숨이 많은 친구였다.

“프리포트의 분위기가 걱정이군요.”

그는 근심스럽게 금빛 눈쌀을 찌푸렸다.

“몇몇을 빼내는건 어렵지 않을겁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죠.”

“마법사들도 한두 놈이 아닌거 같은데. 솔직히 마법사는 한 놈 상대하기도 버겁다.”

랜돌프의 말에 아라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곁눈질하니 지카리공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몇 가지 안을 주고받았다. 아라는 구매계약을 한 페어리를 미끼로 흑마법사들을 끌어내는 계획을 제안했지만, 랜돌프는 아예
도시를 통째로 뒤엎을 생각인 모양이었다.

“칼로 데 로씨는 휘하에 많은 패거리들을 데리고 있다. 게다가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그 자식은 노예 장사에 대해서 반감이 커.”

바로 너같은 놈들에 대해서 말이냐? 하고 묻고 싶은 것을 아라는 참았다. 괜히 이 어린 녀석과 말 섞어서 도움될 일은 없었다.

“노스탤지어에서 요원을 파견해 칼로 데 로씨의 패거리들과 합세해 노예장사꾼을을 대규모로 공격해서…”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그는 손으로 얼굴을 짚었다.

“돈은 칼로 데 로씨가. 노예들은 노스탤지어가 가져가는 식으로 협상할 순 없을까?”

“그건 너무 큰일이 아닌가.”

역시 젊고 혈기 넘치는 남자들이란 야심만 지나치게 컸다. 뭐 그러니 젊은 것이겠거니 생각하며 아라는 그의 그을린 피부와 근육질
팔을 곁눈질했다. (그만. 네가 단단히 굶주렸구나, 아라.)

순간이동 마법진을 이용하면 어떨까, 마탑은 과연 믿을 수 있는가 하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전문가의 크세노바의 의견에 따르면
마법진은 단기간에 설치하기는 어려웠고 마탑에서는 페어리 날개를 별로 필요로 하지 않았다.

결국 남은 문제는 일을 얼마나 키우느냐 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이곳에서 내릴 수 없는 결론이었다. 노스탤지아에서 얼마나 지원을
해줄 수 있는지, 칼로 데 로씨라는 자는 얼마나 도움을 줄 준비가 되어있는지 알아봐야 했다.

“칼로 데 로씨에게 많은 것이 달려있을 것 같구나.”

아라는 얼굴을 비볐다. 낯선 인간 도시의 불쾌감은 온몸에 피로가 되어 젖어들었다.

“어느 쪽이든 노스탤지아에 접촉하고, 칼로 데 로씨를 만나보자.”

이 참을 수 없는 도시에서도 가장 참을 수 없는 그 필수품, 마법 반지를 어디다 던져놓았는지 눈에 띄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니자 지카리공이 찾았는지 반지를 집어들어 정중하게 내밀었고, 아라는 목례하며 받아들었다. 인간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어진 연녹색 눈만은 변함없었다. 수많은 변화와 혼돈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근본을 확인한 그녀는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진 채 반지를 끼고 그 마법적 변장의 안전을 받아들였다. 적지인 프리포트에서 그녀를 유일하게 보호해주는 것, ‘인간’이라는
사실을.

“내일도 움직여야겠구나. 자두거라.”

나머지 둘에게 말하고 그녀는 셀라나가 들어간 방으로 따라들어갔다. 조용한 어둠 속에서 셀라나의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지만, 실제로
자는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변화와 불안 와중에는 밤새 뜬눈으로 지새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 몸도
마음도 너무 지쳐서 그냥 곯아떨어졌을 지도 몰랐다.

가만히 옷을 벗고 누우면서 아라는 자신이 처음 탈출했을 때의 기억이 싫어도 떠올랐다. 그 넘치는 희열과 막막함, 그리고 가슴
저리는 슬픔이… 젊은 하프엘프 여인도 그럴까 궁금했지만, 사실 같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노예생활을 하다가 풀려난 공통점이 있을
뿐 그녀와 셀라나는 살아온 배경도, 상황도 전혀 달랐으니까. 닮은 듯해도 너무 다른 상실 속에 그들은 함께 있으면서도 각자의
슬픔 속에 혼자였다. 우연히 마주친 옛 전우, 켈냐의 무표정한 얼굴을 떠올리고 아라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샤나에리스…’

창밖에는 달빛과 시장의 무수한 등잔불이 비쳤다. 프리포트의 밤을 환하게 밝히는 그 빛 속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무력한 분노와 절망
속에 자신의 내일을 빼앗긴 채 쇠와 억압의 사슬에 매여 있을까.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욕망에 몰려 똑같이 두 발로 걷고 말하는
사람을 사고 팔며 폭력을 휘두르고 있을까. 피해자도 가해자도 혼이 찢기우는 그 폭력 속에서 얼마나 망가지고 뒤틀리는가.

감상주의라고 생각하며 아라는 눈을 세게 비볐다. 주어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는 것이지, 무슨 시인이나 철학자라도
된양 쓸데없는 생각을 할 필요는 없었다. 도시를 뒤엎자는 랜돌프의 제안이 그런데도 유혹적인 것은 그 분노에서 놓여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도시를 피와 화염으로 씻어내 바다로 쓸어버리고 다시 시작하면 어떨까. 그렇게 하면 이 추악함과 슬픔의 흔적을,
그 기억마저 지울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프리포트가 사라지면 이곳에, 아니면 다른 곳에 새로운 프리포트가 생기리라는 것을.
그래서 파괴와 재생의 꿈은 어제와 다를 것 없는 잿빛 여명으로 보답받을 따름이었다.

지붕 위에 육중한 무게가 부드럽게 내려앉더니 뭔가 끄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이윽고 들려오는 으드득… 소리는 아마도 사냥에서
돌아온 아사나스가 오늘의 포획을 즐기는 신호이리라. 이 정글에서 누군가는 수확이 있다니 다행일까, 아라는 미소짓고 자세를
고쳐누우며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 위로, 어둠 속에 검게 물결치는 바다 위로, 폭력과 풍요 속에 잠들지 않는 도시
위로 프리포트의 밤이 흘렀다.

소감

여기까지가 3화입니다. 끝부분에는 제 글쓰기의 큰 단점이라고 생각하는 감상주의가 좀 많이 드러나서 아쉽군요. 말하기보다는 보여주는 게 효과적인데, 제대로 보여주려면 더 많이 생각하고 정리하고 재구성을 해야 하는지라 결국 쉬운 길로 빠져나왔습니다.

폭력은 휘두르는 이와 맞는 이 모두를 왜곡시키지만, 아무리 짓이겨도 사람의 가장 긍정적인 면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죠. 그게 안힐라스의, 억압과 폭력의 순환에 갇혀버린 땅의 희망일지도요. 로그의 내용을 확장한 셀라나 묘사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건 그런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으으 그러나 졸려서 뭐가 뭔지(..)

이오닉스 3화 (3): 시장에서

프리포트 위로는 어둠이 내리고 있었지만, 불이란 불은 다 켜놓은 야외시장은 마치 대낮처럼 환했다. 제임스라는 자가 가르쳐준
노예시장 구역에서는 노점상 매대에 쌓아놓은 물건처럼 우리와 사슬과 조롱에 갖힌 노예를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언성을 높여
흥정하는 상인이나 행인을 붙잡는 열띤 호객은 활발하고 수익성 있는 시장의 증거였다.

그 속을 걸으며 아라는 문득 어릴적 기억이 떠올랐다. 샬란의 시장에 드워프 상단이 오던 장날, 주변 지역에서도 몰려든 다크엘프와
수염이 긴 드워프, 가끔 엘프까지 뒤섞인 활기 속에 무기와 농기구에서 악기와 장난감, 머리장식까지 온갖 물건을 구경하며 신기해하던
기억이 선했다.

지금도 그때와 같은 시장에 있다고 상상할 수도 있었다. ‘상품’의 생기 없이 내리뜬 눈빛이나, 좀도둑이 아닌 노예들을 감시하는
삼엄하게 무장한 경비만 아니었다면. 이곳 프리포트 노예시장의 열기는 어딘가 불안하게 들뜬 데가 있었다. 이곳에서는 노예보다도
상인과 손님에게서 두려움의 냄새가 났다. 억압에 기반을 둔 이 구조가 얼마나 불안정한지, 얼마나 위험한지 그들도 알고는 있을
것이다, 외면한다 해도.

‘인간들과 무엇이 다르냐고, 사람 잡는 사냥개야?’

좌도 우도 쳐다보지 않고 그녀는 시장 한가운데를 걸었다. 그러나 섞여들지 않으려고 해도 시장은 그녀에게 덮쳐왔다. 목청껏 소리질러
손님을 부르는 목소리와 이리저리 몰리고 움직이는 인파, 그리고 미래의 약속을 빼앗기고 남의 처분을 기다리는 남녀노소의 절망에
잠긴 눈빛이.

‘샬란에는 이런 시장이 없다. 안힐라스 어디에도 너희들이 오기 전에는 사람을 사고파는 시장은 없었다.’

“유난스럽군.”

어슬렁어슬렁 걸음을 옮기며 노예사냥꾼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긴 이쪽에서 왔던 상인놈들은 하나같이 가격을 비싸게 쳐줬었지.”

“엉망이군요.”

마법사 크세노바는 눈쌀을 찌푸렸다.

“랜돌프, 저들도 생존을 위해서 이런일을 한다고 말할수 있겠나?”

지카리공은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지만, 눈빛에는 고통이 드러났다.

“저놈들에게 노예상인일을 때려치고 다른 걸로 먹고살아보라고 말해보겠나?”

사냥개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픽 웃었다.

“신경쓰지 마. 남을 먹어치우며 사는 놈은 언젠가 다른 놈에게 먹히기 마련이다.”

걸음을 옮기는 그의 웃음은 자조적이었다.

“세상은 정글이고, 정글의 법칙은 간단하지만 준엄하지.”

“자네는 자연의 법칙을 너무 쉽게 말하고 있어.”

지카리공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낯선 인간 얼굴에도 그의 엄숙한 표정은 여전했다.

“자연이란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네.”

“지카리. 지카리…”

인간 남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토끼가 풀을 뜯어먹는다. 그 토끼를 늑대가 잡아먹지. 그 늑대를 사자가 잡아먹는다.”

그는 흉터와 굳은살 투성이인 길고 강한 손으로 손짓을 하며 말을 강조했다. 문득 아라는 첫째 남편 쟈타칸트의 섬세하고도 강한 손을
떠올리고 왠지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 과정에서 토끼가 늑대에게 왜 넌 나를 해치냐고 따질수 있단 말이냐?”

그리고 사자가 죽고 나서 풀이 되면 또 다른 토끼가 뜯어먹을 것이었다. 노예사냥꾼이 노예가 되듯, 아니면 노예가 노예를 부리듯.

“오오! 이거 귀하신 손님들이 오셨군요.”

비싼 옷을 입은 인간 남자 하나가 일행의 앞을 가로막듯 서더니 침까지 튀겨가며 떠들어댔다.

“어떻습니까? 관상용 페어리가 단돈 4천 골드입니다!”

그는 색색의 빛이 비쳐나오는 조롱을 늘어놓은 판매대를 양손으로 가리켰다. 안에는 하나같이 풀이 죽어 희미한 빛만 발하는 페어리들이
축 늘어져 앉아있거나 빠져나갈 곳을 찾는 듯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꺼져.”

아라는 그자를 확 밀쳤다. 그가 땅에 뒹구는 것을 보며 그녀는 순간적으로 손가락의 반지를 던져버리고 칼을 뽑고 싶었다. 이놈부터
시작해 노예상인과 노예 사냥꾼들을 되도록 많이 길동무로 데려가면 그것도 나쁘지 않은 결론일 것이다. 벌써 여러 해 전, 인간들에게
포로로 잡히느니 그랬어야 했다. 샤나에리스 역시 그쪽이 편한 결론이리라.

그리고는 한 명의 노예도 구하지 못하고 동료들을 위험에 몰아넣거나 역시 마지막 길의 동행으로 데려가겠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노스탤지아의 임무와 계획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고, 결국 안힐라스인은 인간들에게 더 많이 죽고 노예로 잡힐 것이었다.

“그런 정도 물건에는 관심이 없다.”

되도록 냉혹하고 차갑게, 이윤 외에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이 뼛속까지 계산적인 여자처럼 말해야 했다. 다른 상인도 듣기를 바라며
그녀는 언성을 높이고 되도록 또렷하게 말했다.

“이분을 보면 알겠지만…”

그녀는 돌아서며 크세노바를 가리켰다. 소란에 주의를 돌린 사람들이 로브 입은 마법사를 보고 낮게 오오.. 감탄했다.

“필요한 것은 관상용이 아니라 날개다.”

이곳, 노예상인의 영역에서는 노예상인이 되어야 했다. 저들만큼 잔혹하고 비정해져야 이 싸움에 이길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이미 노예라면 하나 데리고 있지 않은가. 노예가 하나이든 백만이든 정도의 차이일 뿐이었다.

“좋은 물건을 많이 파는 상인을 주선해준다면 수고비도 좀 떨구어주지.”

“이야, 날개말씀이시군요.”

옆에서 다른 남자가 헤헤거리며 끼어들었다. 눈이 실룩실룩 계속 주변의 눈치를 살피는, 기분이 좋지 않은 남자였다.

완벽했다.

“너는 괜찮은 가게를 아는가?”

“날개라면 제가 전문이죠.아주 상품의 것들이 많습니다요.”

“흠…”

크세노바는 벌써 역할을 잘 소화해내고 있었다. 그는 미심쩍은 고객의 눈빛으로 남자를 훑어보았다.

“마법사 손님이 이렇게 또 찾아와주실 줄은… 이거 아주 영광입니다요.”

남자가 굽신거리는 앞에 아라는 팔짱을 끼며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또’라고? 뭘 하는 마법사나부랭이들이 여기까지 와서 날개를 구해간다는 말이냐.”

“예에. 일전에도 마법사님 같은 분이 날개를 아주 많이 사가셨습죠.”

남자가 헤헤거리며 아부하는 동안 아라는 크세노바와 눈이 마주쳤다. 어쩌면 그 흑마법사일까.

“이분처럼 대단한 마법사님에게는 발끝에도 못 미치겠습니다만요.”

마치 파리가 앞발 비비듯 손을 비벼대는 남자를 보며 노예사냥꾼 랜돌프는 그 손가락을 부러뜨리고 싶은 기세로 손마디를 우둑거렸다.
그가 섣불리 움직이기 전에 아라는 서둘러 말했다.

“설마 가장 좋은 날개를 그자들에게 이미 넘겨버린 건 아니겠지?”

허리춤의 칼자루를 살짝 쓰다듬으며 말하자 노예상인은 더욱 손을 열심히 비비며 굽신거렸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요, 헤헤헤. 최고의 고객들을 위해 고순도의 날개는 아껴두고 있습죠.”

그자가 눈치를 보더니 슬금슬금 다가오자 지나치게 진한 향수와 향료 냄새가 끼쳐왔다.

“8장급의 페어리 날개도 있슴니다요.”

그가 귓가에 속삭이자 아라는 칼을 뽑아 이자의 배때기에 찔러넣는 것은 만족스러울 지는 몰라도 생산적이지는 않다고 자신에게
상기시켜야 했다.

“그래도 조금은 물건을 아는 자이구나.”

그녀는 미소지으며 노예상에게서 물러났다.

“물론 신선한 물건 채취를 위해 아직 페어리는 온전하겠지?”

“아, 생걸 찾으시는군요.”

남자는 헤헤 웃으며 손을 비볐다.

“일전에 온 손님도 그런 걸 찾으셨습죠.”

“위대한 카사노바 같은 마법사님이 신선하지 않은 것에 만족하실 리가 없지 않겠느냐.”

크세노바의 표정이 잠시 멍해지는 것을 보고 그녀는 작게 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싫은 상황이라면 마법사라도 놀려먹어야지 않겠는가.

“물론 있습니다요.”

수익을 직감한 사내의 눈빛이 번들거렸다.

“생것도, 꽃까지 통채로 캐와서 아주 생생합니다요.”

”…일단 한 번 보지.”

‘카사노바’ 일격에서 회복하며 마법사는 상인을 재촉했다. 그는 굽신거리며 인파를 헤치고 근처의 건물로 그들을 안내했다.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정방형의 큰 1층짜리 돌 건물 앞에 지켜서던 경비 둘이 잠시 긴장했다가 상인의 손짓에 그들을 통과시켰다. 안심하지
못하고 주변을 경계하며 아라는 앞장서서 들어갔다.

안에 들어서자 우선 꽃향기가 코에 끼쳐왔다. 안의 조명에 눈이 익숙해지자 색색의 꽃을 심어놓은 큰 화단이 보였다. 한가운데에 넓은
통로와 직각으로 뻗어나가는 좁은 통로들을 따라 하인들이 오가며 화단에 물을 주고 있었다. 화단 너머의 양쪽 벽을 따라 걸어놓은
등잔불은 넓은 창과 머리 위의 채광창으로 비쳐드는 바깥 조명과 함께 방을 환하게 밝혔다. 등잔 사이의 긴 선반에는 물뿌리개나 꽃삽
같은 도구, 축 늘어진 페어리가 든 조롱과 아마도 채취한 페어리 날개인 듯한 얇게 반짝이는 물건이 가득 든 바구니가 늘어섰다.

그 모습을 보고 문득 노예사냥꾼에게 생각이 미쳐 돌아보자 그자는 당장이라도 누군가를 죽일 기세로 이를 갈고 있었다. 저
어처구니없는 모순투성이 아이 같으니라고. 그녀는 앞서가는 상인과의 거리를 확인하고 목소리를 낮추어 어깨 너머로 말했다.

“참거라. 여기서 일을 그르친다면 배신으로 간주하겠다.”

그것으로 동기부여가 충분하기를 바라며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자 페어리 상인은 뭔가 또 열심히 지껄이고 있었다.

“어떻습니까요 마법사님.아주 맘에 드시지 않습니까?”

그는 손을 비비며 잠시 멈춰서서 일행이 따라잡기를 기다린 후 크세노바의 옆에 붙으며 말을 이었다.

“저는 다른 떨거지들과는 다릅니다요. 아주 철저하게 관리까지 하고 있습죠.”

“흠 나름대로 섬세하게 관리하는 것 같군그래.”

젊은 마법사는 제법 중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찬이십니다요. 헤헤헤.”

“마음에 드십니까, 카사노바님.”

아라는 눈썹을 살짝 치켜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날개 8장짜리는 어디 있지?”

“잠시만 기다리십쇼.”

상인은 굽신거리더니 중앙 통로를 따라 뒤편의 문으로 종종걸음을 치며 들어갔다. 밖에서 본 건물의 모습과 대충 대조해본 결과 아라는
이곳의 공간은 아마도 전체의 2/3 정도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는 것은 안쪽에는 또 다른 방이 있다는
뜻이었다. 아마도 정말 좋은 물건은 저 안쪽에서 관리하고 있으리라 그녀는 짐작했다.

”…이런 곳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게 싫군…”

지카리는 주변을 둘러보며 기운없이 늘어진 페어리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아라도 말없이 동의하며 한 번 무겁게 끄덕였다. 견디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중과부적인 상황에서 마음 가는 대로 싸우는 것은 무익한 자살일 뿐이었다.

랜돌프가 아무 말없이 주변을 살피는 모습에 그녀는 눈이 갔다. 구석마다 선 용병, 그들과의 거리, 그리고 꽃에 물을 주는 하인들을
살핀 그는 살짝 한쪽 눈썹이 올라가더니 입술을 젖히며 이를 드러냈다. 금방이라도 싸움에 뛰어들려는 전투의 열기를 알아보고 그녀는
그에게 살짝 몸을 숙이며 속삭였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나중에 기회를 노리자.”

인간 남자는 흠칫 놀라며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

“누가 뭐래?”

그는 짐짓 태연하게 말했다.

“네 볼일 봐.”

고개를 돌리는 그가 입술을 삐죽이는 것을 놓치지 않고 아라는 웃음을 참았다. 모습을 봐서는 100살은 되어보이는 그가 얼마나
젊은지 가끔 잊곤 했다. 아무리 세상 다 아는 척 떠들어도 어린 남자란 참 속이 환히 들여다보이고 순진했다.

그런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한 순간 아라는 자신을 심하게 나무랐다. 네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아라. 하긴 하루이틀 일은
아니다만… 가슴이 잠시 시려왔다.

“오래 기다렸습죠?”

방 뒤편 문간에서 움직임이 보이더니 노예상인이 조롱 하나를 들고 급히 다가왔다.

“이놈입니다요, 헤헤헤.”

그자가 자랑스레 내민 조롱 안에는 보라색 빛을 은은히 흩뿌리는 페어리가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좁은 공간을 배회하고 있었다.
등에는 여덟 장의 날개가 붕붕붕..날갯짓을 했다.

크세노바가 손을 뻗으며 뭔가 중얼거리자 조롱은 상인의 손을 벗어나 둥실 떠오르더니 부드러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크세노바 앞에 뜬
채로 멈추었다.

“흐음… 괜찮군. 나쁘지 않아.”

크세노바는 냉정한 눈빛으로 안의 페어리를 살피며 말했다.

“과…과연 마법사님이십니다요.”

상인은 놀란 듯 더듬거렸다. 저자가 좀 겁을 먹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화단에서 일하던 하인들도 이쪽을 가리키며 웅성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증오! 탐욕! 사악한 자들!”

안의 페어리는 작지만 날카로운 목소리로 빽빽 소리를 질렀다. 무기력해 보이는 다른 페어리들과는 다른 기백은 그녀가 귀족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잡혀온지 얼마 안 되어서일까 아라는 궁금해졌다.

“눈빛이 마음에 드는군.”

크세노바가 무심히 손을 젓자 조롱은 그의 왼편으로 이동해 둥둥 떴다.

“꽃은 어딨나?”

“헤헤 그거야 마법사님이 다 마치시면 저희가 즉석에서 날개를 바로 해체해드릴 텐데…”

상인은 만면에 비굴한 웃음을 띄었다.

“무슨 필요가 있으시겠습니까요.”

“쯧쯧…”

크세노바는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급수 낮은 도제들이나 연연하는 거야.”

여기서 ‘위대한 카사노바’가 그의 권능을 선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전에 마법사가 능력을 쓰고 피로해하던 기억이 난 아라는 마법은
되도록 비상시를 위해 절약해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녀는 한 발짝 나서며 상인의 멱살을 잡았다.

“뭘 모르는구나.”

놀라서 눈을 꿈벅거리며 내려다보는 인간의 얼굴에 대고 그녀는 으릉거렸다.

“꽃이 신선할 때 카사노바님만의 비법으로 직접 채취하지 않으면 어떻게 최고급의 마정석을 만든다는 말이냐.”

말이 되는 소리인지는 당연히 알 수 없었지만, 흑마법사들도 ‘생것’ 페어리를 요구했다는 전례에 비추어보면 적어도 먹힐 수는 있는
얘기였다. 어쨌거나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보다는 기세가 더 중요하다고 다짐하며 그녀는 노예상인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그렇군요. 소인이 몰라뵜습니다요.”

상인은 손을 들어보이며 크세노바의 눈치를 보았다. 그가 완전히 기가 꺾인 것을 확인하고 아라는 손을 놓았다.

“알았으면 어서 안내하거라.”

상인이 앞장서서 그들은 중앙 통로를 따라 문이 없는 문간을 지나 안쪽 방으로 들어섰다. 이곳의 화단은 바깥쪽 방보다 작았지만,
꽃은 한결 더 크고 색도 생생했다. 벽에 늘어선 것은 조롱이 아닌 튼튼하게 자물쇠를 채운 여러 층의 우리였고, 창살 뒤에 갖힌
페어리들은 밖에서 본 페어리보다 하나같이 날개가 많았다. 페어리 귀족까지 이제 이런 곳에 잡혀오는 것을 확인하자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크세노바 옆에 둥둥 떠서 따라오는 조롱 안의 페어리를 보고 우리 안의 페어리들은 자기들끼리 불안하게 속삭이며 창살에
붙어서 내다보았다.

화단의 화려한 꽃 중에서도 그 한가운데, 금빛 중심이 화려한 탐스런 진홍색 꽃이 확 시선을 끌었다. 페어리 날개가 훨씬 돈이 되지
않았더라면 정원 관람료만으로도 이곳은 수익이 나왔으리라고 아라는 생각했다.

꽃 옆에는 이제 갓 소녀기를 벗어난 젊은 여자가 앉아 부드러운 손길로 꽃을 쓰다듬고 있었다. 인기척을 보고 돌아본 여자는 상인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 움츠러들었다. 이때 아라는 두 가지를 눈치챘다. 첫째, 금발머리 사이로 귀가 길게 뻗어나온 그녀는 아마도
인간 혼혈의 엘프라는 것, 그리고 두 번째, 드러난 얼굴과 목, 팔의 창백한 피부가 멍과 상처투성이라는 것. 인간들이 물건으로
취급하는 혼혈이 프리포트에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학대의 흔적은 오히려 당연한데도 가슴이 쓰려왔다. 왜 이런 순간에 그때 죽은
인간 혼혈 사절이 떠오르는가. 그리고 그의 친구 혹은 연인, 또 다른 하프엘프가.

“꽃을 관리하랬더니 뭐하는 게야!”

사근사근한 태도가 순식간에 급변한 상인은 거칠게 소리지르면서 하프엘프 여자에게 다가갔다.

“비루먹을 것 같으니. 귀한 손님들 앞에서 썩 꺼져!”

“저것이 꽃을 관리하는가?”

아라는 태연한 질문으로 상인의 발을 붙들었다. 저 아이나 그녀가 아닌 저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했다. 이곳에서는 자신의 본모습과
마찬가지로 저 엘프의 딸 역시 사고 팔고 이용할 물건이었다. (병사들 노리개로 있기는 아까운 물건이구나. 얼마면 되겠느냐? …
이렇게 희귀한 것을 입수하시다니, 많이 자랑스러우시겠습니다. … 눈앞에 검고 붉은 분노가 확 끼쳐오며 심장을 증오로 새카맣게
물들였지만 어떻게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도.)

“아, 저런 ‘잡것’을 보여드려서 죄송합니다.”

상인이 그들에게 열심히 굽신거리는 동안 하프엘프는 황급히 일어났다. 엘프 아이가 도망치듯 옆으로 스쳐가는 순간
아라는 쳐다보지 않고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거칠게 잡았다.

“꽃에 대해 설명을 듣고 싶으니 그냥 두거라.”

“예?”

눈을 크게 뜨며 놀라는 상인에게 그녀는 여전히 하프엘프는 쳐다보지 않고 말했다.

“역시 매일 보는 입장에서 제일 잘 알지 않겠느냐.”

“예예, 그렇습죠. 아무렴요.”

상인의 대답에 그녀는 마치 불쾌하다는 듯 젊은 여자를 놓았다. 노예 여인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그 기억이 손아귀에 생생했기에 완전히
연기만은 아니었다. 정상적인 반응은 놀라면서 저항하는 것이었을 터이고, 동족의 여인이라면 무기나 최소한 주먹이 날아왔으리라.

그러나 하프엘프 아이, 사람이 아닌 물건인 이 여인은 낯선 사람이 팔을 나꿔채는 순간 몸에 힘을 빼며 멈춰섰었다. 너무나
익숙했기에, 아니 그런 취급이 정상적이기에, 덜 맞고 덜 다치려면 물건같은 취급에 굴종으로 반응해야 했을 테니까. 아라는 손을
옷에 세게 문질렀다. 무력하게 힘을 빼던 그 팔의 감촉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상인의 눈짓에 하프엘프 여자는 열심히 주인의 눈치를 보며 주춤주춤 다시 꽃 옆으로 가서 무릎을 꿇더니, 다소곳이 손을 모으고 눈을
내리떴다. 마치 되도록 공간을 차지하지 않고 작아지려는 것 같았다.

“이… 이 꽃입니다요.”

좀 당황한 상태에서도 상인은 그 진홍색 꽃을 가리키며 애써 웃음지었다.

“꽃의 건강상태는 좋은가?”

대답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상인은 큼큼 헛기침을 하더니 노예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움찔하더니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아라는 이번에는
상인에게 물었다.

“이곳에서 좀 멀리 가져가서 채취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꽃을 분갈이해도 견딜 수 있겠는가?”

“물론입죠.”

페어리 상인은 대번에 대답했다.

“에미넴숲에서 여기까지 가져왔는데도 멀쩡합니다요. 물론 마법사님도 계시니 더 쉽겠습죠.”

그가 크세노바의 눈치를 보자 마법사는 끄덕였다.

“괜찮군.”

“에미넴숲…?”

옆에서 랜돌프—다사케타—가 혼자 중얼거렸다. 그가 무슨 짓을 할까 불안해진 아라는 크세노바에게 말했다.

“마음에 드신다면 이대로 입수하시겠습니까?”

그 말에 하프엘프 노예는 눈을 크게 뜨더니 마치 막다른 곳에 몰린 동물처럼 절박하게 그들 일행을, 그리고 크세노바 옆에 뜬
페어리를 보았다. 그녀는 뻣뻣한 동작으로 손을 뻗어 주인의 옷자락을 당겼다.

“나… 나으리…”

“이거 썩 놔라 이 썩을 것!”

상인이 휙 돌아서며 발길질을 하자 하프엘프는 숙련된 동작으로 재빨리 몸을 움츠리며 머리를 보호해 발길을 얼굴 대신 팔에 받아냈다.
차여서 나뒹구는 순간에도 그녀는 손을 짚어 넘어지는 방향을 바꾸어서 꽃이 상하지 않게 했다. 조롱 속의 페어리는 새된 비명을
질렀다.

“셀라나! 셀라나!!”

“이거 추태를 보여드렸습니다요.”

상인은 바로 얼굴을 바꾸며 그들에게 돌아섰다.

“그럼 얘기는 밖에 나가서…헤헤헤.”

“너의 취미생활은 우리가 없을 때나 하도록.”

아라는 날카롭게 말하며 상인의 등뒤에서 몸을 일으키는 셀라나를 흘깃 보았다. 아마도 어려서부터 노예였을 셀라나가 그런 애원을 하는
데 얼마만한 용기가 들었을지 그녀로서는 쉽게 상상하기 어려웠다.

“카사노바님께 성가시지 않은가.”

“예예, 물론입죠.”

“저것도 혹시 덤으로 붙여줄 수 있는가?”

그녀는 셀라나에게 손짓했다. 어쩌면 이 아이는 굴종을 체화한 겉모습보다 한결 용감하고 똑똑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도움이 될 수도 있었고, 어쨌든 가능하다면 이곳에 두고 가고 싶지는 않았다. 모두를 구할 수 없다면 하나라도 건져내고 싶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우리가 쓸 데가 있다.”

“예?”

상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런 건 귀하신 나으리들께는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요.”

“멀리 이동하는 동안 꽃을 돌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옆에서 랜돌프가—노예사냥꾼이!—맞장구쳤다.

“아무래도 저것이 꽃 키우는 일에는 재주가 있는거 같군.”

“그… 그렇기야 합니다만요…”

상인은 흘끔흘끔 하프엘프를 돌아보았다. 아까운 마음과 얼마나 돈을 더 받을 수 있을까 저울질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성의표시로 웃돈은 붙여주지.”

아라는 싸늘한 웃음을 지었다. 이자의 배에 칼을 쑤셔넣는 상상을 하면 한결 웃기가 쉬웠다.

“어찌되었든 우리에게 도움이 될 지는 자네가 결정할 일이 아니야.”

상인에게 말하고 크세노바는 이번에는 셀라나에게 서늘하게 말했다.

“따라오거라.”

상인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셀라나는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일어나 다가왔다. 상인은 마지막으로 한 번 셀라나를 아쉽게
보더니 이내 더 중요한 것에 생각이 미쳤는지 비굴하게 웃으며 손을 마주 비볐다.

“그럼 손님, 계산은 어떻게…”

“그전에 궁금한 게 있군.”

크세노바가 말했다.

“이전의 마법사들이 혹시…”

그가 공중에 손을 가볍게 젓자 아까 정육사 제임스의 집에서 본 문양이 허공에 생겨났다.

“이런 문양을 새기고 있던가? 왠지 아는 사람 같아서 말이야.”

“그..그건 잘 모르겠습니다요. 그냥 대금만 후하게 치루고 가셔서.”

잠시 놀라서 문양을 보다가 상인은 ‘대금’이라는 말을 강조하며 헤헤 웃었다.

“상계에선 그게 제일 중요한거 아니겠습니까요.”

“그런 마법사나부랭이들에게 카사노바님께서 신경을…”

아라는 짐짓 눈쌀을 찌푸리다가 생각난 듯 말했다.

“카사노바님. 기왕 매입하고 꽃을 키울 노예까지 구입한 김에는 재고를 전량 매입하는 것은 어떨지요?”

조롱 안에 축 늘어진 페어리들의 모습을 떠올리자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기왕 일을 저지른다면 차라리 크게 벌이는 것이
나았다.

“흑마법사 나부랭이들이 물건을 가로채는 일은 없어야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상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흠…”

크세노바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여기 있는 재고가 모두 얼마나 되나?”

“예에…그러니까 날개만 20장에…”

상인은 주판을 꺼내 재빨리 튀겼다.

“페어리들까지 모두 치면 9만2천골드 되겠습니다요.”

크세노바는 값이 괜찮느냐는 듯 랜돌프를 쳐다보았고, 노예사냥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라는 말했다.

“우리가 이 많은 것을 번잡하게 옮겨갈 수는 없으니 항만 창고에 옮겨다 주면 그곳에서 대금과 배달비까지 쳐주도록 하지.”

노스탤지아에, 혹은 칼로 데 로씨라는 자에게 요청해서 배를 조달해야 했다. 그리고 운이 좋다면 페어리들을 통해 흑마법사와도
조우하리라.

“창고 말씀이십니까. 알겠습니다요.”

상인은 좋아서 입이 벌어지며 손을 비볐다.

“전량 모두 살아있어야 한다, 꽃도 무사하고.”

그녀가 눈을 부라리자 상인은 움찔했다.

“무…물론입죠.”

배달 시기와 창고 위치에 대해 몇 마디 나누고 그녀는 돌아섰다.

“다시 연락 주겠다. 일단은 물건을 준비해놓고, 맡아두는 의미에서 여긴 계약금이네.”

“예예.”

허리춤의 주머니에서 보석을 하나 꺼내 건네자 상인은 허리를 숙이며 두 손으로 받았다. 영수증을 받은 후 그녀는 크세노바에게 허리를
숙였다.

“가실까요, 카사노바님.”

“다시 오겠다.”

크세노바는 상인을 쳐다보지도 않고 무심하게 말했다. 상인의 배웅을 받으며 거의 문에까지 갔다가 아라는 문득 돌아섰다.

“아, 잠깐.”

그녀는 엉거주춤하게 선 셀라나를 쳐다보았다. 상인이 의심하지 않도록 정말 갑작스러운 변덕이라고 생각하게 해야 했다.

“계약금도 냈는데 저것은 미리 데려갈 수 있을까.”

“지금 던져준 그 보석값만 해도 그 잡종의 가격은 넘기고도 남겠지.”

랜돌프도 덧붙였다.

“그 이를 말씀입니까.”

눈빛에는 아쉬운 기색이 엿보였지만 상인은 역시 프로였다. 그는 조롱 속의 페어리를 돌아보는 셀라나의 팔을 잡아 아예 일행에게
떠밀었고, 아라는 그녀의 어깨를 거칠게 붙잡고 걸음을 옮겼다. 놀라고 아파서 작은 비명을 지르면서도 다시 저항을 포기한 채
셀라나는 순순히 따라왔다. 어차피 그녀의 삶에 저항이란 아무 이득이 없었을 터이니.

“또 보도록 하지.”

악문 이 사이로 중얼거리며 아라는 일행과 함께 상인의 인사를 받으며 거리로 나섰다.

“험하게 다룰 필요는 없지 않겠나?”

옆에 따라오며 지카리공이 낮게 웅웅거렸다.

“그쪽이 오히려 익숙할 거다.”

지카리공의 따스하고 슬픈 눈빛을 마주볼 자신이 없어 그녀는 정면만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지, 랜디?”

이자의 애칭을 부르는 것은 낯선데도 묘하게 편안했다. 정말 단단히 미친 모양이었다. 노예사냥꾼은 즐거움 없이 이를 드러내며
돌아보았다.

“주위를 둘러봐라. 누가 그렇게 얌전하게 끌고가는지.”

그녀는 끄덕이며 길이 비교적 한적한 곳에서 멈춰서서 일행에게 말했다.

“방을 잡도록 할까. 아까 그곳은 그다지 넓지는 않았으니…”

아니면 그저 지하실 생각에 기분이 꺼림칙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어느 쪽이든 정육사의 집에 묵고 싶지는 않았다.

“다른 곳으로 가자.”

랜돌프는 주변을 날카롭게 살폈다.

“이정도의 돈을 쓴 일행이라면 꼬리가 붙을 거다.”

북적거리는 근처 여관에서 위대한 카사노바님께서 쓰실 방값을 금액을 듣고 안색이 창백해진 위대한 카사노바님이 치른 뒤 그들은
2층으로 올라갔다. 침실 세 개와 공동 휴게실이 있는 방은 제법 넓었다.

등뒤로 문을 닫자마자 아라는 데인 듯 셀라나를 놓았다. 아무 침실 문이나 열고 들어간 그녀는 비교적 깨끗한 방과 가구를 미처
인식하기도 전에 다급히 침대 밑의 요강을 찾아 무릎을 꿇은 채 그 위로 고개를 숙였다. 아까부터 속에 들끓던 분노와 불쾌감을
뱉어내듯 아침에 먹은 것이 목구멍에 뜨겁게 역류해 요강에 철벅철벅 쏟아졌다. 더 토할 것이 없어지자 그녀는 컥컥거리며 뒤로
물러나서 요강 뚜껑을 닫았다.

몸이 가벼우면서도 어딘가 텅 비어버린 듯 허무했다. 셀라나를 잡았던 손을 막연히 허벅지에 비비다가 아라는 일어서서 의자 등받이에
걸어놓은 수건을 집어들었다. 창가의 작은 탁자 위 대야에 옆 물주전자의 물을 부어 수건 한쪽 구석을 적신 그녀는 입을 닦고 다른
쪽으로 손을 닦았다. 손으로 물을 움켜 입에 머금은 그녀는 창문을 열고 밖의 거리에 뱉어냈다. 기분 같아서는 데이도록 뜨거운 물에
온몸을 씻고 또 씻고 싶었다. 이 인간 도시의 더러움을, 오늘 본 것들의 기억마저 흘려보낼 수만 있다면.

그러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멍하니 창밖의 복잡하고 지저분한 도시를 내다보았다. 아무리 씻어도 정신적 오염을 지울 수는
없었다. 기억이란 어떤 물이나 천도 닿지 않는 곳에 아로새기게 마련이었다. 눈을 감은 눈꺼풀 뒤에, 악몽의 가장 깊고 어두운
구석에…

지붕 위에서 나지막한 가르릉 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미소지었다. 아사나스가 있는 한 그녀는 언제든 가우르의 등 위에 뛰어올라 활을
당길 수 있는 전사였다. 주단과 황금을 두른 노예 같은 것이 아니었다. 절대로 절대로, 다시는.

그녀는 열린 창문에 대고 속삭였다.

“사냥을 하거라, 아사나스.”

아라는 엷게 미소지었다.

“이 도시에서는 정글 냄새가 난다는구나.”

실제로 올라오는 것은 오물과 쓰레기 냄새이기는 했지만. 화답하는 가우르의 으르렁 소리를 확인하고 그녀는 창을 닫았다. 숲 바닥에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조용하게, 지붕 위로는 커다랗고 부드러운 발걸음이 움직여 갔다. 도시의 밤으로 뛰어드는 맹수의 모습을 상상하자
아라는 기운이 났다. 그 확신과 온기에 떠밀리듯 그녀는 자신감 넘치는 걸음으로 방문을 열고, 공동 휴게실로 나갔다.

소감

이 노예시장 부분은 플레이 자체는 아주 재밌게 했던 대목이었습니다. 전술적으로 생각하고 속임수를 펼치는 모험적 재미도 쏠쏠했고, 인물의 감정선이나 서로 다른 생각도 표현이 된 좋은 장면이었죠. 반면 써놓고 나니 소설로서는 좀 의구심이 듭니다. 함축의 묘미 없이 너무 분량대로 쏟아놓은 느낌이랄까요.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 쓴 안힐라스 부분이 다 그렇기는 합니다만… 묘사나 서술 연습은 많이 되는데, 소설이라기보는 방향성 없는 사건의 나열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방향성을 모른 채로 쓰니 그게 당연하기도 하고요. 그것이 역시 ‘하는’ RPG와 ‘보이는’ 소설이라는 매체의 근원적 차이겠지요.

그래도 좀 방향성이 보이는 부분이라면 랜디에 대해 아라가 점점 매력을 느끼는 점이겠지요. 이 부분은 이방인님과 협의를 거친 부분이기도 합니다. 앞에 이야기가 아라 시점이 아닌 부분이 많아서 좀 갑작스러운 느낌도 있는 게 아쉽긴 하지만요. 뭐 원래 그런 감정이란 종종 갑작스럽기도 하죠. 별로 닭살을 날릴 만한 두 사람은 아니지만 둘의 성적 긴장감은 개인적으로 흥미롭습니다. 어찌보면 달콤하고 애정 많은 커플보다 신선해서 좋기도 하고요. 달콤한 애정 커플은 나중에 4화에서 개봉박두~ 때는 봄인 겁니다!

이오닉스 3화 (2): 제임스의 집

광장에서 빠져나온 그들은 길이 급격히 좁아지고 갈라지면서 생겨난 복잡한 골목길을 몇 번 돌아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다. 골목 옆쪽
벽을 이룬 집의 나무문을 사내가 두드리고 뭔가 중얼거리자 문이 끼익.. 열렸다.

“들어오시죠.”

남자가 손짓하자 랜돌프는 주변을 경계하며 슥 들어갔고, 나머지 일행도 따라들어갔다.

안의 집은 작은 창에 휘장을 쳐놓아서 어둑했고, 밖에 비해 차가운 공기에 어딘가 퀴퀴한 냄새가 났다. 나지막한 천장에 별로 크지
않은 방 가운데에는 탁자와 의자가 몇 개 흩어져 있었다. 출입문을 기준으로 왼쪽 벽의 먼 구석에는 문간과 그 너머에 어디론가
이어지는 그늘진 통로가 눈에 띄었다. 통로에서는 희미하게 불쾌한 냄새가 섞인 찬바람이 불며 방안의 공기를 미약하게 저었다.

“일단 여러분.”

일행 뒤로 따라들어와 문을 닫으며 요원이 말했다.

“이 도시에서 노예가 어떻느니 하는 애기는 최대한 자제해주십시오.”

“주의하지.”

랜돌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 곳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들뿐만 아니라…”

사내는 말을 흐렸다. 아라는 금방 도망이라도 칠 듯 팔짱을 끼고 문앞에 서서 말했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사내는 입을 얇게 다물며 그녀를 마주보았다.

“여러분의 목숨만을 두고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너희 노스탤지아야말로 어째서 이런 일들을 묵과하는 것이지?”

억눌렀던 것이 터져나오듯 그에게 한 발짝 다가서며 말하는 아라의 눈이 차가운 빛을 냈다.

“진정 안힐라스를 해방시키려는 것이라면 어떻게 저들을 외면할 수가 있는가.”

“제기랄, 손댈 힘이 없으니까. 그걸 말로 해야 하나?”

랜돌프는 답답한 숨을 짧게 내뱉었다.

“한 놈 두 놈 끌려가는 노예들을 구조하는 건 좋다고 치자.”

그는 성큼성큼 의자 하나로 걸어가 털썩 앉았다.

“그럴 때마다 요원이 한둘씩 죽어나가면 노스탤지어로서는 참 수지맞는 장사겠군그래.”

“너야 아무렇지도 않겠지.”

아라는 내뱉듯 말했다.

“노예 첩의 생활이 괜찮다고 표현할 수 있는 놈이라면.”

랜돌프를 보며 그녀는 이를 드러냈다.

“아니, 바로 그들을 전문적으로 팔아넘기던 너라면.”

랜돌프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는 동안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음, 그 엘프 소녀에 대해서는…”

요원은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저희들도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끌려온 건지, 어떤 신원의 아이인지 저희도 궁금해하고 있죠.”

요원이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자 지카리와 크세노바가 가서 앉는 동안 아라는 출입문 오른쪽 벽에 기대선 채 팔짱을 꼈다.

“저희는 그 아이가 도시밖으로 이송될 때를 노릴 겁니다.”

사내도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건 저희들의 일이겠죠. 여러분은 따로 임무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일행을 보는 그의 눈빛은 예리했다.

“흑마법사다.”

무릎에 다른쪽 발목을 올리면서 랜돌프는 이를 갈았다.

“그 개새끼가 여기 있는 게 확실한가?”

그말에 남자는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제가 들어야 할 것 이상이로군요.”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의자가 나무바닥을 드륵.. 긁었다.

“책임자를 불러오겠습니다.”

그는 방 구석의 통로로 걸어들어가 사라졌다. 이내 발걸음이 살짝 울리며 멀어져갔다.

“정보를 분산하는군. 좋은 생각이다.”

벽에 기대어선 아라는 허리에서 짧고 날씬한 칼을 뽑아 돌리면서 칼날을 들여다보았다.

“그래야 누구 한 명이 끌려가서 고문당해도 피해가 제한적이니.”

랜돌프는 단검을 뽑으며 통로 옆의 벽에 몸을 붙였다. 그런 그에게 아라는 흘깃 시선을 던졌다.

“저놈이 뭘 데리고 올지 알 수가 없어.”

랜돌프는 통로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런 곳에선 아무도 믿어선 안 된다.”

그 말에 아라는 랜돌프를 곁눈으로 보며 작게 코웃음을 쳤다. 침묵 속에서 지카리가 입을 열었다.

“이곳은 여태까지 가봤던 곳 중에 가장 불쾌한 곳이군…”

아라는 누그러진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인간 도시에는 아마도 처음이시겠지요.”

지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인간들의 도시가 이렇지는 않길 바라네.”

“적어도 안힐라스에서는 좀 무리일 것 같군요.”

크세노바가 한숨을 쉬었다.

“이곳보다 정돈된 곳이라고 덜하지는 않습니다.”

아라도 덧붙였다.

“동쪽에 뉴 임페리얼은…”

무심코 말하다가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통로를 따라 발걸음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허허허, 이거 손님들이 벌써 오셨군요.”

호탕한 웃음소리가 통로에 울리더니 인간 남자 하나가 방안으로 걸어나왔다. 중키에 넉넉한 체구인 그는 벗겨진 머리에 눈가에는
웃음자국인 듯 주름이 지고 주먹코 밑에는 두터운 입술이 싱글벙글 웃음짓고 있었다. 둥근 배는 입은 앞치마를 밀어내며 불룩 나와있었고,
손에는 장갑을 끼고 있는 것이 마치 요리하다 나온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앞치마에 묻은 선혈은 무슨 요리인지 심각한 의구심을
불러일으켰지만. 아라는 칼을 느슨하게 쥔 채 그를 흥미롭게 보았다.

“으음…?”

크세노바의 시선에 앞치마 입은 남자는 잠시 어리둥절하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아 이거 실례. 취미생활을 하던 중이었거든요.”

그는 자신의 배를 철썩 쳐 뱃살을 튕겼다.

“고기라도 손질하시던 모양입니다?”

크세노바가 묻자 뚱뚱한 남자는 즐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고기죠. 물론 살아있는 사람고기긴 합니다만.”

그말에 랜돌프는 눈을 치켜뜨며 단검을 쳐들었다. 막 악수하려고 장갑을 벗으며 크세노바에게 다가가던 사람고기 요리사는 그 모습을
곁눈으로 보고 양손을 쳐들며 움츠러들었다.

“걱정마라, 다사케타.”

아라는 재밌다는 듯 여전히 벽에 기댄 채 손안에 칼을 돌렸다.

“네 고기는 아무도 안 먹을 테니.”

“설마 농담이시겠죠.”

질린 표정으로 랜돌프를 보며 크세노바가 말했다.

“어허허, 좀 진정하는게 어떻겠습니까. 다 같은 편인데.”

뚱뚱한 남자는 애써 웃어보였다. 벗겨진 머리에는 땀방울이 맺혔다.

“장난은 관두는 게 좋을 거다.”

어둑한 조명 속에 랜돌프가 씨익 웃자 그의 이빨과 눈 흰자가 희번득거렸다.

“목이 날아가고 싶진 않겠지. 나에겐 별 의미 없지만 당신에겐 소중한 물건일 것 아닌가?”

“바쁜 게 아니라면 복식 좀 차리고 다니시죠.”

크세노바는 남자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저런 양반에게 칼 맞으면 어디가서 하소연이라도 하겠습니까.”

“허허허…”

그 말에 중년의 남자는 멋쩍게 웃었다.

“사냥개에게 죽었다가는 부끄러워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니겠지.”

벽에 기댄 아라가 맞장구쳤다.
크세노바는 푸욱.. 한숨을 쉬었다.

“일 이야기나 하죠.”

랜돌프는 피식 웃으며 칼을 집어넣고 의자로 걸어가더니, 다리를 크게 벌린 채 의자에서 반쯤 흘러내린
방만한 자세로 앉았다.

“전 제임스입니다.”

남자는 랜돌프를 불안하게 흘끔거리며 웃었다.

“경황중이라 죄송하게 되었군요.”

그가 앞치마를 옆의 벽에 튀어나온 못에 걸자 묻은 피가 방울방울 바닥에 떨어졌다. 그때 다시 통로에서 조용한 발걸음이 들리더니
사람이 또 하나 걸어나왔다. 칠흑처럼 유난히 검은 피부에 흰 머리, 뾰족하고 긴 귀와 마르면서 강인한 체격의 여인은 통로 문간에서 날카롭고 묵묵한 시선으로 방을 둘러보았다.

같은 다크엘프를 보고 아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에게 시선을 집중했지만, 여인은 그녀를 다시 쳐다보지 않았다. 잠시 망설이다가
아라가 입을 열자 흐르는 듯 부드러우면서도 그 흐름이 가끔 거친 파열음에 끊어지는 말이 나왔다. 다크엘프는 그녀의 말에 쳐다는
보았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 서서 둘을 번갈아 보다가 제임스가 말했다.

“이쪽은 콰…켈….뭐였더라?”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이 친구 말을 못합니다, 아가씨.”

아라의 의아한 시선에 그는 부연했다.

“오래전에 충격을 받을만한 일이 있어서 말을 잃었다더군요. 저도 그 이상은 모릅니다만. 허허..”

제임스가 의자에 주저앉자 의자는 비명을 지르듯 삐걱거렸다. 갑자기 그는 머리를 탁 쳤다.

“아 그래. 이름이 켈냐였지!”

그 이름에 아라는 시선이 바로 여인에게 못박혔다. 손에서 힘이 풀렸는지 들고 있던 칼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켈냐…”

랜돌프가 한쪽 눈썹을 꿈틀하는 사이 제임스는 놀라서 입을 벌렸다.

“어허허? 아시는 사이입니까?”

아라는 켈냐라는 여인에게 한 발짝 다가서며 다시 그 파열음과 부드러운 흐름이 교차하는 언어로 말을 걸었다. 켈냐는 무심한 시선이
잠시 아라에게 머물렀다가 다시 외면했다. 살짝 목례한 아라는 다시 벽에 기대며 일행을 마주했다. 제임스는 헛기침을 하며 크세노바를
돌아보았다.

“감동의 재회가 원래 이런 겁니까?”

“감동도 주변환경이 받쳐줘야 그림이 나오죠.”

크세노바는 한심하다는 듯 제임스의 피묻은 장갑과 옷에 시선을 던졌다.

“지금은… 마법사 말대로 일 얘기를 하자꾸나.”

아라는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켈냐는 그런 그녀를 잠시 보다가 돌아서서 다시 통로 안쪽으로 사라졌고,
아라는 일부러 통로에 눈길을 주지 않고 명령하듯 말했다.

“사람 고기 정육은 다 했다면 흑마법사 이야기를 하도록.”

“아, 그렇죠. 흑마법사 얘기 말입니까.”

제임스는 손을 깍지껴 넉넉한 배 위에 얹으며 뭔가 어울리지 않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흐음… 저희도 상부에서 얘기를 듣기 전에는 단순히 소문으로 치부했던 정도라 그게…”

그는 벗겨진 머리를 긁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전문을 받은 뒤에 그제서야 그 소문들이 어느정도 신빙성이 있단 사실을 알았죠, 흠흠.”

“뭐라도 좋다.”

랜돌프는 몸을 앞으로 숙이며 말했다.

“그 개새끼에 관한 이야기라면 뜬구름잡는 작은 소문이어도 좋아.”

“경망떨지 말거라.”

아라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조사한 결과는 어떠한가?”

제임스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 그녀는 한쪽 무릎을 굽혀서 칼을 집어들고 일어섰다. 칼날을 어루만지면서 그를 보는 눈빛은
날카로웠다.

“그자가 이 도시에 있는가?”

“저희쪽도 손이 부족해 조사는 많이 못했지만, 그 자라면 그 그…”

“멜코 생고로드림.”

아라는 이를 악문 채 말했다.

“아 그랬지, 그랬소. 멜코르 상고로드림인지 뭔지 하는 놈이라면…”

제임스는 아라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자면 모르겠소.”

“뭐?”

아라는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이 도시에 있다는 풍문이 맞긴 한가?”

랜디가 캐물었다.

“흑마법사들이 있다는건 신빙성 높은 얘기요.”

제임스가 그에게 대답했다.

“노예들이 정기적으로 어디론가 팔려가 소식이 끊긴다거나, 로브 입은 자들이 돌아다닌다거나 하는 소문이 있소.”

“그렇다면 그의 제자는 있을 수 있다는 것인가.”

아라는 손에 든 검에 시선을 떨구었다.

“됐다. 그럼 잡을수 있어.”

랜돌프는 등을 기대며 느긋하게 앉았다.

“어디 있는지도 특정해낼 수 있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툭 던지듯 물었다.

“아는 노예상인 있나?”

“노예상인은 아니지만 유명인사 한 명…”

제임스는 턱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리고 당장 코앞의 ‘아는’ 노예상인이 하나 있는데 어디로 하시겠소?”

“둘다 얘기하거라.”

아라가 말했다.

“선택은 우리가 하지.”

“그럼 일단 따라오시오.”

제임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쪽은 현재진행형으로 정보를 캐내고 있던 중이었으니 말이오.”

“설마…”

제임스가 피묻은 앞치마를 집어드는 것을 보며 아라는 눈쌀을 찌푸렸다.

“말했잖소.”

제임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코앞에 ‘아는’ 노예상인이 있다고 말이오.”

“노예상인… 그렇다면 조금은 낫다만.”

그러나 아라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제임스가 앞치마를 집어들고 통로 안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랜돌프가 어깨를 으쓱하며 따라나서자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따라갔고, 크세노바와 지카리가 뒤를 따랐다. 몇 발짝 들어가 제임스는 방에서 흘러드는 약한 빛에 의지해
벽감에 세워둔 초에 불을 켠 후 촛대째 집어들고 앞장섰다.

촛불빛에 흔들리는 통로는 들어갈 수록 더욱 춥고 습해졌고, 곰팡이와 쥐, 그리고 그 이상으로 뭔가 불길한 냄새가 났다. 제임스가
문득 멈춰서며 걸음을 조심하라고 경고했고, 그가 높이 쳐든 촛불과 은은히 빛나며 내려가는 그의 대머리에 의지해 일행은
좁고 가파른 계단을 일렬로 천천히 내려갔다.

거의 내려와 눈앞에 묵직한 떡갈나무 문이 어둑한 조명 속에 드러난 순간, 정면에서 들려오는 비명이 공기를 갈랐다. 문 때문에
소리는 귀를 막고 듣는 듯 작았지만 그 완전하고 통제 없는 공포까지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라는 축축한 벽에 손을 대며 흠칫
멈춰섰고, 그녀의 뒤로 따라오던 크세노바도 멈춰야 했다.

계단을 다 내려온 제임스는 촛대를 다른 벽감에 얹어놓더니 휘파람을 불며 피묻은 앞치마를 걸쳤다. 아라 뒤편에서 크세노바는 축축한
지하실을 둘러보며 청소세탁 주문이라도 배울 걸 그랬다고 중얼거렸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아라의 목소리가 살짝 떨려나왔다.

“저런 치들은 돈만 몇 푼 쥐어주어도 입을 열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 물론 그렇기도 하오만…”

제임스는 태연히 장갑을 당겨 고정시켰다.

“가끔 도를 넘는 인간말종들은 손을 봐줘야 하지 않겠소.”

아라가 딱히 대답을 못하는 동안 제임스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습기에 경첩이 녹슬었는지 문이 불평하듯 신음하며 열리자 피비린내가
통로에까지 확 끼쳐왔다. 벽에 타닥거리는 횃불빛 속에 문 반대편 벽에는 상처가 몇 개인지 분간도 못할 정도로 짓무른 상처와 선혈과
피딱지 투성이인, 평범한 체격에 둥근 얼굴의 남자가 반라 상태로 십자형 틀에 묶여 있었다. 기절한 듯 눈을 감은 채 축 늘어진
그의 한쪽 다리는 부러진 듯 기묘한 각도로 꺾였고, 힘겨운 숨소리는 액체가 걸리는 듯 그륵거리며 방안에 울렸다. 그 앞에는 끝이
붉게 빛나는 인두를 든 켈냐가 서있었다. 그녀 옆에는 화로에 달군 석탄이 창을 맞은 짐승처럼 인두 두어 개를 꽂은 채 벌겋게 무딘
빛을 품었다.

랜돌프는 길게 휘파람을 불더니 제임스를 따라 망설임 없이 들어갔다.

“먹음직하게 요리되고 있는 걸?”

”…이 도시가 얼마나 엉망인지 알 만하군요.”

희미한 조명 속에 크세노바는 잔뜩 얼굴을 찌푸리며 아라를 지나 감방 안으로 한 발짝 들어섰다. 뒤에 지카리가 돌처럼 굳어있는
동안 아라는 크게 부릅뜬 눈을 그 광경에서 떼지 못했다.

제임스가 바닥에서 물동이를 하나 들어 포로의 얼굴에 확 끼얹자 그는 간신히 눈꺼풀만 움찔거렸다.

“어이 친구.”

제임스가 그런 포로의 뺨을 장갑낀 손으로 툭툭 치자 그는 눈을 퍼뜩 뜨며 놀랐다. 절박한 시선은 감방을 한 번 둘러보고 다시
체념에 잠겼다.

“이분들이 흑마법사에 대해 묻고 싶으신 게 있는데 말이야.”

제임스는 장갑낀 손의 손마디를 두둑거렸다.

“자네 그쪽에도 납품한 적이 있지?”

“으으으…”

남자는 피투성이로 뭉개진 얼굴에 눈만 희번득거리며 피투성이 입을 열었다.

“흐마법사… 모라…”

“모른다고?”

제임스가 부드럽게 말하는 것만으로도 남자는 퍼뜩 놀라더니 고개를 마구 저으며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질러냈다. 이윽고 그 속에서
‘로브! 로브!’ 하는 소리를 분간할 수 있었다.

“로브를 입었다고?”

서두르는 기색 없는 제임스의 말에 남자는 살았다는 듯 끄덕이며 간신히 진정했다.

“여자… 로브…”

포로의 목소리에는 흐느낌이 섞여들었다.

“거애거… 거… 거래하자고…”

제임스가 달래고 협박해가며 이야기를 끌어내는 데는 한참 걸렸지만, 로브 입은 여자가 제안해온 거래대로 정기적으로 항구 근처의
창고에 노예들을 갖다놓으면 다음날 노예는 없고 대금만 남아있더라는 얘기를 마침내 들을 수 있었다.

“그렇지…”

랜돌프는 생각에 잠긴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납품받을 리가 없겠지.”

그는 문간으로 몸을 돌렸다.

“오늘 들어온 노예들 가운데서도 페어리들이 있었다. 그 창고…”

그는 바깥쪽으로 턱짓을 했다.

“오늘도 체크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같은 업자인지 어떻게 아느냐.”

포로를 일부러 쳐다보지 않고 있는 아라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음 아뇨. 일리가 있습니다. 흑마법사니까요.”

크세노바가 말했다.

“어떻게든 페어리들을 손에 넣으려고 하지 않을까요.”

그가 잠시 뭔가 중얼거리자 공중에 희미하게 빛나는 기하학적 문양이 나타났다.

“이걸 본 적이 있습니까?”

눈을 게슴츠레 뜨고 그 문양을 보다가 노예상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임스는 그에게 몸을 기울이며 얼굴을 들이댔다.

“어디서 봤냐?”

노예상이 뭐라고 더듬거리자 제임스는 무심히 주먹을 날렸고, 노예상은 고개가 휙 돌아가면서 공중에 핏방울을 날렸다. 아라는 그
모습에서 시선을 돌렸다.

“어디서 봤냐니까 이 친구가…”

포로가 쉴새없이 더듬더듬, 횡설수설 털어놓은 바에 따르면 그 로브 입은 여자의 손등에서 문양을 보았다고 했다.

“으음… 도제인가.”

크세노바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임스는 한쪽 팔을 넉넉한 배에 가로질러 얹은 채 다른 손으로 턱을 쓰다듬더니 말했다.

“그렇다면 칼로 데 로씨를 만나보는 건 어떻소?”

“칼로 데 로씨?”

문간에 서서 아라가 되물었다.

“이 도시의 유명한 양반이지. 노스텔지아 소속은 아니오만…”

제임스는 턱을 쓰다듬던 손을 들어 손짓했다.

“우리가 노예 구출하는 데 가끔씩 도움을 주는 고마운 양반이오.”

그는 양쪽 팔을 배 위에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이 도시의 왕초나 다름없으니 흑마법사들에 대해서도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소. 원한다면 만남을 주선해 주겠소만.”

“칼로 데 로씨라고?”

랜돌프는 얼굴을 찌푸렸다.

“난 거기 갔다간 죽을 수도 있는데. 별로 가고싶지 않군.”

“만나보는 게 좋겠구나.”

랜돌프를 흘깃 보고 아라는 엷게 미소지었다.

“제기랄… 그놈에게 걸려서 횡사한 노예사냥꾼이 몇 명인지 셀 수도 없다는 풍문이다.”

그는 안절부절 못하며 머리를 뒤로 쓸어넘겼다.

“너야 괜찮지 않겠느냐, 그렇게도 유능하니.”

아라는 눈썹을 치켜들었다.

“역시 겁이 나는 것이냐?”

“뭐 소문일 뿐이긴 하지.”

랜돌프는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나도 실제로 보거나, 그놈에게 당한 자를 만나본 적은 없어.”

노예상에게 창고번호와 납기일을 알아낸 제임스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들에게 몸을 돌렸다.

“다음 납기일은 5일 후라고 하는군. 창고번호는 적어주겠소.”

아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까지는 시간이 있으니 마법사를 수소문하면서 칼로 데 로씨를 만나보자.”

나머지 사람들을 한 번 둘러본 후 그녀는 돌아섰다.

“나는 나가야겠다. 이 냄새는 짜증이 나는구나.”

아라는 지카리가 비켜주는 틈새로 빠져나가더니 벽감의 촛대를 건드리지 않고 층계를 올라갔다. 표정 없이 방안을 한 번 보고는
지카리도 돌아서서 그녀를 따랐다.

“그럼 나머지도 부탁합니다, 제임스.”

다시 정신을 잃은 듯한 노예상을 불편하게 보고 크세노바는 벽감의 촛대를 들고 올라갔다. 랜돌프는 씩 웃고는 촛불빛을 따라갔다.
뒤로는 다크엘프 여인 켈냐가 문을 밀어 닫자 육중한 소리와 함께 횃불과 석탄의 붉은 빛이 사라졌다.

지상의 방은 통로에 비해 눈이 부시도록 밝았다. 아라는 숨을 내쉬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고, 지카리는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그녀 맞은편에 앉았다. 의자가 살짝 삐걱거리기는 했지만 버텨주었다. 잠시 탁자를 내려다보고 있던 아라는 고개를 들었다.

“괜찮으십니까, 지카리공.”

”…이곳의 방식은 마음에 들지 않네.”

지카리는 탁자 위에 깍지낀 커다란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를 보는 아라의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녀는 피곤하게 이마를 손으로
문질렀다.

“저도 그렇습니다.”

“사실 제임스라는 자도 우리가 쫓는 자와 다를 바는 없지 않겠는가?”

“유쾌하지는 않아도 필요한 작자 아니겠습니까.”

그녀는 달래듯 말했다. 그때 통로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크세노바와 랜돌프가 들어왔다.

“웃기는군.”

랜돌프는 툭 내뱉으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라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에게서 의자를 조금 물렸다. 크세노바는 그런 둘을 보고
한숨을 쉬며 남는 의자에 조용히 앉았다.

“그럼 노스탤지어랑 인간놈들은 다를게 뭐지?”

지카리가 그런 랜돌프를 흥미롭게 보는 동안 랜돌프는 말을 이었다.

“어차피 세상사엔 옳고 그름이 없어. 각자의 입장이 있을 뿐이지.”

노예사냥꾼은 단검을 슥 꺼내 날을 따라 빛이 흐르도록 기울였다.

“노스탤지어는 옳고, 인간놈들은 틀리다는거냐? 난 그렇게 생각 안해.”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네.”

지카리는 조용히 말했다.

“너희들은 정의의 사도니 옳은편에 서있다느니…”

단검날에 비친 자기 얼굴을 잠시 보다가 랜돌프는 칼을 집어넣었다.

“그런 생각인 거 같은데 그거 웃긴다고.”

“그러면 너는?”

지카리가 미소짓는 동안 아라는 받아쳤다.

“나? 나는 살기 위해 움직인다. 간단하잖아?”

의자를 뒤로 까딱 젖히며 랜돌프는 삐딱한 웃음을 지어보았다.

“신념에 따라 움직이는 놈들은 그게 깨지면 아무것도 못해.”

“그렇다면 페어리의 작은 목숨을 위해 열내는 것은 어째서인가?”

아라는 왼손을 느슨하게 주먹쥐어 탁자에 얹고 오른팔은 의자 팔걸이에 걸친 채 그런 랜돌프를 쏘아보았다.

“페어리를 위하는 것은 너의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은데.”

“그 녀석들은…”

랜돌프는 젖혔던 의자 앞다리를 바닥에 내렸다. 아라는 바로 말을 이었다.

“생존을 위해서 엘프 여자들을 납치해서 강간하고 팔아넘겼다고 할 테냐?”

탁자에 얹은 그녀의 왼손은 점점 주먹을 꼭 쥐었다.

“그 이전에는 늘 굶었느냐, 다사케타?”

“아니. 뭐 뒷골목에서 썩은음식을 가지고 죽고 죽이고 했지만…”

뭔가 떨쳐버리듯 랜돌프는 고개를 저었다.

“그럭저럭 살아갈 수야 있었지.”

“결국 너는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너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인 것 아니느냐.”

“그렇다. 그래서?”

랜돌프는 피식 웃었다.

“그러므로, 너같은 놈에게 옳고 그름을 따지는 짓은 안할 테니 우리에게 설교하지도 말거라.”

그녀는 그를 향해 몸을 기울이며 반쯤 일어섰다.

“노예는 노예답게 입 다물고 따르면 되는 것이다.”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는 아라의 목소리는 속삭임에 가까웠다.

“아니면 죽거나.”

두 사람이 똑바로 마주보는 동안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랜돌프가 입을 열었다.

“난 노스탤지어 놈들이 마음에 들어.”

아라와 시선을 맞춘 채 그는 히죽 웃음지었다.

“점점 더 그렇군.”

아라는 음식에 기어다니는 벌레를 보는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더니 의자를 거칠게 밀치며 일어섰다. 문 옆의 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그녀가 기대서는 동안 지카리가 말했다.

“랜돌프.”

“왜?”

“나는 내가 가는 길이 옳은 길이라고 말하지는 않네.”

지카리의 눈빛은 슬프면서도 따뜻했고,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그저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 일은 막으려고 할 뿐이야.”

그가 말하는 동안 랜돌프는 표정 없이 그를 마주보았다.

“자네도 그러리라고 생각하네. 옳고 그름이나 이유는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지.”

“그래, 비슷하지.”

랜돌프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옳네 그르네 까불지 말고 날 막고 싶으면 힘으로 찍어눌러보라는 거다.”

그는 지카리보다도 방 건너편에 있는 아라에게 말하듯 언성을 높였다. 아라는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은 채 팔짱을 끼고 허공을
노려보았다.

통로에서 가벼운 발걸음이 들려왔다. 제임스가 아닌 켈냐가 방으로 나오더니 종이쪽지 하나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세 남자는 일제히
쪽지를 들여다보았지만, 지카리는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러났고 랜돌프는 대충 훑어보고는 뒤로 등을 털썩 기댔다. 크세노바는
쪽지를 보며 말했다.

“제임스씨의 손님은 이번에 페어리 거래는 안하는 모양이지만, 거래하는 곳 정보는 있군요.”

그는 가늘고 흰 손을 뻗어 다른 종이를 들추었다.

“이쪽은 칼로 데 로씨에게 주는 소개장입니다.”

“그러면 시장에 나가보자꾸나.”

아라는 벽에서 떨어져서 바로 섰다.

“마법사도 있으니 마정석 재료를 알아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녀는 크세노바를 무표정하게 보았다.

“뭐 저 혼자 만들수도 없는 거긴 하지만..”

크세노바는 우아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나가보는 것도 좋겠죠.”

“움직여볼까 그럼…”

랜돌프가 포식자의 느긋한 우아함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조용히 있던 켈냐가 움직여 문가의 아라에게 다가갔다. 아라는 그런 그녀를
궁금하게, 조금은 경계하며 보았다.

아라 앞에 선 켈냐는 갑자기 무릎을 꿇고 아라의 손을 잡아 손등에 입맞추었다. 아라는 놀라서 잠시 굳었다가 그들의 모국어로
안쓰럽게 뭔가 말하며 켈냐를 일으키려 했다. 켈냐는 주머니에서 목걸이를 하나 꺼내 아라의 손에 쥐어주고는 일어서서 정중히
목례했다. 멍해진 아라가 채 반응하기도 전에 켈냐는 다시 통로를 따라 사라져 있었다.

“먼저 가보거라.”

아라는 손에 쥔 목걸이를 내려다보다가 차분하게 말했다. 동료들이 나가는 동안 그녀는 목걸이에 소중하게 입맞추고 목에 걸어 옷 속에
감추었다. 그녀가 탁자에 앉아 빈 종이와 깃털펜을 집어드는 모습을 돌아보고 랜돌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등뒤로 문을 닫았다.

소감

이 부분은 플레이 중에 프리포트라는 도시의 분위기, 그리고 이 싸움 속의 부조리하고 역설적인 상황이 잘 드러난 대목이었죠. 고문에 대한 인물들의 반응이 하나하나 재밌었던 기억이 납니다. 한편 랜디와 아라는 싸우는 척(?) 하면서 서로 꼬시는 것 같은 인상이(..) 이방인님하고 논의한 결과 이런 암시는 나중에 둘의 관계를 통해 살려보기로 했죠. 아라 입장에서는 이 도시에 온 이래 내내 어쩔 줄 모르다가 자신이 무엇을 하면 좋을지 일거에 정리가 된 계기이기도 합니다. 여전히 갈등은 있겠지만요.

인물 표현을 묘사를 통해 해보려고 나름 외부 관찰자 시점을 사용했는데, 이 관찰자는 인간 언어만 알고 다크엘프어는 모르는 모양입니다. 약간 전지적인 느낌도 있는 등 애매한 시점이었지만 표현하려는 바는 그럭저럭 전달이 된 것 같습니다. 졸린 관계로(..) 나머지는 내일 올리지요.

이오닉스 3화 (1): 프리포트 도착

3월 21일에 한 3화 플레이입니다. (와 많이 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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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포트로 가는 길은 척박한 검은 풍경이었다. 살아있는 것이라고는 가끔 거친 풀과 키작은 나무, 그리고 그 속에 숨은 작은 짐승과
새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검은 땅을 그들은 터벅터벅 걸어갔다.

“지루한 곳이군.”

사냥꾼 랜돌프 에디우스는 기지개를 켜며 걸음을 옮겼다.

“당신네들 하는 식으로 한번에 이동해버리면 안 되나?”

아라가 코웃음을 치는 동안 크세노바가 말했다.

“프리포트로 그렇게 갔다가는 눈에 너무 띄겠지요. 에미넴 남쪽까지는 그래도 이동하지 않았습니까.”

“순간이동은 별로 마음에 안 들지만, 이런 때는 좀 아쉽긴 하군요.”

혼잣말처럼 말하던 아스타틴은 황량한 풍경을 돌아보다가 왼편의 나지막한 언덕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이쪽입니다.”

“또 방향을 바꾸는 건가?”

그를 따르면서도 랜돌프는 눈쌀을 찌푸렸다.

“정말 헤매지 않겠어?”

“오는 방향을 위장해야 하니까요.”

말하면서 아스타틴은 주변을 확인했다.

“프리포트는 저쪽입니다.”

그는 아무 망설임 없이 검고 황량한 풍경 중 별반 달라보이지도 않는 방향을 가리켰다.

“길찾는 머리가 대단하군.”

지카리는 감탄한 목소리였다.

“난 전혀 모르겠는데 말이네.”

아스타틴은 미소짓지는 않았지만, 지카리를 잠시 돌아보는 눈빛에는 감사가 담겨있었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 아스타틴의 인도를 따라 그들은 동쪽으로 향하는, 가볍게 난 수레바퀴 자국 정도밖에 되지 않는 길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아스타틴이 의도적으로 인적이 없는 곳에서 길에 접어든 듯 근 한 시간 동안 사람 그림자도 못 보고 걸어가는 동안 길의
흔적은 더욱 뚜렷해졌다. 수레바퀴 자국은 더 깊어졌고, 사람과 짐승의 최근 흔적도 슬슬 보였다.

길을 구획지으려고 깔아놓은 거친 돌이나 조잡한 표지판이 눈에 띌 때쯤 드디어 다른 여행자들이 보였다. 노새가 끄는 수레에 냄비와
옷가지 등 잡동사니를 가득 실은 상인이 그들 뒤에서 나타나 따라잡더니 앞으로 멀어져갔고,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용병인 듯한 거친
사내들이 갈림길에서 진입해 시끄럽게 웃고 떠들며 걸어갔다.

노스탤지아 일행을 흘깃 쳐다본 용병들이 본 것은 유달리 건장한 근육질의 남자, 약간 예쁘장한 금발 청년, 피부가 검은 무표정한
여자와 한 명은 거칠고 사나운 인상, 다른 하나는 여자처럼 여리여리한 두 젊은 남자였다. 용병들은 자기들끼리 수근거리며 약간의
관심을 표시했지만, 일행의 무장상태와 랜돌프가 단검에 무심히 손을 얹는 모습을 보고는 그냥 지나갔다.

“들개 같은 놈들이지.”

그런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랜돌프가 낮게 말했다.

“약점을 보이는 상대가 아니면 덤비지 않아.”

그의 눈빛은 불쾌하기는커녕 즐거워 보였다. 히죽 웃는 웃음에는 애정마저 어렸다.

해가 중천에 떴을 때 그들은 나지막한 언덕 꼭대기에서 바닷가 도시를 굽어보고 있었다. 대충 쌓은 석축으로 둘러놓은 도시는 돌이나
나무, 벽돌 건물과 작은 움막들이 아무 법칙이나 구조도 없이 다닥다닥 붙은 채 성벽에까지 닿았고, 도시를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인
벽을 넘어 주변의 판자집과 천막촌으로 무질서하게 퍼져나갔다. 앞바다라고 할 만한 것은 배가 두세 척 나란히 드나들 만한 틈새만
남기고 앞을 병풍처럼 둘러친 절벽과 해안 사이의 넓지 않은 공간이었다. 이 앞바다에는 범선부터 보트까지 각양각색의 배들이 발디딜 틈
없이 서로 붙어 웅크려 있었다. 항구에는 움직이 활발했고, 도시의 길과 건물에도 사람과 탈것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인간들의 도시인가…”

그런 프리포트를 내려다보는 아라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아스타틴은 그런 그녀를 흘깃 보고 말했다.

“가죠.”

아스타틴을 따라 일행은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사람과 수레가 계속 오가는 길에 저 앞에서 수레가 다가오자 일행은 옆으로
비켜주었다. 그러다가 수레의 내용물이 눈에 들어자 지카리는 눈에 띄게 흠칫 놀랐다. 서로, 그리고 수레 바닥에 묶인 채 묵묵히
수레 발밑만 내려다보는 드워프와 엘프들은 일행이 얼어서 지켜보는 동안 덜컹덜컹 흔들리며 지나갔다.

“보고를 듣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지카리는 신음하듯 말했다.

“인간들이라는 게 그렇죠.”

아스타틴은 멀어져가는 수레에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아라는 굳고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언덕을 척척 걸어내려갔다. 이윽고 길이
북쪽으로 갈라지는 지점에서 그는 일행에게 돌아섰다.

“여기서부터는 찾아가실 수 있겠죠?”

그는 등뒤에 멀리 보이는 프리포트를 돌아보았다.

“그럼.”

그가 다른 길로 접어들자 지카리가 불렀다.

“아스타틴.”

아스타틴이 멈추며 돌아보자 지카리는 말을 이었다.

“조심하게. 내일 보세나.”

“예.”

아스타틴은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일행에게 인사하고 그는 북쪽 길로 혼자 향했다. 나머지 일행은 다시 프리포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프리포트에 가까워지면서 주변의 광경은 더욱 비참해졌다. 마침내 검문소 앞에 줄을 섰을 때 주변에는 어디에나 노예를 볼 수 있었다.
서로 목이 묶인 채 일렬로 서서 끌려가는 엘프와 엘프 혼혈의 행렬, 페어리가 여럿씩 든 조롱을 쌓아놓은 수레, 말에 묶여 끌려온
기색이 역력한, 지쳐서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 드워프… 그들의 탄식과 비명이 공중을 메웠지만,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이들의 눈빛이었다. 완전히 포기한 채 아무것도 보지 않는 공허한 시선은 지울 수 없는 잔상이 되어 눈에, 가슴에
남았다.

아무말 없이 지켜보기만 하던 아라가 갑자기 움직이며 활에 손을 뻗었다. 랜돌프는 그 모습을 보고 그녀의 손을 탁 쳐냈다. 그녀가
눈을 부릅뜨고 돌아보자 그는 이를 드러내며 속삭였다.

“움직이게 되더라도 나중이다.”

아라는 잠시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깨가 격한 호흡에 잠시 들썩거리던 그녀는 이윽고 확 돌아서며 주변의 모습을 외면했다.

“일이 우선이죠.”

주변의 광경을 아프게 보고 있던 크세노바가 달래듯 말하자, 아라는 여전히 돌아선 채 대답했다.

“우리 일이 무엇이란 말이냐.”

“임무? 웃기네.”

랜돌프는 양옆으로 목을 투둑투둑 풀었다.

“난 저녀석들을 빼내야겠어.”

그의 시선은 페어리 조롱이 가득 든 수레에 향했다.

“옛 동업자들에게 칼을 들다니, 재미있구나.”

아라마저 그 말에는 돌아보았다.

“아니면 갑자기 인도주의자가 되었다는 핑계로 배신할 생각이냐?”

“동업자…? 난 혼자 움직였다, 언제나.”

랜돌프는 코웃음을 쳤다.

“난 하고싶은 대로 움직인다.”

“여기서 지금?”

짧게 깎은 머리털 때문에 사각턱이 돋보이는 머리를 돌려 지카리가 랜돌프를 바라보자 굵은 목에 힘줄이 섰다. 인간 모습일 때도
여전한 연녹색 눈을 빛내는 지카리에게 랜돌프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움직이는게 무리라는 뜻이었지. 도시에 들어가고 나면 바로 움직일 거다.”

크세노바가 지카리와 랜돌프를 불안하게 보는 동안 줄은 터벅터벅 움직여 그들은 석벽의 입구를 지키는 초소 앞에 섰다. 검문소를
지키는 남자들은 서로 갑옷이나 무기, 심지어는 옷도 제각기 달랐고, 심지어는 한 사람이 입은 갑옷도 여기저기서 닥치는 대로 구한 듯
짝이 맞지 않는 것도 있었다. 가슴에는 모두 주황색 바탕에 검은 절벽 위에 앉은 바다새의 윤곽을 그린 문장을 하고 있었지만, 그
외에는 같은 소속이라는 표시라고는 없었다.

머리에 잘 맞지 않는 투구를 눌러쓴 남자가 초소 앞에 건성으로 서있다가 그들이 다가오자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외지인 냄새가 물씬 나는디, 다들 어디서 오셨수?”

“노예 사냥꾼이다.”

랜돌프가 망설임 없이 대답하자 아라는 이를 악무느라 턱이 떨렸다.

“도망친 노예를 뒤쫓고 있다.”

그 목소리에 다른 경비가 눈을 가늘게 뜨고 처음에 말한 경비의 어깨 너머로 랜돌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음…잠깐, 어디서 많이 봤는데…”

랜돌프는 긴장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방향으로든 움직일 수 있는 유연한 경계를 유지한 채 경비를 마주보았다. 이윽고 경비는 손뼉을
쳤다.

“오오! 그 유명한 엘프사냥꾼이시로구만!”

“나를 아시오?”

랜돌프는 미세하게 앞으로 옮겼던 무게중심을 뒤로 편안하게 기대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노예시장에 와본 적이 있나보지?”

“이거 오랜만이군! 반갑소,”

경비가 동료 뒤에서 나와 악수를 청하자 랜돌프는 가볍게 맞잡았다. 그런 그를 지카리는 살짝 찌푸리며 쳐다보았다.

“그러면 데리고 온 건 노예…가 아니구만.”

경비는 아마 습관적인 듯 아라에게 음흉한 웃음을 짓고는 랜돌프와 일행을 가볍게 훑어보았다.

“통행세만 내고 들어가보쇼.”

경비병이 다음 사람에게 손짓을 해 줄을 움직이는 동안 랜돌프는 동전 몇 닢을 다른 경비에게 떨구어주고 동행들에게 고갯짓을 했다.
그를 따라 그들은 빠른 걸음으로 성문을 통과해 프리포트의 북적거리는 거리에 오가는 인파와 수레, 짐승의 행렬에 섞여들었다.

“알고 보니 유명했군요.”

크세노바가 별 감정 없이 말했다.

”…노예사냥꾼인 줄은 몰랐군.”

랜돌프를 보는 지카리의 눈빛은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범죄집단 내에서나 그렇지. 경비병이 얼굴 알아보는건 처음이야.”

랜돌프는 약간 신경질적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곳이야, 여기는?”

“지금은 노예사냥꾼이 아니길 바라네.”

지카리는 서늘한 눈빛으로 말하며 랜돌프를 지나쳐 걸어갔다. 인간 모습일 때도 유달리 키가 큰 그의 그림자가 순간적으로 랜디를
완전히 덮었다.

“호랑이는 줄무늬를 못 바꾸는 법이죠.”

아라는 랜돌프를 쳐다보지 않고 지카리에게 툭 던지듯 말했다.

“호랑이나 그렇죠. 인간은 염색이든 뭐든… 그나저나…”

크세노바는 프리포트의 복잡하게 꼬인 거리를 혼란스럽게 살폈다. 간격이나 넓이가 들쑥날쑥한 골목과 거리는 서로 복잡하게 얽히면서
방향이 이리저리 구부러졌고, 원래 하나였던 길이 둘로 갈라지는 등 쉽게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거리를 여섯 번 지나 우물이 있는 광장터라니, 이런 곳에서 이걸 접선책이라고 알려준 건가.”

“좀 웃기게 만들긴 했어도 아주 구분 못할 정도는 아니로군.”

거리를 몇 번 눈으로 살핀 랜돌프는 크세노바와는 달리 기준점을 찾아낸 듯 건물 사이로 여기저기 꼬이는 길의 몇 군데에 시선을
고정하더니 나머지 셋에게 짧게 손짓했다.

“따라와라. 6개의 거리라고 했지?”

“정말 이름대로 제멋대로인 도시로군요.”

척척 걸음을 옮기는 랜돌프를 따라가며 크세노바가 말했다. 지카리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따라가는 동안 일행은 사슬에 묶여
멍하니 길가에 선 채 서너 상인의 열띤 흥정의 대상이 된 드워프들을 지나쳤고, 옆에는 빼빼 마른 몸에 누더기를 걸친 아이들이
어디론가 달려갔다. 거리에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쓰레기를 돌아가면서 아라는 냄새에 얼굴을 찡그렸다.

“도시인데도 정글 냄새가 나는군.”

주변을 살피며 걸어가는 랜돌프의 입술에는 차가운 미소가 어렸다.

“난 왠지 이 도시가 마음에 드는데?”

“참으로 어울리는구나.”

아라는 주먹을 꽉 쥐면서 눈을 감더니 깊이 심호흡을 했다. 다시 눈을 뜨자 눈빛은 좀 더 냉정해져 있었지만, 표정은 여전히
싸늘하고 턱은 긴장해 있었다.

“웃어라. 그리고 기뻐해. 이런 도시라면 정말로 마음껏 움직일 수 있을 거다.”

그런 그녀를 흘깃 보고 랜디는 씩 웃었다.

“다 죽여버려도 모조리 나쁜놈이니 이거보다 좋은게 어디있냐 말이다.”

그 말에 아라는 즐거움 없이 웃음을 지어 고른 이를 드러냈고, 크세노바는 수긍하는 기색으로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그러지 않길 바라네.”

지카리가 타이르듯 나지막하게 말했다.

“지금 해야 할 일이 아니야.”

거리가 넓어지면서 그들은 탁 트인 공간으로 나왔다. 사방에는 큰 저택에서 움막까지 건물이 하늘의 가장자리에 들쭉날쭉한 윤곽을
그렸고, 서로 짝이 안 맞는 포장석을 대충 깔아놓은 땅 위에는 좌판과 수레를 펼쳐놓고 상인들이 냄비에서 음식과 무기까지 안 파는
것이 없었다. 그 혼잡 한가운데 돌로 주변을 쌓아놓고 도르레에 두레박을 매단 우물이 보였다.

“여기다.”

랜돌프가 말하는데 광장 저쪽에서 환호성이 울렸다. 나무 단상 앞에 사람이 우글우글 몰려있는 곳에는 주체할 수 없는 흥분이 전류처럼
흘렀다.

“분위기가 좀 이상한데요?”

말하면서 크세노바가 이끌리듯 다가가자 랜돌프도 그의 뒤를 따랐다.

“노래꾼인가?”

누가 단상 위에 서서 뭔가 열심히 말하며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는 모습을 보고 랜돌프가 중얼거렸다. 인파를 헤치고 다가가면서
단상에 선 남자가 하는 말이 들려왔다.

“자자! 이번에 갓 들어온 따끈따끈한 상품을 소개합니다!”

단상에 가까워오면서 남자의 발치에 자그마한 형체가 보였다. 사슬이 짤랑거리면서 햇살에 빛났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무려 그 희귀하다는…”

상인의 발치에 주저앉은 아이가 눈에 들어오자 아라는 눈이 커지면서 순간 숨을 멈추었다.

“엘프 소녀!!”

몰려든 인파는 그 말에 귀가 먹먹할 정도로 큰 함성을, 승리감과 욕망과 기대감의 뜨거운 열기를 프리포트의 하늘로 올려보냈다.
발목에 사슬을 찬 채 상인의 발치에 무릎 꿇은 소녀는 인간 기준으로는 12, 13세나 되었을까, 아직 어린아이처럼 가늘고 여린
몸에는 여인의 곡선이 갓 피어나기 시작했고, 멍하고 창백한 얼굴은 의욕이나 희망 같은 것이 남아있었더라면 겁에 질려있었을 것이다.

“비싸게 팔리겠군.”

시끄러운 와중에 랜돌프는 팔짱을 끼며 쓴웃음을 지었다.

“잘 알겠구나.”

무표정하게 소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아라는 중얼거렸다. 옆에서 지카리는 얼굴을 찌푸리며 인파의 머리를 넘어 소녀를 바라보았다.

“무려 놀랍게도 처녀!”

그 열기에 대고 상인은 침까지 튀겨가며 열심히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아니라면 책임지고 사후보상까지 해드립니다!”

“만약 저 아이가 팔려가면 어떻게 될까…?”

주변을 두른 소음의 벽 속에서 지카리는 혼잣말하듯 나지막히 물었다. 소녀에게 눈을 떼지 못한 채 아라는 작게 몸을 떨었다.

“비싸게 샀으니 아마 죽여버리거나 노역을 시키진 않을 거다.”

랜돌프는 단상과 관중을 냉정한 시선으로 경계하며 대답했다.

“자 그럼 2천 골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상인의 말에 대번에 누군가가 손을 들며 외쳤다.

“6천!”

그 말에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속에서 아라는 뭔가 누르고 또 누르듯 이를 악물며 단상을 노려보다가 순간
동공이 확장하더니 눈빛이 변했다. 작은 미소를 띄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단상 위의 소녀를 보고는 손을 들며 폴짝폴짝 뛰기
시작했다.

“샤나!”

높은 목소리에 랜돌프는 눈을 부릅뜨며 시선을 돌렸다. 크세노바가 헉.. 숨을 들이키는 동안 지카리도 아라에게 시선을 던졌다.

“샤나! 샤나 여기봐!”

즐겁게 손을 흔들면서 아라는 단상을 향해 일파를 밀치고 사람 사이로 빠져나갔다.

“지카리! 잡아!”

랜돌프는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지카리는 급히 팔을 뻗었지만 미처 닿기 전에 아라는 벌써 범위에서 벗어나 있었다. 지카리는
따라가려는 듯 걸음을 옮겼지만, 아라가 쉽게 헤치고 지나간 군중은 그의 덩치에는 무리였다.

그 순간 군중 중 한 명이 움직이더니 아라를 뒤에서 붙잡아서 입을 막으며 자세를 낮추었다. 아라는 발버둥을 쳤지만, 주변의 소란
와중에 별로 신경쓰는 사람이 없었다. 그 사이 랜돌프와 지카리, 크세노바는 사람 사이를 헤치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아라를 붙잡은
남자가 몇 발짝 걸음을 옮겨 한켠의 벽에 몸을 붙이는 동안 지카리의 넓은 등짝이 그들을 군중의 시선으로부터 가려주었다. 크세노바는
아라와 단상 사이를 막아서며 그녀의 시야를 차단했다.

“당신인가?”

랜돌프는 목소리를 낮추며 날카롭게 물었다. 사내는 아라의 머리 위로 그들을 마주보았다. 마른 몸에 움푹 들어간 예리한 눈,
두드러지는 매부리코와 광대뼈가 눈에 띄는 그는 입을 열었다.

“까마귀입니다. 여러분은?”

“비둘기다.”

사내가 몸에 긴장을 푸는 동안 아라는 흠칫 놀라더니 눈에 초점이 돌아오면서 표정이 차가워졌다. 그녀가 남자의 손을 잡아내리며 몸을
떼자 그는 두 손을 들어보이며 물러났다. 지카리가 그런 그녀를 미심쩍게 보는 동안 남자가 말했다.

“여러분이 올 거라곤 들었지만, 바로 행동에 나서주실 줄은 몰랐군요.”

그는 아라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단상 위의 소녀를 흘깃 보았다.

“일단 자리를 옮기죠.”

“잠깐.”

지카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저 아이가 팔려가면 어떻게 되는가?”

“첩이 될 거다.”

랜돌프는 단호하게 말했다. 지카리는 그런 그를 보았다.

“그렇다면?”

“비싸게 산 물건은 막 다루지 않는 법이지.”

랜돌프는 어깨를 으쓱했다.

“다른 노예에 비해서 살기는 괜찮을 거다. 움직여.”

“괜찮다…라.”

아라는 다른 생각을 하는 듯 먼 곳을 보는 시선이 되면서 쓰게 웃었다.

“여기서 이야기가 길어지는 건 좋지 않습니다.”

예리한 눈빛의 사내는 주변을 살폈다.

“따라오시죠.”

사내가 인파를 헤치며 단상에서 멀어지고 랜돌프가 그를 따라가는 동안 지카리는 엘프 소녀를 다시 돌아보았다. 아라는 그런 그에게
낮게 말했다.

“가십시다, 지카리공. 저들이 뭔가 계획이 있는 듯도 합니다.”

“우선은… 가지.”

소녀에게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지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무겁게 걸음을 옮기자 아라는 단상에 일부러 등을 돌리고 도망치듯
걸어갔고, 크세노바는 뭔가 털어버리듯 고개를 젓고 그녀를 따랐다.

소감

지난 2화의 상당부분이 그랬듯 3화 첫 부분도 삭풍님의 짧은 서술을 자세하게 풀어쓴 예입니다. 3화에는 이런 완전 창작은 첫부분 빼고는 얼마 없지만요. 주인공들의 대사와 행동을 다 만들어야 해서 좀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별다른 지적은 없어서 일단은 인물 표현이 괜찮은 걸로 보고 공개합니다.

전반적으로 이번 화는 프리포트의 모습을 표현할 수 있어서 재밌었습니다. 플레이 때부터 삭풍님이 무질서하고 비정한 분위기를 잘 잡아주셨고, 그걸 조금 더 확장하기만 하니 글이 나오더군요. 배경 자체가 인물처럼 개성이 뚜렷한 느낌이라 마음에 듭니다. 대강의 큰 줄기는 제가 설정한 곳이기도 해서 더 정이 가는 걸지도요. 프리포트는 여러모로 별일이 다(..) 생길 만한 곳이고, 실제로도 앞으로 보시면 (혹은 로그를 보시면) 알겠지만 별일이 다 벌어집니다.

이오닉스 2화 (3): 프리포트로

“이것을 전해주도록.”

아라가 건네준 꾸러미를 들고 엘프 여자, 아일리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엇이지요?”

“페어리 레이디 므우루가 부탁했던 것이다. 꼭 직접 전하도록.”

아일리스가 무표정하게 어깨를 으쓱하자 어깻죽지와 빗장뼈의 가느다란 선이 우아하게 움직였다.

“그러지요.”

등을 돌려 저 저주받을 나선 계단을 향해 춤추듯 멀어지는 엘프를 잠시 보다가 아라는 방안으로 들어와 화살을 가득 펼쳐놓은 탁자
앞에 앉았다. 창을 마주보는 방향에 앉는 것은 잊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창과 자신 사이에 탁자를 둘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창에
등을 돌린 채 그 너머의 까마득한 높이를 상상만 하지 않아도 되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기보다는 차라리 똑바로 마주보는
것이 나았다. 여전히 지상에서 까마득히 높은 그 말도 안 되는 광경에는 이가 갈렸지만. 미친 엘프놈들!

부탁대로 갖다준 화살만 해도 엘프라는 족속은 그녀를 괴롭힐 방안을 찾아 밤낮으로 머리를 싸매는 것이 틀림없었다. 깃을 이렇게 안
다듬어서야 어떻게 쏘라는 말인가. 아라는 화살 하나를 눈앞에 든 채 무게와 균형을 저울질해보았다. 뭐, 직선도나 결은 나쁘지
않았다. 깃만 좀 다듬고 허술한 것은 다시 묶으면 될 것이다. 구석에서 띄엄띄엄 들려오는 하프엘프의 류트 연습도 신경쓰지 않고
그녀는 화살을 내려놓고 작은 칼을 꺼냈다.

작업의 익숙한 흐름 속에서 아침에 찾아왔던 전령, 귀노샤가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귀노샤는 므우루가 에미넴 숲 전체를 관장하는
페어리 귀족이라는 사실을 밝히며, 페어리뿐 아니라 노스탤지아에도 엄청난 타격이 되었을 그녀에 대한 위해를 막아낸 일행을
치하했었다.

그러나 므우루를 납치하고 그녀가 관장한 군락지의 페어리를 학살한 배후로 이야기가 넘어갔을 때는 방안에 가득한 햇살마저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

‘멜코르 생고로드림은 인간들의 도시 프리포트에 있다고 저희는 추정하고 있습니다.’

귓가에 대고 얘기하는 것처럼 귀노샤의 말이 똑똑히 떠올랐다.

‘이 자의 안힐라스에서의 최초 행적은 몇 년 전 안힐라스 동부 뉴임페리얼시에서 발견되었죠.’

뉴 임페리얼. 탈출한지 여러 해가 지난 지금도 가슴이 차가워지는 그 이름을 떠올리자 아라는 화살 깃털을 면도날로 깎아내던 손이
흠칫 멈추었다. 인체실험을 자행하던 흑마법사를 노스탤지아 타격부대가 급습했지만 결국 놓쳤다는 귀노샤의 이야기는 지나치게 익숙했다.
설마…

허공을 가르던 섬광과 가슴을 찔러오던 근원적이고 본능적인 비탄의 기억에 그녀는 눈을 감았다. 면도날을 탁자에 내려놓고 아라는 애써
호흡을 골랐다.

문이 열리더니 바닥이 불안할 정도로 끼익..거리면서 지카리공의 도착을 알렸다. 드래고니안은 그의 무게가 실릴 때면 언제나
위태위태해보이는 계단을 태연하게 하루에도 여러 번 오르내리고는 했다.

“아일리스양에게 무슨 꾸러미를 맡겼나?”

지카리는 등뒤로 문을 닫으며 물었다.

“올라오는 길에 마주쳤는데 뭘 들고 가더군.”

올라오는 지카리의 거대한 덩치를 피하면서 저 나선 계단을 내려가는 상상에 아라는 저절로 입안이 말랐지만, 애써 예사롭게 말했다.

“예. 므우루가 부탁했던 물건입니다. 편지는 아스타틴이 써주었습니다.”

햇빛이 잘 드는 구석에 앉아 어느새 류트도 팽개치고 아사나스를 쓰다듬어주고 있던 아스타틴은 자기 이름이 들려오자 고개를 들었다.

“부탁했던…?”

순간 어리둥절하다가 지카리는 생각이 났는지 입을 벌리고 이를 드러내면서 목구멍을 긁는 소리를 냈다. 왠만한 짐승의 포효보다 훨씬
위협적인 웃음이기는 했지만 이제는 좀 익숙했다.

“그걸 가지고 있었단 말인가!”

“약속했으니까요.”

그때 기억이 떠올랐는지 아스타틴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이내 다시 얼굴이 심각해지기는 했지만… 방안에는 잠시 숙연한 침묵이
흘렀다. 페어리들에게 전한 두쪽난 아카마카 열매는 잊어서는 안 될 잔혹했던 날, 이곳 로스로리엘에서는 오래 전의 일처럼 멀기만 한
파괴와 죽음의 기념품이었다. 지카리가 바닥을 삐걱.. 밟으며 방으로 들어가는 동안 아라는 다시 탁자 위로 몸을 숙이고 화살깃을
조심조심 깎아냈다. 머릿속에서 귀노샤의 목소리는 이어서 말했다.

‘프리포트로 잠입해 정보를 확보하고, 최종적으로 이 흑마법사를 체포 내지는…’

귀노샤는 차분히 말을 이었었다.

‘제거해 주십시오.’

화살을 눈앞에 들고 화살깃의 균형이 맞는지 살피다가 아라는 가벼운 어지러움을 느끼며 내려놓았다. 그자가 뉴 임페리얼의 그 마법사가
맞다면 당연히 찾아내서 척살해야 했다. 가장으로서나 어미로서나, 뉴 임페리얼의 그날 밤을 떠올릴 때마다 검붉은 증오에 뛰는
심장을 생각하나 그래야만 했다. 노스탤지아와 그녀의 이해가 이렇게까지 일치하는 한은 (이것까지 예상했습니까, 샤나에?) 강제
배속에도 불만은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마음은, 아니 온몸이 그자를 만나기 싫다고 비명을 지르는 것일까. 그 생각만으로도 손은 두려움에 오그라들어 활시위
하나 당기지 못할 것만 같았다. 어째서 공포는, 아픔은 그녀를 이렇게도 겁쟁이로 만들어버리는 것인가. ‘그 벌레같은 수명을 이어
이곳까지…’ 그자의 말이 결국 옳았던 것일까. 아라는 칼을 내려놓고 오른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괜찮은가?”

웅웅거리는 목소리에 그녀는 손을 내리며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응접실로 나온 지카리는 연녹색 눈에 호기심과 걱정을 담아 그녀를
지켜보았다. 아스타틴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이 곁눈으로 보였다.

”…예. 그저 잠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카리가 더 묻지 않고 그녀의 맞은편 의자에 앉자 의자가 비명을 질렀다. 그의 육중한 상체가 창문을 가려주자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곧 프리포트로 떠나겠군.”

탁자 위에 흩어놓은 화살을 보며 지카리가 낮게 말했다.

“예.”

그녀는 손을 뻗어 화살대와 깃을 어루만졌다. 사실 화살깃 손질상태에 큰 문제는 없다는 것을 이제는 인정할 수 있었다. 그저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뭔가 손을 놀리고 싶었을 뿐이다.

“추가 위장 물품은 도착했는지요?”

지카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빛은 엄숙했다.

노예매매가 성행하는 인간들의 도시, 멜코 생고로드림의 소굴이 있을지 모르는 프리포트에 그들 일행이—인간 둘을 제외하고는—무사히
활동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들을 일시적으로 인간의 모습으로 바꾸어줄 마법이 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지급받은 반지를 껴보았을
때는 마법의 보이지 않는 막이 몸을 팽팽하게 감싸는 느낌이 잠시 드는 것 말고는 별 차이를 느끼지 못했지만, 나중에 거울 앞에서
해보자 그 효과는 확실했다. 귀가 뭉툭하고 짧아지면서 눈이 조금 둥글어지고, 얼굴의 윤곽이 완만한 곡선을 띄면서 겉보기에
‘인간’이 되는 과정을 아라는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보았었다. 그리고는 거울을 깨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서둘러 반지를 빼고
자신의 원래 얼굴을 몇 번이나 확인했었다.

“마법이란 편리하되 유쾌하지는 않군.”

지카리가 입을 열었다. 아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연을 거스르고 왜곡하는 마법은 확실히 자연의 정령인 드래고니안에게는 부자연스럽게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편리한 것 역시 사실이었다. 인간 국가들에 대항한 연합 세력의 최대 우위이기도 했으며, 이동시간을
비약적으로 줄여주고 이번 프리포트 임무 같은 잠입 임무를 가능하게 하기도 했으니.

“멜코라는 그 마법사는 어째서 그런 짓을 하는지, 물어보고 싶군.”

지카리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말했다. 그때 크세노바가 낮잠을 잤는지 졸린 눈으로 방에서 비틀비틀 나와 탁자에 앉았다. 두
사람에게 대충 인사하고 그는 화살 몇 대를 밀어내며 팔에 얼굴을 묻고 엎드렸다. 그런 그를 보며 아라는 말했다.

“마법사이니, 지식의 추구 아니겠습니까?”

크세노바는 일어나 앉으면서 눈을 비비고, 대화에 흥미의 기색을 보였다. 그런 그에게 지카리가 물었다.

“크세노바, 자네는 마법사니 멜코르라는 인간이 어째서 그런짓을 하는지 알고 있나?”

“아라니아카의 말대로 비뚤어진 욕망이 아닐까 합니다만…”

젊은 마법사는 가볍게 하품을 했다.

“즉… 그것이 필요해서 벌인 일은 아니라는 뜻으로 알겠네.”

지카리는 무겁게 대답했다. 아라는 마법사의 소굴에서 가져왔다가 므우루에게 전하라고 아침에 귀노샤에게 넘긴 페어리 날개 더미를 생각했다.
지식과 권력에 대한 갈망 앞에서 그 작은 생명들에게서 빼앗은 마법이 필요한지 단지 갖고 싶은지 무슨 차이가 있는가.
생고로드림이라는 자에게 묻는다면 그는 필요하다고 대답할지도 몰랐다.

“왜 그러는지가 중요합니까?”

그녀는 탁자 위의 화살을 모아다가 화살통에다가 한 묶음씩 집어넣었다. 손에 좀 더 익게 다듬고 싶은 생각은 있었지만, 지금은
탁자에 공간이 부족했다.

“멈추게 하면 되지요.”

“그는… 아마도 그 누구와도 다른 자신만의 기준이 있겠지요.”

이제 완전히 잠이 깬 듯 크세노바가 조용히 말했다.

“꼭 폭력으로 해결할 문제는 아닌 듯 하지만요.”

구석에서 아사나스에게 기댄 채 류트를 집어들며 아스타틴이 말했다.

“그런 자들은 폭력 외에는 어떤 언어에도 귀기울이지 않는다.”

탁자 위에 흩어진 깃털조각을 손으로 쓸어 바닥에 떨군 아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분이 불안해져서 자꾸 몸을 움직이고 싶었다.
이번 임무 설명을 들은 이후로 계속 그랬다.

“생각이 변하지도 않아. 남은 것은 누가 더 강하느냐 하는 문제뿐이다.”

그녀와 수많은 노예를 뉴 임페리얼에서 탈출시킨 것은 설득이나 대화가 아니라 오직 차가운 철과 치밀한 계획, 그리고 치명적인
마법이었다. 노예를 풀어주는 것이 왜 옳은지 백날을 설명해도 시간낭비일 뿐, 힘없는 자의 웅얼거림은 그 누구도 귀기울여주지
않았다. 그 교훈은 딸을 잃은 밤 이래 지울 수 없는 각인이 되어 영혼에 남았다.

“그렇습니다.”

크세노바는 유감스러운 기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렇군.”

지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야기는 들어보는 것이 좋겠지.”

“자신의 잣대만으로 기준을 세우는 자에게는 대화가 통하지 않죠.”

크세노바가 대답했다.

“그자에게 말씀하시려면 뜻대로 하십시오, 지카리공.”

아라는 화살통을 들어올려 메면서 덧붙였다.

“하지만 제 뜻대로 된다면…”

그녀는 벽에 기대 세워두었던 활을 집어들었다.

“시체에게 얘기하시게 될 겁니다.”

지카리와 아스타틴은 말없이 그녀를 보았다. 이윽고 지카리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려 하는 건…”

일어서자 그의 덩치가 방안에 가득 차는 기분이었다. 그의 웃음은 어딘가 슬퍼보였다.

“자네들도 마찬가지일지 모르겠군.”

그는 구석의 아스타틴에게 몸을 돌렸다.

“아스타틴군, 이 앞에서 드워프 상인이 진짜 난 엘모스산 맥주를 파는데 한 잔 하겠는가?”

하프엘프는 눈을 반짝이며 일어섰다. 아라 자신은 드워프 맥주라고는 거의 샬란 교역 거점을 통해 들어오는 헤루모르산만 마셔보았기에
호기심이 동했지만, 술을 마셔도 기분이 나아질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술이 들어갔을 때 ‘그녀’가 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확인한 이래 음주는 되도록 자제하고 있었다.

지카리와 아스타틴이 뭔가 얘기하며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녀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드래고니안이라면 그녀를 괴롭히는
기억의 해답을 제시할 수 있을까.

“말씀 묻지요, 지카리공.”

아스타틴에게 난 엘모스산 맥주 발효과정을 설명하다 말고 지카리는 돌아보았다. 둘 사이에 늦은 오후 공기가 살짝 긴장했다.

“그자가 공 앞에서 어린아이를 죽였다면 왜 그랬는지 물어보시겠습니까?”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참으려고 무진 애를 써야 했다. 꼬마 샤나가 품안에서 점점 숨이 꺼져가는 동안 마법사는 그녀를 비웃었었다.
샤나만큼이나 쉽게 죽일 수 있었을 텐데도 그냥 가버린 그를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 질문을 던져야만 하는 것일까.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있다면 가슴을 옥죄는 이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바람이 불면서 나뭇잎이 바스락거리고 발밑에 발판이 끼익… 살짝 움직였다. 무심코 탁자에 손을 얹으며 자세를 낮추면서도 높은 곳에
갇혔다는 불안감은 이 순간에는 멀기만 했다. 공포를 의식하되 지배당하지는 않은 채 그녀는 지카리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고 싶네.”

이를 드러내는 그의 미소는 다시 슬퍼보였다.

“하지만 그게 안 될 걸세.”

“예.”

묘하게 기운이 빠지면서도 마음은 가벼웠다. 그의 정직함에 작은 감사를 담아 그녀는 드래고니안에게 목례했다.

“맥주 맛있게 드십시오.”

그들이 나가는 동안 아라는 탁자를 돌아 응접실의 큰 창문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구석에 누워 졸던 아사나스가 고개를 들었다가
헷갈리는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아라?”

크세노바가 등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대답하지 않고 아라는 창가에 섰다. 밑으로는 나무의 줄기와 가지가 얽히고 굽어지며 까마득히
내려갔고, 하늘은 아까보다 조금 어두웠다. 점심에 내렸던 비가 물러간 뒤끝에 오른편의 서쪽 하늘은 흐릿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로스로리엘 숲은 눈앞에서
바람에 누웠다가 또 일어나며 물결쳤다.

길게 숨을 들이쉬며 그녀는 풀벌레와 졸린 새울음에 귀를 기울이고, 살아 생동하는 신록의 향을 호흡했다. 가슴이 떨리면서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것이 아마도 곧 물러나야 할 듯했다. 그러나 상상하며 두려워하기보다는 이렇게 똑바로 마주하는 것이 훨씬 나았다. 이제
더는 피할 수가 없었다. 영혼 깊숙히 박힌 그 검은 두려움을 피하기만 해서는 살아갈 수가 없었다.

“시작인가…”

아라는 남쪽 숲을 넘어 잿빛 구름이 낮게 깔린 남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두려움과 증오가 검디검게 도사리며 기다리는
프리포트가 남쪽에서 손짓하는 곳을.

소감

이걸로 2화 분량도 마쳤습니다. 실제 2화 플레이한지도 2주가 되어가는군요. 랙(..)이 좀 있는 건 각오했지만 과연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 자신에게 도전을 하는 기분으로 하는 데까지 즐겁게 해보려고 합니다.

임무 브리핑을 받는 대목은 그냥 순서대로 쓸 자신이 도저히 없어서 회상으로 축약해서 처리했습니다. 회상은 또 정보전달의 명확성, 회상과 현재시점의 구분 등 그 나름의 문제가 있지만, 적어도 일반 시간 순서를 따르는 것보다는 좀 더 긴장감 있는 진행이 된 것 같습니다.

아일리스는 랜돌프 외전에서 처음 등장시킨 인물인데, 여기서 아라에게 꾸러미를 받아다가 외전 쪽에서 랜디에게 전해줍니다. 나름 마음에 드는 인물인데 어떻게 써먹을지는 아직 애매하네요. 랜디 상대역 얘기가 있는데 두 사람 다 많은 변화를 겪기 전에는 상상이 안 가는 얘기로군요. 물론 그 변화의 과정 자체도 재미있겠지요.

아일리스와 아스타틴은 그가 로스로리엘 살 때 알던 사이라는 설정이고요. 아무도 신경써주지 않는 혼혈 고아에게 그나마 책임감을 느꼈던, 당시에는 10대에 해당하는 소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이 인물은 너무 자기통제가 강하고 뭐든지 자기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면이 있습니다. 장점이자 단점이죠, 지난번에 크세노바가 치료해주겠다고 했을 때 별 쓸모없는 진료거부(..?)도 그렇고.

이제 또 3화와 랜돌프 외전 작업 들어가야겠군요. 피드백 주시면 감사감사하겠습니다!

이오닉스 2화 (2): 안식의 로스로리엘

“아슬아슬했군요.”

하프엘프 청년이 말했다. 오크 한 떼가 동굴에 닥쳐드는 모습을 그들은 나무 사이로 멀리 지켜보았다.

“잘했다, 아사나스.”

아라는 오크들을 지켜보며 가우르의 검은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녀석은 노란 눈을 가늘게 뜨며 좋아했다.

“수고했어… 아사나스.”

가우르를 돌아보며 하프엘프 청년은 웃었다. ‘아사나스’라고 부르기 전의 공간에는 다른 이름이 맴돌고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위험을 제때 피해오고 사건을 거의 일단락지은 지카리의 마음은 가벼웠다. 그는 웃으며 아라의 짐승 친구를 돌아보았다.

“맹수같지 않군.”

야생동물의 혼은 쉽게 길들여지지 않았지만, 이녀석은 야생의 마음과 충직한 친구의 본능을 둘다 갖추고 있었다. 제때 경고해준
짐승에게 감사하며 지카리는 손을 내밀었다.

“전 주인이 잘 가르친 모양… 아 저, 지카리공…!”

사냥꾼이 검은 털을 바싹 세우며 으르릉거리자 지카리는 손을 재빨리 거두었다.

”…조심하십시오.”

아라가 뒤늦게 덧붙였다.

“맹수가 맞군…”

지카리는 어색해진 손으로 목을 쓸었다. 지카리공이 너그러워서 그렇지 앞으로는 상대를 가리고 덤비라고 아라가 타이르자 맹수는
봐줬다는 듯 아라를 보고 좋다고 가릉거렸다. 확실히 충직한 동물이기는 했다… 한 사람에게만.

“일단 움직이죠? 좀 안전한 곳까지.”

나무에 기대어 잠시 쉬고 있던 크세노바가 다가왔다.

“페어리 마을은 폐허가 되었고…”

아라는 생각에 잠긴 눈빛이었다.

“우리도 로스로리엘 본부로 돌아가면 되겠지.”

그녀는 아스타틴에게 몸을 돌렸다.

“안내하겠는가, 패스파인더.”

역시 뭔가 인연이 없다고 생각할 수 없는 따스한 표정으로 가우르를 보던 하프엘프 청년은 이내 평소의 냉정한 얼굴이 되며 말했다.

”…그러지요.”

그의 표정이 이내 더 싸늘해졌다.

“아마 지금쯤 그 사냥꾼도 페어리들을 데리고 도착했을테니까요.”

그 남자 얘기에 잠시 분위기가 서늘해졌다. 그가 무슨 짓을 했길래 이런 분위기인 것일까, 지카리는 몹시 궁금해졌다.

“므우루의 상태는 어떤가?”

아스타틴은 그 보자기 비슷한 옷을 접어 만든 주머니에 집어넣은 이후 소리없이 누워있는 므우루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꽃이 어떤지 알 수 없지만… 아직까지는 무사한 것 같아요.”

그는 지카리가 나무에 아무렇게나 기대놓은 흑마법사를 싸늘한 경멸의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스승에게 희귀한 종을 바친다고 들떠있었으니.”

“엘프들이 그녀를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르니 서두르자.”

그런 므우루를 보는 아라의 눈빛에는 그녀에게는 어울리지 않게 부드러운 데가 있었다.

“동족과 함께 있으면 나아질지도 모른다.”

“예…”

그 말을 믿고싶은 듯 간절한 눈빛으로 아스타틴은 끄덕였다. 아라가 걸음을 옮기자 지카리는 흑마법사를 집어들어 어깨에 걸쳤고, 나무
사이로 조용히 그들은 걸음을 옮겼다. 엘프들의 수도 로스로리엘을 향하여.

마침내 오크들이 흔적을 쫓아왔는지 로스로리엘 오십 리쯤 밖에서 따라잡힐 뻔하자 크세노바는 지친 몸을 추스리며 주문을 준비했지만,
그리폰을 탄 기수들이 나무 위로 조용히 나타나는 광경에 오크들은 감히 더 다가오지 못하고 도망쳤다. 몇몇 기수들이 그들을
역추적하는 동안 두 기수의 비호 하에 그들은 무사히 로스로리엘로 진입했다.

로스로리엘은 마법과 기술, 예술성으로 쌓아올린 알쿠알론데와는 또 달랐다. 나무 사이 길로 개천에 접근하자 목각 그리폰이 나무 다리
앞에 웅크려 그들을 맞아주었다. 다리 난간에는 숲의 온갖 생물을 부조로 새긴 솜씨가 섬세했다. 다리 반대편에 웅크린 똑같은
그리폰을 지나치자 어느새 평생 처음 보는 거목들이 성큼 다가와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오래된 떡갈나무의 다섯 배는 가볍게
넘을, 상상도 못한 규모의 거대한 가지와 무수한 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속삭임은 부드러우면서도 압도적이었다. 머리 위의 그리폰
기수는 인사하듯 두어 번 돌더니 외곽으로 이탈했다.

“미친 엘프놈들.”

옆에서 나비… 아니 아사나스를 타고 가는 아라가 중얼거렸다. 한 번 그리폰을 올려다본 그녀는 서둘러 시선을 땅으로 내렸다.
크세노바는 갑자기 그녀가 몹시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자작나무와 너도밤나무의 행렬이 끝나고 로스로리엘의 거탑 같은 나무 아래 선
지금, 주변의 꽃이 만발한 풀밭 어디에도 건물은 보이지 않았다. 꼭대기가 보이지도 않는 나무들의 거대한 가지와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에 나뭇가지로 엮은 천막이나 작고 정교한 목조 집이 눈에 띌 뿐.

로스로리엘은 높은 곳을 싫어하는 이에게 친절한 도시가 아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그늘 속에서, 햇살과 그림자가 아롱진 땅 위를 걸어 가장 가까운 나무에 다가가자 약 5m 위의 가장 낮은
가지에 뭔가 갑작스레 움직인다 싶더니, 두 명의 엘프가 땅에 가볍게 착지하며 그들 앞에 섰다. 녹색과 갈색 튜닉과 바지, 망토
차림의 두 남자 엘프는 그들에게 목례했다.

“로스로리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여행자들이여.”

긴 갈색 머리를 뒤로 넘겨서 땋고 아라 것보다 한결 긴 활을 멘 남자 엘프가 말했다. 어깨와 가슴, 팔에 가죽으로 댄 경갑주
말고는 갑옷은 보이지 않았다.

“저는 아르노스, 이쪽은 저의 형제 테르반입니다. 페어리들의 일로 오셨는지요?”

“그들은 무사히 도착했는가?”

아라가 급히 물었다.

“예, 그렇습니다.”

아르노스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와 많이 닮은 테르반이 대답했다. 갈색 머리는 길게 늘어뜨린 채 윗부분만 묶어서 얼굴을 가리지
않게 한 그는 투창을 하나 들고 등에 세 개를 더 메고 있었다.

“인간… 대원, 랜돌프 에디우스가 생존한 페어리들을 데리고 도착했습니다.”

아르노스도 테르반도 랜돌프 얘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불쾌한 기색이었지만, 그래서 크세노바는 그들이 전하는 좋은 소식이 더 신뢰가
갔다. 아라는 묘하게도 오히려 실망한 기색이었지만, 옆에서 아스타틴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서자 그쪽으로 주의를 돌렸다.

“저, 여기…”

아스타틴은 머뭇머뭇 말했다. 아르노스와 테르반을 보는 그는 묘하게 기가 죽은 채 조심스레 옷주름에서 므우루를 꺼냈다. 아스타틴을
보는 그들의 얼굴에는 읽기 어려운 감정이 스쳤지만, 기운없이 축 처진 므우루와 그녀의 희미한 빛에 눈이 가자 그들은 대번 심각해졌다.

“페어리 마을을 습격한 자가 납치했던 고위 페어리다.”

아라가 말했다.

“치료가 필요하다. 그녀를 도울 사람이 있는가?”

아르노스가 휙 몸을 돌려 꼭 새울음 같은 휘파람 소리를 내는 동안 테르반은 아스타틴에게 다가섰다. 그가 므우루에게 손을 뻗자
아스타틴은 방어적으로 움찔… 뒤로 물러섰다.

“아 저기, 이쪽에 흑마법사도 하나 있습니다만.”

크세노바는 일행의 뒤편에 묵묵히 선 지카리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지카리가 어깨에 멘 형체를 곁눈질하고 아르노스가 다시 휘파람을
불자 날카롭고 긴장한 새의 비명이 하늘을 향해 울렸다.

이후 상황은 빠르게 흘러갔다. 마법사와 치유사를 포함한 엘프들과 수염이 하얗게 센 드워프 하나가 몰려와 지카리가 내려놓은
흑마법사를 둘러싼 후, 드워프가 은으로 만든 것 같은 사슬을 붙잡고 주문을 중얼거리자 수족갑이 저절로 열리며 사슬은 흑마법사를
향해 스물스물 움직였다. 아르노스가 짧은 칼을 꺼내 마법사의 포박을 끊자 사슬은 드워프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맞추어 마법사에게
기어가더니 수갑과 족갑을 철컥 채웠다. 한편 테르반에게는 므우루를 내놓으려 하지 않았던 아스타틴은 여자 치유사 하나가 부드럽게
설득하자 마침내 그녀가 내미는 꽃향기가 나는 천 위에 페어리를 부드럽게 눕혔다.

므우루를 데려가는 치유사와 흑마법사를 연행하는 이들이 각자 다른 방향으로 멀어져간 후에 테르반과 아르노스와 같은 차림을 한 여자
엘프가 나무에서 내려와 걸어왔다. 아르노스는 그녀를 보더니 눈쌀을 찌푸렸다.

“너는 휴식하라고 명령받았을 텐데, 아일리스?”

검은 머리를 땋아서 머리에 단단히 감아둔, 선이 가는 젊은 엘프 여인은 태연히 말했다.

“로스로리엘 안에서 걸어다니는 것보다 편한 휴식이 있을 리가 없잖아.”

평소에는 유연하면서도 낭비 없이 효율적으로 움직일 것 같은 그녀는 조금 창백한 채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일행에게 인사했다.

“아일리스입니다. 숙소로 안내해 드리지요.”

그녀는 문득 갈빗대에 손을 대고 이를 악물었다. 금새 회복하고 아일리스는 차분하게 말했다.

“따라오십시오.”

푸스스스… 조금씩 저물어가는 하늘 아래 로스로리엘의 거목이 저녁 바람에 바스락거렸다. 바람은 신록과 꽃의 내음을 가득 싣고 왔다.
나무를 몇 그루 지나 계단이 줄기를 돌아 빙빙 올라가는 나무를 향해 아일리스가 그들을 이끄는 동안 크세노바는 그녀의 상태가
걱정이 되었다.

“혹시 부상이라도 당하셨습니까? 치유 마법이라도…”

그녀는 돌아보더니 침착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마법사님. 힘을 아끼시지요.”

괜한 말을 했나. 마치 부상을 들킨 것이 개인적인 실패인 것처럼 아일리스는 입매가 긴장해 있었다. 그녀는 옆으로 비켜서서 계단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쪽으로 올라가면 금방입니다. 가시지요.”

크세노바 뒤편으로는 주변을 신기하게 두리번거리는 아스타틴이 올라왔고, 그들의 뒤에 지카리가 계단에 오르자 계단은 걸음마다 위태하게
삐걱거렸다. 크세노바는 만약을 위해 공중부양 주문을 떠올려 보았다.

지카리가 삐걱거리는 뒤편을 불안하게 돌아보자 아직 올라오지 않는 아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땅에서 자겠다.”

아사나스 위에 앉은 채 아라는 반쯤 넋이 나가서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희미하게 애원조가 섞여들었다.

“천막이라든지…”

“지상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아일리스는 참을성 있게 말했다.

“일단 올라가시면 숙소는 넓답니다. 정 불안하시면 제 손을 잡고…”

아라는 그 말에 움찔했다. 뒤에서 아스타틴이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나중에 아라가 기억할 지도 모르니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은
아주 좋은 생각 같았다.

“아니다. 음, 아사나스…”

아라가 층계를 힐끔 보며 머뭇거리고 있을 때 아일리스가 갑자기 강하게 말했다.

“바라트!(주:다크엘프어로 ‘가라!’)”

그 소리에 가우르는 마치 누가 엉덩이를 친 듯이 후다닥 층계를 달려올랐고, 아라는 화들짝 놀라 고삐를 있는 힘을 다해 붙들었다.
아사나스가 이내 속도를 늦추며 천천히 올라오는 동안 크세노바부터 시작해 일행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일리스가 아라의 뒤를 이어 따라오는
동안 아라가 가우르의 등에 앉아 중얼거리는 소리는 그녀의 언어로 욕설 같았다.

“괜찮은가?”

지카리가 걱정스레 묻자 아라는 이를 악문 채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지상에서 6미터나 올라왔을까, 두 개의 나뭇가지 사이에 지은 나무집이 보이자 아일리스가 뒤에서 말했다.

“여러분의 숙소입니다. 그대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둥근 1층짜리 나무집은 넓은 창 너머로 정갈한 침실이 보였다. 두 개의 나뭇가지에 어른 손목만한 줄을
여러 겹 묶어 고정한 큰 발판에 역시 굵은 줄, 그리고 깎아서 서로 맞물린 나무판으로 세운 집은 거의 지상이나 진배없이 견고해
보였다.

조각해서 장식한 나무문을 열고 들어가자 정면으로 탁자와 편한 의자를 배치한 둥근 응접실, 출입문 반대편 벽에는 벽의 둥근 곡선을 따라
낸 큰 창이 보였다. 창밖에는 멀리 왼편과 오른편에 거목 한 그루씩과 그 너머에 넓은 하늘, 그리고 로스로리엘 남쪽의 숲이 가득
펼쳐졌다. 대여섯 걸음쯤 되는 통로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창 양옆으로, 그리고 출입문 양옆으로 난 문이 네 개 보였다. 아까 본
침실들로 통하는 문이리라. 출입문에서 응접실로 가는 통로와 창이 들어있는 우묵한 벽감은 그렇다면 침실 벽 사이의 공간일 것이라고
크세노바는 짐작했다.

“와아…”

그의 뒤로 들어온 아스타틴이 풍경을 보며 감탄하는 동안 지카리가 들어서자 바닥은 다시 크게 삐걱거렸지만 다행히도 무너지지는
않았다. 그 뒤로 가우르의 발걸음이 부드럽게 바닥에 닿아왔다.

돌아보니 아라는 잠시 얼어붙어서 저 밑 창밖에 물결치는 숲을 내려다보더니 허겁지겁 가우르의 등에서 내려 출입문 왼편의 침실, 그러니까
나무에 바로 면해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응접실의 큰 창을 무슨 괴물처럼 돌아본 그녀는 창문이 쫓아오기라도 할 듯 문을 쾅!
닫았다. 아사나스가 헷갈리는 표정을 한 채 문을 커다란 앞발로 긁는 것을 보고 아스타틴이 가우르 곁으로 가서 목을 쓰다듬어주었다.

“숙소는 마음에 드시는지요?”

아일리스가 문으로 들어섰다.

“아 예… 멋지군요.”

크세노바는 창에 대고 손짓했다. 반대의견을 제시할 만한 사람은 방에 틀어박혀 있었으니 뭐.

“이곳에서 휴식하십시오.”

갈빗대를 조심하는 기색으로 아일리스는 가볍게 목례했다.

“그리고 보고를 준비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일리스.”

그녀도 휴식을 취할지 크세노바는 좀 걱정이었지만, 얘기했다가는 괜히 자존심만 건드리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면 저는 이만.”

아일리스가 문을 닫고 나간 후 그녀의 발걸음은 들릴락말락 조용히 멀어지더니 금새 사라졌다. 다시 응접실로 나오자, 아라의 방문
앞에서 아사나스와 놀던 아스타틴은 아일리스가 나간 출입문을 보더니 작게 찌푸렸다.

“아일리스…”

“아는 사람인가?”

제일 큰 의자에 삐그덕… 앉은 지카리가 웅웅거리며 말했다.

“어쩌면요. 낯이 익다고 계속 생각하고 있었는데…”

문이 벌컥 열리더니 아라가 응접실로 성큼성큼 나왔다. 노을이 지기 시작한 하늘을 내다보고 그녀는 창백해지면서 방에 도로
들어가려다가, 동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얼굴이 굳은 채 바닥에 앉았다. 이내 그녀는 가우르 뒤로 돌아가 창문과 자신 사이에
아사나스를 둔 채 창을 노려보았다.

방안에 조금씩 어둠이 내리는 동안 일행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다치지는 않았는지 서로 묻기도 하고, 전투에서 위험했던
순간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했다. 그러다가 마법사의 지옥도 같은 실험실 기억이 떠오르자 그들은 침묵에 빠졌다.

“군락지가 페어리들이 다시 살 수 있는 곳이 되려면 시간이 한참 걸리겠어요.”

마침내 아스타틴이 아사나스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노을이 붉게 내린 숲을 내다보는 그의 눈빛은 잔잔하고 슬펐다.

“보고하라지만 사실 우리도 모르는 것이 더 많군.”

아사나스를 사이에 두고 앉은 아라는 창 반대편의 벽에 등을 기대었다.

“아는 대로 보고하면 되겠지요.”

아스타틴이 대꾸했다.

“정보를 듣고 골라내는 것은 위에서 하는 일이 아니던가요?”

그의 말에는 희미하게 뼈가 있었지만, 말다툼을 하기에는 피곤해 보였다. 그것은 아라도 마찬가지였다.

“Redivivus.(주:고제국어로 ‘되살아나다’)”

집중하며 양손을 펼치자 푸른 빛이 떠오르며 몸을 따뜻하게 감쌌다. 마법을 많이 썼을 때 특유의 그 등골이 쑤시는 피로가 조금씩
녹아 없어지자 좀 더 편하게 숨을 쉴 수 있었다. 바닥에 기듯 하며 목숨을 구걸하던 흑마법사 도제가 문득 떠올랐다. 그자는
그렇게까지 거물은 아니었지만, 주문을 외울 여유가 있었더라면 일행이 지금처럼 멀쩡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제자가 그 정도라면…

“저 흑마법사의 스승이 걱정이로군요.”

지카리가 몸을 돌려 그를 쳐다보자 의자 밑에 바닥이 삐걱거렸다.

“자네는 뭔가 짐작가는… 점이 있나 보군.”

“제국에서 죄를 지어서 도망친 자입니다. 악명이 자자하죠.”

악명이 말 그대로 이름의 힘을 가리킨다면, 그 이름만으로도 마법사가 모인 자리 분위기가 싸해지는 멜코르 생고로드림만한 악명도
없으리라. 크세노바는 돌아가면 스승이 자는 동안 수염을 무슨 색으로 물들일까 궁리하기 시작했다.

“죄라면?”

“마탑에서 쫒겨난 사령마법사가 무슨 죄를 지었을지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자신도 잊고 싶은 이야기들이었다. 금지된 생체 실험, 계약마에게 바친 각종 희생, 피해자들의 비명이 끊이지 않던 악몽의
실험실. 그 생각만으로도 부드럽게 어둠이 내리는 숲의 정경을 더럽힐 것만 같았다.

”…별로 좋은 이야기가 아니라서요.”

좀 축소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그 정도로 끝내도록 하자. 이미 오늘 하루 마법사의 어두운 면을 너무 많이 본 사람들이었다.

“죽었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여기로 도망쳐왔을 줄은…”

다 알면서 이리로 보냈단 말이지, 영감님. 무지개빛 턱수염을 한 스승을 떠올리자 조금은 기분이 좋아졌다.

“안힐라스는 본토에서 너희 종족 중 최악이 건너오는 곳인 모양이로군.”

아라는 그를 쳐다보지 않고 창을 노려보며 조용히 말했다.

“너는 개중에는 나은 것 같다만.”

그녀는 마지못해 덧붙였다. 나름 칭찬이리라고 크세노바는 생각했다.

“아마도요.”

가우르가 기지개를 켜며 입을 크게 벌리자 크세노바는 뫵수의 눈치를 보며 살짝 떨어져 앉았다.

“기회의 땅이라는 소문의 실상이 이런 식일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만…”

첫날부터 신고식 하나는 호되게 치렀다고 생각하며 그는 피곤한 눈을 비볐다.

“대륙에서 막 건너왔다면…”

아스타틴이 말했다.

“소문의 반의 반도 경험하지 못한 셈이지만요.”

“그 말대로… 더 겪게 되겠지.”

얼굴에 붉은 석양빛이 비친 채 아라는 쓴웃음을 지었다.

“기회의 땅이 어떤 곳인지.”

그녀가 무심히 가우르의 옆구리를 손바닥으로 쓸어주자 맹수가 가르릉거렸다.

“인간에게는 기회의 땅일지 모르겠으나 우리에게는 고향이다.”

창밖을 내다보는 그녀의 눈빛은 남쪽 숲보다 먼 곳을 내다보고 있었다.

“이제 나날이 알아볼 수가 없어지는구나…”

그말에 아스타틴이 가슴에 늘 달고 다니는 브로치를 어루만지자 한 줄기 노을이 브로치의 은빛 표면에 빛났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추억 속에만 그리워하는 그 기분을 크세노바도 이해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 어떤 이는 차라리 떠나버린 걸까… 가슴이
답답해왔다.

“지카리공께도 궁금하였습니다만…”

아라는 드래고니언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녁바람에 쏴아아… 나뭇잎이 움직이면서 바닥과 그 밑의 거대한 나뭇가지가 끼익… 움직이자 그녀는 잠시 얼었다가,
바람이 잦아들자 말을 이었다.

“무슨 연유로 이 남쪽으로 내려오셨는지 물어도 될지요?”

드래고니언이 고개를 돌리자 단단한 비늘이 가시처럼 두른 그의 눈과 콧구멍만 난 코, 이가 날카로운 긴 입이 석양을 배경으로 검은
윤곽을 그렸다. 전설 속 드래곤을 닮은 그림자를.

“우리는 원래 수가 많지 않네.”

낮게 울리면서 동시에 희미하게 쉬익거리는 특유의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그래서 대부분이 내려오긴 했지만 보기 힘든 걸지도 모르지.”

“대부분이요?”

아라는 조금 눈이 커졌고, 크세노바도 흥미롭게 귀를 기울였다. 드래고니언을 더 만날 수도 있다는 말인가? 그는 스승의 수염을
물들이는 건 면제해주는 것을 고려했다.

“많은 수가 내려왔지.”

지카리가 끄덕였다.

“더 이상 지켜 볼수 없다는 뜻이 있었네. 인간의 행동을 처음에는 조화를 찾기 위해 벌이는 소음 정도로 생각했지만…”

제국에서도 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했었다. 새로운 문명, 아니 세계를 만난 과도기일 뿐이니 금방 가라앉으며 균형을 찾을 것이라고.
그 과도기가 10년 20년 길어지는 동안 본토의 관심은 차차 수그러들었고, 이것이 세력의 균형이라면 그 균형은 꽤나 가혹하고
불안정했다. 탄내가 매캐한 페어리 꽃밭과 흑마법사의 실험실이 떠오르자 크세노바는 속이 메스꺼워졌다.

“이런 슬픈 일이 또 벌어지지 않게 하는게 우리들의 목적이랄 수 있지.”

드래고니언은 석양이 식어가며 어둠으로 잦아드는 숲을 내다보았다.

“나의 목적은 조금 다르지만, 그건 개인적인 일이네.”

그는 날카롭게 줄지은 이빨을 내보이며 웃었다.

“만약… 이길 수 없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어둠 속에서 아라의 목소리에는 뭔가 취약한 것이 있었다. 단단한 갑옷 사이 부지불식간에 내보이는 부드러운 속살처럼.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화를 찾기 위해서네.”

지카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럽게 말했다.

“그게 안 된다면…”

방안에는 가우르의 색색거리는 숨소리 외에는 침묵이 흘렀다.

“자네들, 드워프 맥주가 끝내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예?”

허를 찔린 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아라가 말을 이었다.

”…좋은 술이지요.”

“내가 맛본 바로는…”

지카리의 목소리에는 웃음이 섞여들었다.

“드워프들의 맥주라는건 안힐라스의 희망이라고 할 만하더군.”

고되게, 하지만 힘차게 노동한 하루의 끝에 친구들과 마주앉는다. 그들의 목소리와 웃음과 기분좋은
욕설이 맥주에 황금빛으로 녹아든다. 고개를 젖히면 그 포말이 시원하게 목구멍으로 넘어가 가슴을 덥힌다. 그 장면이 갑자기 너무나
생생해서 크세노바는 왠지 목이 말라졌다.

”…그런 물건이 있는데 실패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네.”

지카리가 익살스럽게 말을 맺었다.

“농담도…”

웃으면서도 크세노바는 드래고니언의 말을 믿고 싶었다. 모든 것이 너무 복잡하고 무거운 이곳이기에 그는 그런 희망을 맛보고 싶었다.
벌컥벌컥 마셔보고 싶었다.

“마법사도 언젠가 마셔봐야겠군.”

아라마저도 좀 느긋한 목소리였다.

“드워프 맥주를 못 마시면 안힐라스에 여행했다고 할 수 없으니.”

“안그래도 그래볼 참이라죠. 마탑에서는 그럴 기회가 거의 없어서.”

그러고 보니 그의 맥주 환상은 술마실 시간도 없을 정도로 고생을 시킨 스승 때문에 생긴 것일지 모른다. 역시 그양반 수염은
체크무늬로 물들이는 게 어떨까.

“음, 자네도 희망을 느끼게 될 거네.”

드래고니언은 무릎을 가볍게 치며 긁는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우리의 희망은 자네같은 인간들이기도 하지.”

어느새 밖에서는 하나둘 등잔을 밝혀 숲에 작은 빛무리를 만들었다. 하늘에는 화답하듯 하나하나 별이 떠올랐다.

“모든 인간이 파괴를 원하지는 않는다고… 나는 그렇게 믿고 있네.”

하늘과 땅의 별빛 속에서 드래고니언은 눈을 희미하게 빛내며 그를 마주보았다.

“그러나 언제나 파괴를 원하는 목소리가 더 크지 않습니까.”

아라가 말했다.

“그런 자들의 힘이 더 강하고요.”

“나는 파괴하려고 하는 힘이 더 강하다고 느끼는 것은, 그것이 눈에 잘 보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네.”

지카리는 깜박이지 않는 눈을 그녀에게로 향했다.

“사실은 지키려는 힘이 더 강하지만, 그것은 조금 느리고 눈에 잘 안 보일 뿐이라고 말이야.”

아스타틴이 말없이 일어나서 창가의 등잔을 찾아 밝히자, 조그마한 불씨는 금방 커지며 방안을 빛으로 가득 채웠다. 크세노바는 따스한 금빛이
고인 아늑한 응접실을 눈을 깜박이며 둘러보았다.

“그렇게 믿는 편이 마음이 편하지 않겠나?”

지카리는 다시 웃었고, 아사나스는 잠결에 가릉거렸다. 드래고니안이 손을 뻗어 아라의 어깨를 두들겨 주자 묵직한 소리가 크세노바가
앉은 데까지 들려왔다. 왠만하면 지카리가 어깨를 두들길 만한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바람을 타고 맑은 노래의 선율이 들려오자 그는 일어서서 창가로 다가갔다. 밖의 거목은 수많은 등잔불을 품은 채 저녁바람에 가볍게 흔들렸고, 처음에 누군가 혼자 부르던 노래는 다른 목소리, 또 다른 목소리가 합류해 어느새 수많은 선율이 서로 섞이고 녹아들어 그의 위로 맑은 물처럼 흘러갔다. 저녁별을 반기는 엘프들의 노래에 귀기울이며 크세노바는 사라져가는 것들을 위한 희망이라는 꿈을 꾸었다.

숙소에서 이틀을 쉰 후, 아침에 전령이 명령사항을 전달하러 온다는 통보를 받은 일행은 응접실에 모여 있었다. 몇 마디씩 이야기를
나눌 뿐 분위기는 조용하고 한가로웠다. 남향 창에서 비쳐드는 햇빛에다가 아스타틴의 제안대로 침실 문까지 모두 열어서 둥근 방은
아침 햇살이 가득했다. 집 바로 위의 가지에서는 엠린 새가 즐겁게 노래했다. 곧 떠날 곳이었지만 그래서 지난 이틀은 더없이
소중했다.

곧 이곳에서도 떠나가겠지. 아스타틴은 편안한 일행과 평화로운 정경을 둘러보았다. 노스탤지아가 생기기 전, 어려서 부모를 잃은
고아로서 잠깐 머물렀던 로스로리엘보다 지금의 로스로리엘은 한결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하루하루 인간들의 침탈에 거의
무방비로 사람이 사라지고, 전투에 지고, 점령당한 땅에서 난민이 밀려오는 와중에 아무도 혼혈의 고아에게 신경을 쓸
여유 같은 것은 없었다. 그 차이를 느낄 수 있기에 그는 텔루르가 탐탁치 않아해도 노스탤지아에 가세한 것일지도 모른다.

천장에 뭔가 어른거리자 그는 햇살이 어디에 반사되나 생각하며 올려보았다. 다만 색이… 분홍색? 그리고 이내 흰색, 노란색,
초록색, 파랑색의 빛무리가 천장에 급격하게 생겨났다. 탁자 앞에 앉아 책을 보던 크세노바와 바닥에 앉아 뭔가 이야기하던 지카리와
아라, 그리고 창문에서 쏟아지는 햇살 속에 등을 대고 누워 졸던 아사나스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그 빛무리로부터 하나하나 뭔가 떨어져 내렸다. 올려다보는 얼굴을 향해 묵직한 것이 날아오자 아스타틴은 급히 얼굴을 가리며
옆으로 피했다. 아사나스는 화들짝 놀라 탁자 밑으로 숨었고, 아사나스 때문에 이번에는 크세노바가 화들짝 놀라 일어나더니 벽에 몸을
붙였다.

와르르르- 사과, 들국화, 석류, 토끼풀 화환, 망고, 온갖 꽃과 과일이 쏟아져내리는 와중에 아스타틴은 떨어져내리는
야생화 목걸이를 졸지에 목에 걸게 되었고, 아라는 과일에 머리를 맞자 그가 어려서 텔루르를 따라서 했다가 엉덩이를 맞았던 다크엘프
욕설을 내뱉었다. 지카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지켜보다가 옆에 떨어지는 과일 하나를 잡아 냄새를 맡았다.

물건의 폭포가 잠시 잦아들자 아사나스는 탁자 밑에서 고개를 내밀었다가 눈앞에 오렌지 하나가 툭 떨어지자 캬옹! 하며 도로 숨었다.

”…이건?”

여전히 벽에 붙은 크세노바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묻자 마치 대답하듯 출입문으로 페어리들이 우르르 날아들었다. 웅웅웅… 색색의 빛을
햇살 속으로 흩뿌리며 그들은 재잘재잘 떠들어댔다.

“선물이야!”

“선물이야!”

“물선이야!”

“물선이 아니고 선물이야 이 바보~”

선물인지 물선인지 잠시 티격태격하다가 결국 자기들끼리 페어리어로 시끄럽게 떠드는 그들을 지카리는 푸근한 웃음을 지으며 보았다.
아사나스는 조심조심 탁자 밑에서 나오더니, 정신없이 날아다니는 페어리들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눈으로 따랐다.

“므우루는 어떤가?”

아라가 묻자 페어리 하나가 공통어로 대답했다.

“므우루 구해줘서 고마워~”

고마워~ 하는 즐거운 목소리들의 합창이 방안에 울렸다. 창에 빛이 어른거리는 것을 돌아보자 응접실 창밖에서도 페어리들이 맴돌며
웃고 떠들고 있었다.

“아하하…”

가슴 밑바닥에 따뜻하게 고이며 솟구치는 온기는 입을 벌리자 웃음이 되어 나왔다. 웃으면서도 아스타틴은 눈물이 고여오는 것을
느꼈다. 텔루르, 그의 어머니가 이 모습을 보았다면 뭐라고 했을까. 함께 가슴아파하고 함께 달리고 함께 싸워서 마침내 이루어낸 이
작은 기적에… 이런 순간에 더욱 아스타틴은 엄마가 가슴이 미어지도록 그리웠다. 그러나 과거 이상으로 미래가, 내일이 가져오는 그
모든 놀라운 가능성에 대한 목마름은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가슴 속에 날개를 저었다.

“알다론 여러분 계십니ㄲ… 아.”

엘프 여인 하나, 아마도 그들이 기다리던 전령이 숙소에 들어오다가 이 광경에 놀라며 멈추어섰다. 발목까지 꽃과 과일에 파묻혀서
꽃목걸이를 하고, 정신없이 떠들어대며 붕붕 날아다니는 빛무리에 둘러싸인 채 아스타틴은 그녀의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보고 더 웃음이 나왔다. 그들의
작은 개선을 축하하는 그 유쾌한 소란 속에 햇살은 눈이 부셨고, 해처럼 노란 새가 날아오르는 창밖으로 하늘은 드높이 푸르렀다.

소감

로스로리엘은 역시나 반지의 제왕의 로스로리엔에서 이미지를 많이 따왔습니다. 안힐라스는 특히 작명은 중간계에서 바로 따온 게 많은 세계죠. 알쿠알론데나 엘윙, 니르나이스 아르노이디아드 등등. 그래서 새로운 작명을 할 때도 엘프 작명은 신다린 사전을 많이 참조했습니다. 다크엘프어는 눈치채셨을지 모르지만 산스크리트를 약간씩 비튼 게 대부분이죠.

2화는 거의 쉬어가는 화로 생각하고 썼습니다. 원래 플레이의 주인공 간 대화도 그랬고, 또 플레이에는 나오기 어려웠던 NPC나 로스로리엘 묘사도 그렇고 안힐라스의 모습이라든지 상황을 드러내보고 싶었습니다. 안힐라스가 완전히 인간들에게 넘어간다면 무엇을 잃어버릴지, 현재 상황에 대한 안힐라스 주민들의 생각이라든지 말이죠.

아스타틴의 회상을 통한 로스로리엘의 과거와 현재 대비는 수단 내전 난민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 What Is the What 오디오북을 듣다가 떠오른 것입니다. 주인공 발렌티노 아차크 뎅이 어렸을 때 살던 마을 주민이 정부편 아랍 민병대에 학살당하고 노예로 끌려가 초토화된 후 혼자 도망쳐 난민이 되고 (여기까진 그야말로 판타지적인 배경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현실인지라 주인공이 나중에 돌아와서 마왕–혹은 알-바쉬르 대통령–에게 복수한다거나 하는 내용은 없습니다), 이후 에디오피아와 케냐의 난민수용소를 거쳐 미국으로 가는 여정을 다루는 작품입니다.

작중 발렌티노는 SPLA (Sudan People’s Liberation Army, 수단민족해방군 정도?)의 세력에 따라 탈출 경험이 얼마나 달랐는지도 얘기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200여명의 다른 소년과 함께 에디오피아로 도망칠 때 도보로 여행하고 가다가 다른 소년이 사자에 잡아먹히기도 했는데, 이후 출발한 다른 소년 난민 무리는 SPLA 유조선을 타고 에디오피아로 갔다는 대조가 극명했죠. 애당초 발렌티노와 다른 소년들을 에디오피아로 인솔한 사람이 교사 출신인 젊은 SPLA 협력자기도 했고요. 결국 수단 정부가 총을 쥐어준 아랍 부족들에게 학살당하던 이들을 그나마 살린 것이 정부에 대항해 총을 들고, 조직하고, 계획하고, 난민을 탈출시킨 반군의 존재였습니다.

그렇다고 SPLA가 절대선이라고 하는 얘기는 아닙니다. 실제로 SPLA도 소년병이라든지 부패, 군벌화 등 문제가 많은 조직이죠. 저는 마찬가지로 노스탤지아가 절대선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어떤 강한 조직 (수단 정부, 안힐라스에 진출한 열강 등)이 조직적으로 다른 집단을 학살하고 땅에서 몰아내고 노예화하는 말살 정책을 펼치는 상황에서 그에 대항하는 효과적인 반군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상황이 크게 달라지는 건 당연하겠죠. 무장 없이는 안정도, 자유도 없을 테니까요. 어찌보면 모든 악의 근원은 군사력의 큰 불균형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노스탤지아는, 그리고 불의한 정부에 대한 반군은 그런 불균형을 조금이라도 바로잡는 존재라는 면에서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오닉스 2화 (1): 죽음의 무게에 대하여

지난주 플레이한 이오닉스 2화입니다. 첫 부분인 ‘마법사의 표식’은 짧기도 하고 서로 내용이 바로 이어지므로 그냥 앞에 붙여서 같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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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의 표식

동굴 벽을 따라 걸어놓은 횃불이 눈에 연기를 날리면서 타닥타닥 타들어갔다. 발밑에는 더러운 천조각과 썩은내가 나는 고기, 어느
생물의 것인지도 구분할 수 없는 긴 뼈가 채였다. 발끝이 우그러진 채 버려진 갑옷 조각에 닿아 큰 소리를 내려는 찰나 아스타틴은
조마조마하게 발을 빼서 비교적 물건이 없는 데다가 다시 딛었다. 여기저기서 주워온 (혹은 훔쳐온) 듯 짝이 맞지 않는 탁자와 의자
등 잡다한 가구를 조심조심 돌아가야 했다.

이 잡다한 쓰레기에 뒤섞여 벽에는 보랏빛 휘장이 쭉 걸려 있었다. 불규칙한 간격으로 걸어둔 횃불 외에 가끔 가구나 바위, 동굴의
자연적 선반 위에 켜둔 촛불은 휘장마다 가득 수놓은 무늬를 비추었다. 무늬는 그림도, 적어도 아스타틴이 아는 어떤 언어의 문자도
아니었고 추상이나 기하학 문양에 가까운 것 같았지만, 자꾸 보다 보면 어딘가 기분이 나빠졌다.

동굴은 천장은 그닥 높지 않았지만 예닐곱 명은 나란히 걸을 수 있는 너비였으므로1) 그들은 거의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다. 아스타틴이 조금 앞선 채 크세노바가 한 발짝쯤 뒤에서 그의 오른편으로 따라왔고, 니아는 크세노바의 머리카락 끝을 한 움큼
잡은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쫓아왔다. 다시 그 오른편에 아스타틴과 비슷하게 보조를 맞추고 있는 지카리 쿤 카타의 조심스럽지만
하나하나 보폭이 큰 걸음은 돌바닥에 깊고 낮은, 소리없는 울림을 만들어냈다.

아스타틴의 앞편으로 조금 나선 크세노바는 벽에 붙어서서 휘장을 조사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흠, 이건…”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침묵을 깨며 동굴의 공기를 흔들었다. 뭔가 기억이 떠오르는 듯 그는 멈춰서서 휘장 하나를 살피며 밀빛
눈썹을 찌푸렸다.

“흑마법사들의 표시 같은데요.”

“흑마법사…?”

아스타틴에게는 생소한 개념이었다. 어차피 인간 마법사들이란 안힐라스 주민들에게 땅을 빼앗고 사람을 잡아가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데, 따로 흑마법이라는 개념이 필요하단 말인가.

“인간 마법사들은 다 같은 거 아닌가요?”

“멜코르 상고로드림, 인체실험을 자행하던 악질입니다.”

다시 걸음을 옮기며 크세노바는 조용히 말했다. 인체 실험… 그 말은 뭔가 불길한 울림을 만들며 어둑한 공간에 울렸다. 아스타틴은
갑자기 추워지는 기분이었다.

“흑마법사들은 보통 악마의 힘을 빌리죠.”

일행의 발걸음이 동굴 안에 울리면서 그들은 점점 깊이 들어갔다. 통로가 약간씩 좁아지면서 발걸음은 더욱 울렸다.

“이들 문양은 그자의 표식입니다. 안힐라스로 도망쳤을 거라고 예상하기는 했습니다만…”

이제 횃불을 설치한 구간이 거의 끝나가면서 깊어가는 어둠 속, 앞서가는 크세노바의 목소리는 마치 말하는 사람 없이 허공에서 나오는
듯 그림자 속에서 울려나왔다.

“그 강력한 마법사가 죽었다거나 원혼이 본토에 남아 악행을 저지른다는 것보다는 도망쳤다는 설이 신뢰성이 있었죠.”

거의 완전한 어둠 속에 그들은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도 쓰레기는 더 발에 채이지 않았고, 균형을 잡으려고 벽을 만지자
휘장의 부드럽고 묘하게 차가운 감촉이 손에 와닿았다. 꺼림칙한 기분이 든 아스타틴은 손을 떼었다. 인체실험… 어쩌면 다른 인간
마법사보다 심한 마법사도 있기는 있는 걸까. 일단 크세노바는 특별히 심한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앞으로는 또 모를 일이었지만.

몇 걸음 더 옮기자 앞에는 희미한 불빛이 보였고, 누군가 언성을 높인 목소리도 들려왔다. 그 빛 속에 니아가 휘장을 한 손으로
쓸며 크세노바를 쫓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크세노바가 조용히 멈춰서며 말했다.

”…쉽게 넘어가는 일이 없군.”

앞에서 들려오는 고함은 역정이 나 있었지만, 자세한 내용까지는 분간할 수 없었다. 니아가 살금살금 빛이 비쳐오는 통로 끝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고 아스타틴도 소리죽여 그녀를 쫓아갔다.

”..이 …새끼들아! 뒤를 밟혔다고?!”

빛이 흘러나오는 곳까지 닿기도 전에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내용은 더욱 뚜렷하게 들려왔다. 통로가 살짝 꺾이는 지점 너머에서
울려나오는 목소리는 오크들의 거친 억양과는 전혀 달랐고, 언어는 공통어였다. 니아는 벽을 감싸안듯 몸을 붙인 채 꺾인 통로 너머를
빼꼼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스타틴은 그녀 옆에 몸을 붙이며 머리 너머로 들여다보았다.

“네놈들은 대가리가 처 비었나! 박치기하는데만 머리를 쓰지말고 좀 생각을 하는데 쓰란 말이다!”

못 참겠다는 듯 소리를 질러대는 것은 갈색 로브를 입은 사내였다. 그 앞에는 오크가 10여 마리 정신없이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남자는 그들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고, 오크들의 시선은 그들을 비스듬히 벗어나 남자를 향하고 있었다. 그래도 불안해진 아스타틴은
숨을 죽이며 더욱 벽에 바짝 붙었다.

“이대로서야 스승님께 바칠 선물이…에에이!!!”

스승님… 이곳에는 멜코르 상고로드림의 문양… 마법사 로브를 입은 사내…

직감적이지만 피할 수 없는 결론에 아스타틴은 속이 차가워졌다. 그 흑마법사의 제자도 하나하나 그렇게 강력하다면 멜코 상고로드림의
흔적들은 그저 우연이기를 빌 수밖에 없었지만, 왠지 그렇지는 않을 것 같았다.

“원래 가져가려고 했던 날개뿐만 아니라 진귀한 패달랭이꽃 급의 페어리까지 구해서 스승님의 총애를 듬뿍 받나 했더니 네놈들이
뒷처리를!!”

단번에 거의 숨도 안 쉬고 소리지른 말에 아스타틴은 얼굴에 표정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뱃속의 차가운 감촉은 점점 뜨거운 분노가
되어갔다. 역시 흔적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페어리 날개를 가져오고 므우루를 납치한 것은 이 일당이었다. 폭발로 크게 구덩이가
패인 채 불타는 페어리 꽃밭을 생각하자 두려움은 더 설 자리가 없었다.

“제길 이럴줄 알았으면 쿠라 놈이랑 헤어지는게 아닌데!”

마법사가 분에 못이겨 옆에 의자를 걷어차자 의자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천천히 돌아보며 니아는 그에게 윙크하더니
조심스레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녀가 상황을 동료들에게 전할 테니 아스타틴은 조금 더 엿듣기로 했다.

제풀에 지쳐 식식거리던 마법사가 홱 돌아보자 아스타틴은 움찔하며 통로쪽으로 움츠러들었다. 갸름하고 마른 얼굴에 마법사의 눈빛은
차갑고 밝았다.

“가만…왜 추적자들을 잡으러 보낸 놈들이 소식이 없지?”

아스타틴이 동굴 입구에 널부러져 있을 시체들을 떠올리는 동안 흑마법사는 오크 두 마리를 가리켰다.

“너하고 너! 가서 확인해봐라.”

뭐라고 킁킁거리며 오크 둘이 칼과 창을 집어들고 아스타틴이 있는 통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는 동안 마법사는 혼자 중얼거리며
방 가운데 탁자에 있는 수정구로 향했다. 제자리에 못박힌 듯 서서 그 말에 귀기울이자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가만…혹시 일이 잘못될때를 대비해…지원을 요청해야지…제길 빚을 지곤 싶지 않지만…”

슬금슬금 뒤로 걸음을 옮기는 동안 서두르지 않는 발걸음과 금속 부딪는 소리가 철컥철컥 다가왔다. 그리고 이제쯤 달려가서 일행과
합류할까 생각하는 순간, 오크 두 마리가 통로가 꺾인 데를 돌아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아스타틴과 떡하니 마주친 오크들은 순간 멍청한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마주보았다. 그리고 한 마리가 엄니가 비져나온 입을 벌렸다.

“Rakuna dasha!”

아스타틴을 뚫어져라 보던 나머지 하나도 생각난 듯 그 고함에 호응했다.

“Rakuna!”

두 오크의 고함과 그들의 뒤에서 일어나는 소란에 쫓기듯 아스타틴은 동료들을 향해 통로를 달려내려갔다. 그런 그의 눈앞에는
무시무시한 광경이 다가오고 있었다. 통로를 가득 차지한 채 돌진하는, 몸에 단 뼈를 덜그덕거리며 우뢰처럼 고함을 지르는 거대한
형체가… 마치 그 분노에 응답하듯 달리는 궤적에 맞추어 벽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깔려버린다. 살해당한다. 죽는다. 순간 그 생각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뒤에서 오크의 노성이—혹은 공포의 비명이?—들려오자
눈앞이 맑아졌다. 아, 지카리! 지카리가 오크를 위협하며 달려오고 있었다. 아스타틴이 멈춰선 동안 지카리는 마치 먹이를 내려다보는
포식자 같았지만 아마도 눈인사인 시선을 보내며 그대로 땅을 쿵쿵쿵 울리며 지나갔다. 지카리를 보고 좀전의 자신만큼이나 멍해진
오크들을 돌아서서 마주보며 아스타틴은 봉을 잡고 주춤주춤 물러났다. 니아와 크세노바, 아시타를 죽인 다크엘프이며 불신해 마지않는
인간이지만, 이 순간은 그의 등뒤에 있다는 사실이 안심이 되는 그들을 향하여.

생과 사가 엇갈리는 이 절대절명의 상황에서 그들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죽음의 무게에 대하여

“한 발자국만 더 움직이면 죽이겠다!!”

아무 걱정없이 마음껏 소리를 질러본 것도 오랜만이었다. 작은 사람, 특히 아이가 겁을 먹거나 심지어 정신을 잃을까 생각할 필요
없이 명치 밑바닥에서부터 소리를 질러대자 가슴이 어딘가 후련했다. 달려가며 도끼날을 벽에 긁는 파찰음도, 주라-크탄(주:카레발리나 섬 남부 해안에 서식하는 용호랑이) 뼈갑옷이 흔들리며 부딪는 소리도
그의 고함을 이기지는 못했다. 하프엘프 청년이 그를 보고 멈춰서자 지카리는 눈빛으로 살짝 목례를 보내며 달려갔다.

그 기세에 오크들은 얼어붙은 듯 멈춰섰지만, 그들의 뒤에서 목소리와 발걸음이 더 들리더니 더 많은 오크가 통로로 우르르
달려나왔다.어림잡아 열 마리는 넘는 그들 앞에 지카리는 떠억 버티며 멈춰섰다. 동공이 확장한 채 콧구멍이 벌렁거리는 그들의 공포의
냄새가 얼굴에 끼쳐왔다. 두려움에서 태어난 공격성으로, 살고자 하는 본능으로 그들은 위협적인 괴성을 질러댔다.

“Kataga! Kataga!”

조금 조용해지면서 앞의 몇이 양옆으로 갈라지며 비켜주자, 방패를 든 놈 몇이 앞으로 걸어나왔다. 지카리와 그 너머의 동료들을
노려보며 그들은 천천히 전진하기 시작했다.

“와봐와봐~ 오는 놈부터 죽여줄게요~”

뒤에서는 아까부터 좀 이상한 아라가 노래하듯 말했다. 돌아보자 그녀는 활시위를 팽팽히 당기고 있었다.

“더 이상 움직이지 마라.”

지카리는 다짐하듯 덧붙이며 도끼를 쳐들었다. 오크들이 지카리의 존재와 아라의 위협에 잠시 주춤하는 것을 보고 그는 순간 어깨가
가벼워졌다. 짓이겨지는 뼈와 살과 피 속에 자신을 잃고 싶지 않았다.

“이 멍청이 놈들아! 뭐하고 있는거냐!”

성마르게 소리지르며 갈색 로브를 입은 마법사가 통로 끝에 나타났다.

“해치워!”

“당신이 대장인가?”

지카리가 언성을 높이며 통로에 목소리가 울리자 마법사는 움찔했다.

“여기있는 모두… 잃을 필요가 없는 목숨이다.”

필요 없이, 더 큰 균형에 대한 생각 없이 어찌 목숨을 취할 수 있을까. 두려움에, 분노에, 쾌락에 겨워서 취하기에는 생명은,
그리고 생명을 위한 죽고 죽임은 너무나 무거웠다. 죽어가던 아내의 마지막 말은 그 뜻이 아니었을까 그는 생각했다. ‘고마워…’
속삭이며 죽어가던 그녀의 마음은.

“돌려놔야 할 것을 돌려놓고 떠나라.”

그는 마법사를 도끼로 가리키며 낮게 웅웅거렸다. 그래, 어쩌면 그의 노력은 헛된 것일지도 몰랐다. 점점 더 폭력과 죽음으로
젖어드는 안힐라스에서는 공허한 이상주의일지도. 그러나 아무리 허무하다 해도 노력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에르-하라의 기억이,
그녀의 죽음이 그에게 남아있는 동안은. 따라서 그가 호흡하는 한…

“하, 리자드맨이 말도 하는 줄은 몰랐군?”

마법사는 신경질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상관없겠지. 죽어라!”

마치 그 말이 신호였던 것처럼 뒤에서 마법사 크세노바가 알 수 없는 언어로 주문을 외쳤고, 빛이 순간적으로 통로를 대낮처럼 환하게
밝혔다. 오크 대부분이 눈을 감싸며 울부짖는 모습에 지카리는 가슴이 쓰려왔다.

결국은…

쉭- 빠르고 예리한 움직임이 그의 옆을 스쳐갔다. 앞에 있던 방패 든 오크가 얼굴에 화살을 박은 채 뒤로 넘어갔다.

다시 이 무의미한 피인가. 다시 깃털처럼 가벼운 죽음인가. 다시…

슬픔과 분노를 넘어 그와 언제나 함께하는 내면의 광기에 차가운 손가락이 닿자 지카리는 눈을 똑바로 떴다. 되도록 빨리, 희생 없이
끝내야 했다. 에르-하라, 동반자여, 사랑이여, 부디 나를…

도끼를 왼손으로 옮기며 그는 서두르지 않고 바로 앞의, 눈을 가리고 괴성을 지르는 오크에게 손을 뻗었다. 갈고리발톱이 난 손이
목을 움켜잡자 오크는 소리지르는 것조차 잊은 듯 굳었다. 아주 조금, 조금만 손을 조이면 지푸라기처럼 간단히 꺾을 수 있을 목뼈가
손에 잡혔다. 전투와 폭력과 고통의 소음들이 귀에 가득 몰려오는 기묘한 합창에 붙잡힌 오크가 두려움에 찬 괴성을 더하는 동안
지카리는 천천히 그를 들어올렸다.

통로 끝에서는 마법사가 집중하며 주문을 외우다가, 크세노바가 외마디 소리를 지르자 끄어억 비명을 지르고 벌벌 떨며 쓰러졌다.
그자의 비명도, 공포에 바지 앞춤이 젖어오는 오크도 감각이 전해오는 정보일 뿐 중요하지 않았다. 지카리는 들어올린 손안의 무게를
앞으로 세차게 던졌다. 앞에 통로를 메운 오크들이 내던진 오크에 깔려 우당탕탕 쓰러지는 것을 그는 감정 없이 지켜보았다. 혼전
중에 가끔 그렇듯 세상이 느려졌다. 크세노바가 아까 걸은 가속 주문과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들이 죽어가고 다치고 있었다. 고통에 찬 비명, 둔탁한 타격음과 뼈가 나뭇가지처럼 부러지는 소리가 하나하나 그에게 부딪쳐 왔다.
지카리는 통로 끝에 쓰러진 흑마법사를 노려보며 달려갔지만, 혼란에 빠진 오크들이 앞에 걸리적거리며 가로막았다. 눈을 비비며
뭐라고 말하는 오크에 걸리고, 쓰러진 다른 오크에게 발이 막혀 더 나아가지 못한 채 지카리는 울부짖었다. 어째서 매번 멈출 수가
없는가? 어째서 이렇게도 무력한가? 에르-하라, 어째서?

두 마리 오크가 두려움에서 태어난 분노에 겨워 비명을 지르며 그를 향해 칼을 휘둘러왔다. 무의미한 감정, 무의미한 폭력. 그들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지카리는 허공을 차갑게 갈라오는 날을 뒤로 물러서며 피했다.

“비켜라!!”

다시 달리는 그의 앞을 오크 세 마리가 가로막았지만, 그가 그 중 가운데놈에게 세게 부딪치자 오크는 소리도 못 지르고 옆으로
날려갔다. 그리고 이제야말로 더 버틸 수 없다는 듯 아직 움직일 수 있는 오크들은 비명을 지르며 그를 지나쳐 달려갔다. 돌아보자
그의 뒤편에 있던 오크들도 출구를 향해 전력으로 뛰어 달아나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이만한 승리는 아주 작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서 손에 무의미한 피를 묻히지 않았다. 다시 확인해봐도
그를 향해 걸어오는 동료들은 모두 무사했다.

‘에르-하라…’

큰 승리가, 싸움과 피 없이 이기는 싸움이 아직 손에 닿지 않는다면 이런 순간이라도 소중하게 품어 안으리라. 머리나 몸에서 화살이
튀어나온 채 다시는 움직이지 않을 오크의 시체가 발에 걸리적거렸고, 패주하는 오크 하나는 부러진 다리를 끌고 작게 낑낑거리며
동료들을 열심히 쫓아갔다.

이제 남은 것은 뒤처리뿐.

지카리는 통로 끝으로 걸어가 그곳에 쓰러진 마법사의 목에 도끼날을 갖다댔다.

“끄으… 네… 네놈… 들…”

눈을 가늘게 뜬 흑마법사가 그를 올려다보며 더듬거렸다. 경련하면서 혀나 입술을 깨물었는지 입에서는 가늘게 피가 흘러내렸다.

“손발을 묶고 입을 막으면 아무것도 못할 겁니다.”

뒤에서 발걸음이 다가오면서 크세노바가 말했다.

“대화를 하고 싶다.”

지카리는 말에 차가운 확신을 담아 흑마법사에게 말했다. 그의 살생에 의미가 있었는지, 그가 살아감과 죽임의 순환을 더럽혔는지 알고
싶었다. 심증은 있었지만, 무지 속의 확신은 눈이 먼 채 달리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장로들은, 그리고 에르-하라는 그에게
가르쳤었다.

“대화아? 죽이면 되잖아!”

아라가 칼을 뽑으며 그의 앞으로 폴짝 나서자 빛이 칼날 위로 차갑게 흘렀다.

“니아가 금방 할게!”

“므우루를 찾아야죠.”

크세노바가 팔을 붙잡자 아라—혹은 니아?—는 깔깔 웃더니 그의 손에서 가볍게 벗어났다. 그녀는 흑마법사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넘어서
안쪽으로 뛰어갔다.

“그러고 보니 이자가 아까 원군을 요청하는 것 같았습니다.”

잠시 조용해진 사이에 아스타틴이 다가서며 낮게 말했다.

“원군…?”

그 말만으로 지카리는 다시 지치는 기분이었다. 다시 의미없는 살육인가. 그러다면 그가 말한 원군이 오기 전에 빨리 이곳에서 떠나야
했다.

통로가 꺾이는 곳, 쓰러진 흑마법사 바로 안쪽에는 예의 그 휘장 몇으로 벽을 장식하고 탁자와 의자 등 가구를 비교적 제대로 갖춘
방이 있었다. 탁자 위에 놓인 수정구 옆에서 조롱를 집어들더니 니아는 짤짤 흔들었다.

“여깄어 여기!”

그녀는 크세노바를 향해 즐겁게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고 크세노바는 흑마법사를 내려다보았다.

“여기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었습니까.”

차갑지도 않고 분노하지도 않은 채, 그저 무표정하게 묻는 크세노바를 보며 지카리는 젊은 인간 마법사의 이런 얼굴은 처음 본다고
생각했다. 이 상황에서 예사로울 수 있는 저 표정은 사냥꾼이 사냥을 하고 직조공이 천을 짜듯 자기 일을 하는 전문가 그 자체였다.
다만 조금 더 심각하고 위험한 사냥이기에 청년의 평소 반짝이던 눈빛에서 웃음기를 앗아갔을 뿐.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사냥꾼은
위험하고, 또한 신성했다. 지카리는 그런 인간 젊은이를 유심히 살폈다.

“잠깐! 사…살려줘!”

조금씩 몸에 움직임이 돌아오면서 흑마법사는 무력한 방어동작으로 한 손을 들어보였다.

“나…난 그냥 스승님이 시키는대로…그…그러니까-”

“스승? 누구?”

여전히 언성 하나 높이지 않고 크세노바는 흑마법사의 말을 끊었다. 흑마법사는 이제 공포에 질려 고함을 질러댔다.

“오…오크들이 전부 한 거야! 난 아무것도 안했다고!”

“거짓~말~ 니가 명령했잖아.”

흑마법사가 주충주춤 엉덩이를 끌며 일행에게서 물러나는 동안 니아는 손에 든 조롱을 들여다보며 걸어왔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조롱에서는 희미한 푸른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지카리는 도끼를 흑마법사의 목에 더욱 바싹 갖다댔다.

“움직이지 마라.”

“거짓말쟁이 아이는 죽어야 하는데…”

니아는 구슬픈 표정으로 허리춤에 꽂은 칼을 내려다보았다.

“사, 살려줘 제발!”

마법사는 이제 손을 맞대고 싹싹 빌었다.

“뭐든지 다 할게!”

지카리는 대답없이 도끼날을 그의 목에다 댔다. 흑마법사는 목소리가 으으.. 하는 공포에 질린 신음으로 잦아들면서 눈만 돌려 그의
눈치를 보았다.

“아까 그 문양은 멜코 상고로드림이라는 흑마법사의 것이라고 했죠?”

아스타틴이 크세노바를 쳐다보자 젊은 마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서 정도는 될 수 있겠지요.”

그는 다시 아무 감정이 없기에 오히려 두려운 눈빛을 바닥에 스멀거리고 있는 흑마법사에게 향했다.

“그 스승이라는 사람은 누굽니까?”

“스… 스승님? 글쎄… 누구더라…”

마법사가 허얘진 얼굴에 식은땀을 흘리며 필사적으로 딴청을 피우는 동안 지카리는 곁눈으로 아라—혹은 니아—가 조롱에서 푸르게 빛나는
작은 형체를 꺼내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까 보았을 때보다 한결 빛이 희미해진 므우루는 니아의 손안에 의식 없이 추욱 늘어졌다.

“어서 대답하는게 좋을 거다.”

목소리에 점점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섞여들며 지카리는 도끼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나는 지금 화가 많이 나려고 하니까.”

아직 대답은 듣지 못했지만 점점 확신이 들었다. 이자가 한 일에는 생명의 신성한 필요라고는 엿보이지 않았다. 그는 눈이 멀어
달리는 것일까? 이것은 광포에 문을 열어주는 분노인가?

“모른다니 별 수 없군요.”

여전히 그 무서울 정도로 태연한 목소리로 말하고 크세노바는 지카리를 올려다보았다. 그 시선에 흑마법사가 움찔하면서 그자는 지카리의
도끼날에 스스로 목을 벨 뻔했다.

“잠깐잠깐! 말할게! 말한다고!”

흑마법사는 손을 내저으려는 모양이었지만, 몸이 너무 굳어서 손바닥을 아주 약간 들어보일 뿐이었다.

“멜…멜코르…멜코르 상고로드림이시란 분….”

구석에서 훌쩍훌쩍 울음소리가 들리자 지카리는 거의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상처입은 어린 생명이 내는 소리… 의식이 없는
므우루를 안고 이제 도저히 아라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니아가 울고 있었다. 아무 수치심이나 참으려는 노력도 없이
그대로 얼굴을 구긴 채, 마치 어린아이처럼.

“샤나 아픈가봐… 정신차려 샤나, 응? 엄마 있으니까…”

지카리는 가슴 한 구석이 아파왔다. 니아의 복잡하게 엉킨 정신 속에 ‘샤나’나 ‘엄마’가 누군지는 모를 노릇이었지만, 슬픔에 빠진
생명체가 위안을 갈구하는 소리란 누구나 다 비슷했다.

“스…스승님?”

그 목소리에 지카리는 다시 흑마법사를 내려다보았다.

“아닙니다 스승님. 제…제가 실수한 건 아니…그러니까…”

그자는 어느새 언색이 새하얗게 질려서는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곳에 없는 상대에게 말하는 것이 역력한 그 눈치에 지카리는 목
뒤의 비늘이 곤두섰다.

“요..용서를 제발!”

공포로 동공이 확장해서 눈이 새까매진 채 흑마법사는 이제 허공을 바라보며 비명을 질렀다.

“스…스승님! 제발 자비를…!”

흑마법사가 목의 도끼는 아랑곳도 하지 않고 몸을 뒤틀자 지카리는 그자의 머리가 잘려나가기 전에 서둘러 도끼를 떼었다. 공중에
차가운 기운이 지나가며 뼈갑옷이 희미하게 덜컥거렸다. 이제 이곳에 있는 이들은 의식도 하지 않는 듯한 흑마법사를 아스타틴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지카리는 한 발짝 물러나 도끼를 챙기고, 혼자 일행과 떨어져 있는 니아를 향해 손짓했다.

“이쪽으로-”

“끄으… 끄아아!”

그 순간 마법사가 완전히 이성을 잃은 절규를 내질렀다. 동굴 안이 급속도로 추워지면서 공중에 악의어린 속삭임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쭈뼛한 그 차가움에 원치 않는데도 시선이 흑마법사에게 내려가자 그자가 눈을 까뒤집은 채 몸을 마구 뒤트는 모습이 보였다.

“Satis superque…(주:라틴어, 아니, 고제국의 언어[…]로 ‘충분하고도 넘치는구나’)”

그 초자연적 공포 속에 크세노바의 목소리는 부드럽고도 낮았다. 그의 차분한 표정, 침착한 목소리는 어둠 속에 한 줄기 빛처럼
흔들리지 않는 존재감이 있었다. 지카리는 저도 모르게 보호를 구하듯 젊은 마법사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Ne plus ultra.(주:고제국어로 ‘더 이상은 없다’)”

크세노바가 손을 들었다가 손바닥을 아래로 향한 채 수평으로 움직이자 손의 궤적에는 분명히 하얀 빛이 따랐고, 공기 중에 무언가가
변했다. 차가운 존재감, 공기를 진동시키던 속삭임이 희미해져 마침내 사라지자 몸이 뒤틀리던 흑마법사는 갑자기 늘어지면서 바닥에
엎어졌다.

“휴…”

크세노바의 작은 한숨이 침묵을 깼다. 그는 마치 식사가 잘못 오기라도 한 표정이었다.

“위험한 자가 적이 된 것 같군요.”

그 말에 동의하면서도 단지 ‘위험하다’는 표현에는 묘하게 만족을 못하고 있는데 니아가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성큼성큼?
흑마법사에게서 고개를 들어서 보자 그녀는 얼굴이 차갑게 굳은 채 짜증스러운 기색으로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니아—혹은 아라?—는 므우루를 옆의 아스타틴에게 떠넘기듯 밀치고는 흑마법사 앞에까지 와서 쓰러진 형체를 발로 쿡쿡 찔렀다.

“뭐지, 이 자는?”

꿈틀거리는 마법사는 죽지는 않은 모양이었지만, 정신을 차리지도 않았다. 아라는 한쪽 무릎을 꿇더니 그의 머리칼을 붙잡아 고개를
뒤로 젖혔다. 마법사는 눈꺼풀이 희미하게 움직였고, 파랗게 질린 입술 사이에서는 약하게 숨이 새어나왔다.

“흑마법사라는 자들은… 전부 이러한가요…?”

아스타틴이 두 손에 므우루를 조심스럽게 감싼 채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묻는 말에 문장부호를 붙이듯 아라는 손을 뒤로 젖히더니
흑마법사의 얼굴을 세게 후려쳤다. 짝! 소리가 크게 울리고, 마법사는 입안에 고인 피를 커헉 뱉어내며 주춤주춤 눈을 떴다.

“스승에게 버림받은 일회용 도제랄까요.”

아스타틴과 지카리가 잠시 얼어붙은 동안 크세노바는 벽에 건 그림을 감상하는 태도로 말했다.

“그래?”

다크엘프는 돌아보지 않고 여전히 흑마법사의 머리칼을 붙잡은 채 말했다.

“이젠 소용이 없다는 말이지.”

챙… 그녀가 칼을 뽑자 지카리는 생각 이전에 몸이 움직여 그녀와 마법사 사이에 팔을 밀어넣었다. 아무리 동료라 해도 필요없는
살생을 허용할 생각은 없었다. 거의 동시에 크세노바가 그녀의 옆으로 한 발짝 다가섰다.

“아뇨, 아직입니다.”

젊은 마법사는 한 손을 들었다. 정중히 말리는 동작이기는 했지만, 언제든 주문의 손동작이 될 수도 있으리라.

“기억을 복구하는 마법도 있으니까요.”

마법사와 지카리를 번갈아 보며 아라는 칼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다가 표정이 변하지 않고 칼을 허리춤에 꽂았다.

“그렇다면 데리고 가자.”

아라가 마법사의 머리칼을 잡은 손을 놓자 마법사는 얼굴이 지카리의 팔에 스쳤다가 퍽! 하고 돌투성이 바닥에 박혔다. 옆의 땅에서
아무 천조각이나 집어들어서—묻은 얼룩은 오크 피 같았다—그녀는 흑마법사의 고개를 우악스럽게 돌린 후 살짝 벌어진 입에
쑤셔넣었다.

“페어리의 상태가 좋지 않아. 이곳에서 언제까지나 지체할 수는 없다.”

“아까 저놈이 페어리들에게 빼앗은 마법석은 어떻게 하죠?”

므우루를 안은 채 아스타틴은 흑마법사를 노려보았다.

“안쪽을 한 번 조사해봐야겠습니다.”

말하고 방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크세노바를 아라는 흘깃 돌아보았다.

“빨리 하도록.”

“서둘러서 나가는 것이 좋겠죠.”

아스타틴이 맞장구쳤다.

“아까도 말했지만 원군을 요청하는 것 같았으니 곧 들이닥칠 테고요.”

크세노바가 뒤편에 입구를 찾았는지 들어가는 동안 아라는 지카리에게 밧줄을 얻어 마법사의 손발을 꽁꽁 묶었고, 지카리는 배낭을 멘 뒤
밧줄로 잘 포장한 마법사를 어깨에 걸쳤다. 이제 떠날 준비가 되었다. 휘파람을 불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그는 마법사가 사라진
문으로 향했다.

“마무리가 되었으니 떠나…”

문간에 잠시 멈추었다가 이제야 천천히 걸어들어가는 크세노바의 머리를 넘어 안쪽 방의 모습이 보였다. 어느새 지카리의 걸음은 멈추어
있었다. 이 안쪽 방에는 바깥 동굴처럼 오크가 버린 잡다한 쓰레기가 흩어져 있었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저분하게
흩어진 수정구나 유리병, 펜과 책 같은 도구들도 크게 눈길을 끌지는 않았다.

그러나 작업대에 수북히 쌓아놓은 피투성이 페어리 날개, 그리고 큰 유리 용기 속 액체에 담아놓은 여러 종족의 시체에서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작은 친구들이 즐겁게 재잘거리며 저 날개로 웅웅웅 날아다니던 기억에, 유리병 속에 소리없는 비명에 입을 벌린 채
내장이 배 밖으로 끄집어내어진 페어리의 모습에 배에서 뜨겁게 치밀어오르는 것은 구토감일까, 분노일까. 내면의 광기가 다시 창백하고
차가운 손을 저어보였지만, 그는 그 유혹을 외면하며 버텼다.

“마법사, 언제까지나 거기서…”

날카롭게 말하며 들어오던 아라도 흠칫 멈춰섰다. 뒤늦게서야, 마치 나쁜 꿈을 꾸는 기분으로 지카리는 벽에 묶인 채 울부짖는
오크들이 눈에 들어왔다. 살이 잿빛으로 변색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은 정상 같지 않았다. 아마도 좀비화한 결과? 곁눈으로 실험실
광경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아스타틴이 보였다. 끔찍한 광경을 감추듯 그가 끌어안은 므우루는 날개만 아주 희미하게 저으며
꺼질 듯 희미한 푸른 빛을 냈다.

아라가 뭔가 중얼거리며 비틀 나가는 동안 지카리는 어깨에 멘 인간 흑마법사의 무게가 갑자기 무거웠다.

“이자가 이렇게 한 것일까?”

크세노바에게 묻는 목소리가 갈라지고 쉬어서 나왔다.

“그건 차후에 알아봐야겠지만…”

젊은 마법사는 반대쪽 벽의 좀비 오크에게 손을 저었다.

“일단 이것들부터 좀 치워주시렵니까?”

지카리는 망설이며 으르렁거리는 좀비들을 마주보았다. 분명 살아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들은…

그때 아라의 부름에 응답했는지 그녀의 포식자 친구, 사냥꾼의 혼을 한 검은 그림자가 방안에 뛰어들어왔다. 아라는 아무렇게나
버려진—그들의 신성한 죽음을 마치 쓰레기처럼 그렇게—피묻은 페어리 날개를 천조각에 꼼꼼히 싸서 아사나스의 안장주머니에 넣었다.
줄지은 오크 좀비를 사냥꾼이 노란 눈으로 노려보는 동안 아라는 활에 화살을 매겨 하나씩 쏘았다. 크어어.. 하며 늘어지는 그들을
보며 지카리는 망설였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가. 저 부자연스러운 ‘생명’을 끊어주어야 하는가, 아니면 저런 생명이라도 삶의
고리 안에 있는가. 세상은 이렇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그에게 내놓곤 했다.

“흑마법사도 잡았고… 대충 해결된 거 아닌가요.”

그와 생각이 비슷한 듯 젊은 하프엘프 친구가 아라에게 말했지만, 그녀는 혼자 뭔가 중얼거리며 다시 시위를 당겼다. 핑- 화살이
날았고, 또 다른 좀비가 부패해서 미적미적 흐르는 피를 쏟으며 늘어졌다.

“단기적으로 보면 그럴 수도 있겠죠.”

서랍을 열고 선반을 뒤지며 크세노바가 정신이 팔린 투로 대답했다.

”’저런 걸’ 생물로 봐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크세노바가 계속 마법사의 악몽 같은 연구실을 뒤지는 동안 아라는 칼을 들고 좀비들에게 다가가 화살을 회수했다. 잿빛으로 부패한
장기가 묻어나오며 썩은내가 진동하자 작은 코를 찡그리며 그녀는 화살촉을 그들이 입은 누더기 옷에 대충 닦았다. 그 냄새에 지카리는
다시 분노인지 구토인지 모를 느낌이 치솟으면서 어깨에 멘 마법사를 들썩여 단단히 잡았다. 그는 다짐하듯 말했다.

“이게 너의 짓이라면, 깨어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에르-하라, 그의 아내라면 이런 상황에 분노하지 않고 지혜와 인도의 말로 마음을 어루만져주리라. 그에게는 그럴 지혜가 없었다.
지카리는 갑자기 가슴이 저릴 정도로 그녀가 그리웠다.

마법사가 서류나 물품 몇 가지를 대충 챙기는 동안 갑자기 사냥꾼, 가우르가 밖을 보며 으르렁거렸다. 그가 아라의 옷깃을 입으로
잡아당기자 그녀는 역시 바깥쪽을 내다보았다.

“아, 이런.”

하프엘프는 므우루를 조심스럽게 안으며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지카리는 흑마법사의 무게를 고쳐잡았다.

“아직인가, 마법사?”

“나가죠.”

마법사만이 차분한 채 손을 젓자 한쪽 쓰레기더미에 불길이 일었다. 빠르게 퍼지는 불길에 머리와 로브가 흔들리며 그는 걸음을
옮겼다.

“가자.”

앞서가는 아라는 시위에 다시 화살을 매겼고, 아스타틴이 그녀를 바싹 쫓아나갔다.

“부디 명복을…”

크세노바는 말하며 점점 불길이 오르는 실험실을 한 번 돌아보았다. 매캐한 공기에 기침하며 마법사는 서둘러 나갔다.

흑마법사를 지고 나오다가 지카리는 한 번 돌아보았다. 만족을 모르는 진홍의 포식자가 마법 도구를, 책을, 그리고 다른 슬프고
잔혹한 유물들을 집어삼키는 것을 잠시 지켜보던 그는 말없는 기도를 올리며 몸을 돌렸다. 잠시 나쁜 기억처럼 그를 쫓아오던 불길과
연기는 먹을 것이 없어지자 곧 주춤했고, 지카리는 그 불구덩이를 등뒤에 두고 나왔다. 이미 머리에 새긴 기억을 지울 것은 전투의,
광기의 불길밖에 없다는 생각이 가슴 한 구석을 짓눌렀다.

소감

지카리 시점을 처음으로 했다가 지카리라는 인물의 원동력이랄까, 동기를 잘 못 잡아서 많이 헤맸습니다. 무랑님하고 많이 얘기하면서 마침내 인물의 실마리가 잡히니 신이 나더군요. 저는 지카리의 인물 방향을 무심히 겉으로 드러나는 ‘연민’으로 잡았었는데, ‘살생의 신성함’이라는 좀 엉뚱할 수도 있는 방향으로 잡으니 덜 전형적이고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네요. 지적 주시고 상담해주신 무랑님께 감사드립니다~

그 외에 크세노바의 마법사적인 면모라든지 위협적인 점을 표현하는 것도 재밌었습니다. 플레이 로그 때부터 그랬지만 아라-크세노바 대 지카리-아스타틴의 매파와 비둘기파(?)의 전선 형성도 흥미로웠고요. 그 외에 아스타틴이 동료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느끼는 것은 역시 위험은 사람을 가깝게 묶어준다는 반증인 겁니다. 삭풍님께서도 캠페인을 통해 동료애나 전우애를 표현하고 싶다고 하시기도 했고요.

이오닉스 1화 (7)~(8): 추적, 동굴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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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

하프엘프는 마치 오크들이 눈앞에서 달리고 있는양 망설임 없이 흔적을 따라갔다. 젖은 흙에 발자국 하나, 꺾인 나뭇가지에 걸린
천조각을 유심히 살피며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쫓아가는 그의 실력은 따라가는 일행에게도 신뢰를 주었다. 그는 오히려 흔적이 너무
뚜렷해서 유인책이 아닐까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그럴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함정일 가능성이 있다면 신중할 수 있을 뿐
쫓아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것이 인질이 잡힌 어려움이기도 했다. 아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서쪽 산으로 기울어가는 해를 향해 두어 시간쯤 걸었을까, 가는 길이 점점 오르막길이 되면서 그들은 나무와 풀섶이 빽빽한 작은 산의
산기슭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중턱쯤 와서 아스타틴이 멈추어서자 그의 시선을 쫓은 아라는 150m쯤 위에 인공 구조물을
발견했다. 작은 동굴을 2m 정도 높이의 조잡한 나무 울타리로 대충 두른 중간중간에 나무로 대충 기초를 쌓고 작대기와 가죽으로
위를 가린, 초소라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엉성한 것들이 세 개 있었다. 초소마다 오크가 둘씩 들어가 있었지만, 아직 일행을
발견하지는 못한 것 같았다.

“흔적은 저곳으로 이어지네요.”

아스타틴은 동굴을 가리키며 속삭였다. 그는 손을 들어 기다리라고 신호한 후 조심스럽게 몸을 낮추어 나무와 덤불에 몸을 감추며
울타리에 다가갔다. 그런 그를 기다리며 아라는 초소를 어떻게 통과하면 좋을지 생각했다. 최소한 바로 주변은 시야를 확보할 생각을
했는지 울타리에서 20m 거리까지는 나무나 큰 풀섶이 없었다. 숲 가장자리에서 울타리 문까지는 오크들이 다닌 흔적인 듯 풀이 얼마
없는 길이 보였다. 문 외에 딱히 들어갈 입구는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몸을 숨길 장애물이 없는 저 구간을 어떻게 눈에 띄지
않고 건너느냐, 그리고 일단 건너면 어떻게 들어가느냐. 정 방법이 없다면 그냥 정면돌파할 수도 있었지만, 안에 적이 몇이나
있는지도 모르고 저쪽이 고지를 점거한 상황에서 왠만하면 피하고 싶은 선택이었다.

일단은 정보가 필요했다. 마법사가 뭔가 쓸 만한 마법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면서 아라는 조용히
아스타틴이 상황을 보고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비탈을 되돌아 내려오는 아스타틴의 모습이 나무 사이로 간간히 보였다. 꽤 가까이 올 때까지 몰랐던 것을 보면 몸을 감추는
데는 익숙한 모양이었다. 일행이 모인 곳에 바싹 다가온 아스타틴은 작게 얘기해도 들리도록 손짓으로 그들을 불러모았다.

“저것들이 바보라서 다행이군요.”

그가 건조하게 말했다.

“초소에 있는 놈들은 자고 있어요.”

“잔다고?”

지카리가 확인하자 아스타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라는 헛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았다. 어쩌면 울타리나 초소 꼴을 봤을 때부터
짐작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돌아들어갈 곳은 있습니까?”

마법사 크세노바가 묻자 아스타틴은 어깨를 으쓱했다.

“보이진 않았어요. 좀 더 들어가봐야…”

“가자.”

아라는 돌아서서 울타리 쪽으로 향했다. 저것들이 자는 것이 사실이라면 들어가기는 의외로 쉬울지도 몰랐다.

“잠을 깨우지 않게 조심해서 들어가죠.”

아스타틴이 말하며 뒤를 따랐다.

그들은 숲 가장자리까지 가서 울타리와 초소를 내다보았다. 역시 초소의 오크들은 자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정말 함정은 아닐까?
하지만 어차피 함정이라 하더라도 들어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울타리를 통과하는 방법은 문을 통하거나 넘어가는 것밖에 없어보였다. 아니면 땅이라도 파야겠지만, 그럴 준비는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문은 울타리 전체와 마찬가지로 조잡해 보이기는 해도 굳게 닫혀 있었고, 밖에서 열려면 완력이라도 써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하면 오크들이 깨어나겠지.

“마법으로 넘어갈 수 있겠는가?”

마법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좀 어렵겠지만 넘어갈 수는 있습니다. 문제는 저 녀석들이 그걸 보고 있느냐겠죠.”

그는 지카리의 덩치를 한 번 훑어보고 덧붙였다.

“힘도 좀 들긴 하겠군요.”

“혹 안의 모습이 보이십니까?”

아스타틴이 지카리에게 묻자 지카리는 울타리 쪽을 건너보더니 나무 밑에서 벗어나 천천히, 묵직한 걸음을 옮겼다. 지켜보며 아라는
혹시 들킬까봐 가슴을 졸였지만, 다행히도 눈치를 챈 기색은 없었다. 물론 유인책이 아니라는 가정이었지만. 이윽고 다른 일행들이
따라가는 것을 보고 아라도 천천히 숲에서 걸어나와 울타리로 다가갔다. 적에게 보이는 위치로 나오자 갑자기 심장이 세차게 뛰면서
모든 감각이 예민해졌다. 무엇 하나라도 잘못되면 이곳에서 그냥 죽을 수도 있었다. 아라는 그 두려움을 소중히 받아들여 품었다.
삶이 칼날 위에 한없이 위태로운 이 순간의 비할 데 없는 선명함을.

“깨어있는 녀석들이 조금 있네만…”

드래고니안은 돌아보지 않고 낮게 울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울타리 너머에서는 거친 목소리로 전혀 모르겠는 말을 고함치는 것이
들렸다.

“사이가 좋지 않은 모양이군.”

속삭이는 소리가 살짝 쉭쉭거리며 지카리공은 조용히 덧붙였다.

“뚫고 들어갑니까?”

크세노바가 묻자 지카리공이 반문했다.

“다른 방법이 있나?”

“잠이라도 재울 수 있으면 좋겠지만.”

말하며 아라니아카는 오크들이 잠들어 널부러진 초소를 흘깃 보았다. 활로 영원한 잠을 재워주고 싶었지만, 깨어있는 놈들이 그 모습을
보았다가는 나머지를 깨우고 지원군을 부를지도 몰랐다.

“지카리공.”

조용히 부르자 지카리는 그녀를 돌아보며 묻지 않은 질문에 대답했다.

“둘이 깨어 있네.”

둘… 하나인 것만은 못했지만 해볼 만했다. 아직 이쪽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으니 갑자기 공격이 들어가면 대응을 못할
가능성도 충분했다.

“둘을 한꺼번에 죽이면..”

드래고니안의 연녹색 눈이 그녀가 잡은 활을 향했다.

“할 수 있겠나?”

“해보겠습니다.”

그녀는 한 번 끄덕였다. 해내야 하는 일이었다. 배운 대로 심호흡을 해서 손이 떨리지 않도록 심장박동을 가라앉히고 아라는 말했다.

“들어올려 주시겠습니까?”

드래고니안에 대해 들은 전설이 사실이라면, 또 그의 팔과 어깨에 불거진 힘줄과 근육을 보아도 아라를 어렵잖게 들어올릴 수
있으리라. 또 활을 쏠 만큼 흔들림 없이 받쳐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지카리는 망설이지 않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라는 마치 그가 자세를 낮춘 것이 아니라 자신이 키가 커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어깨에 타게.”

드래곤의 사절을 마치 계단에 오르듯 탄다는 점에 마음이 불편했지만, 지금은 꼭 필요한 일이었다. 그녀는 목례하고 그의 무릎을 밟고
올라가 어깨에 앉았다.

“감사합니다.”

“잠시만.”

돌아보자 마법사는 손짓하며 뭔가 중얼거렸다. 공간이 잠시 일그러진다 싶더니 갑자기 세상이 느려졌다. 숲에 부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도, 뒤에서 지켜보는 동료들도 마치 물 속에서 움직이듯 형편없이 느렸다. 그러나 마법사가 손을 내리는 속도는 정상이었다.
지카리가 그녀를 태운 채 일어나는 속도도 마찬가지.

땅이 멀어지자 아라는 순간 눈을 꼭 잡으며 지카리공의 어깨를 꽉 잡았다. 아아, 높은 곳에는 아무래도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엘프
그 미친 것들처럼 날짐승을 타고 하늘을 나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땅이 저 밑에 멀어지자 밑에 받치는 것이 아무것도 없이
떨어져버릴 것이라는 오랜 공포감이 몰려왔다.

이윽고 그녀는 억지로 눈을 뜨고 느려진 세상을 내다보았다. 넓은 범위를 느리게 하기는 훨씬 어려운 일이었으니 아마 그녀와 지카리가
빨라지는 주문을 걸었을 것이다. 그녀는 다시 심호흡을 하며 손을 진정시키고, 드래고니안의 비늘투성이 어깨를 잡은 손을 억지로
풀며 허리춤의 화살통에서 화살을 꺼냈다. 지카리공은 신기한 듯 시선을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마법인가? 썩 유쾌하진 않지만..”

크세노바는 뒤에서 조용히 덧붙였다.

“효과는 1분 정도입니다.”

1분이면 충분했다. 잡동사니와 음식찌꺼기가 지저분하게 흩어진 안쪽 마당 가운데 한놈은 웃통을 벗고, 또 하나는 갑옷을 벗고 옷만
입은 채 치고받고 싸우는 두 오크가 눈에 들어왔다. 그 중 울타리에 비스듬히 향하고 있는 반나신의 오크를 노려보며 시위에 화살을
매기고 아라는 긴 숨을 내쉬며 시위를 당겼다. 아마 주문의 영향권 밖에서는 엄청나게 빠른 움직임 같으리라. 호흡을 멈추고 그녀는
시위를 놓았다. 1m쯤 날아가고는 갑자기 느려진 화살의 궤적을 그대로 눈으로 따를 수 있었다.

아슬아슬했다. 화살은 그녀가 노린 오른편 오크를 비껴갈 뻔했지만, 놈은 결정적인 순간에 동료에게 달려들다가 화살에 스스로 몸을
던진 꼴이 되었다. 맨가슴을 관통당한 오크는 뚝 걸음을 멈추더니 그윽..거리며 아주 천천히 뒤로 쓰러졌다. 쓰러지는 투욱..
소리는 늘어지면서 낮았고, 땅에 닿자 먼지가 느릿느릿 피어올랐다. 상대방 오크는 어안이 벙벙해서 멈춰섰다.

“Gurash?”

다시 운에 기댈 수는 없었다. 어차피 시간은 이쪽 편이라고 자신을 타이르며 아라는 이번에는 한 호흡 동안 정지하며 남은 오크
쪽을 겨누었다. 오크가 돌아서기 시작했을 때 시위를 놓자 화살은 등으로 천천히 파고들어갔다. 놈이 등을 둥글게 꺾으며 고개를
젖히고 소리없는 절규에 누런 이 가득한 입을 크게 벌리는 동안 화살은 가슴으로 뚫고 나오며 공중에 핏방울을 흩뿌렸다.

아라는 지카리의 어깨에서 울타리 너머로 몸을 날렸다. 다른 오크가 깨어나든 깨어나지 않든 빨리 안에서 문을 열어야 했다. 뒤에서
크세노바가 급하게 뭐라고 중얼거리자 다시 세상의 속도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떨어지는 것은 싫었지만 땅이 가까워오자 안심이 되었다.
막 착지하려는 찰나 시야 가장자리가 어두워지면서 잠깐 기다려 지금은 아직

동굴 앞에서

폴짝 데굴데굴~ 니아 착지! 10점 만점에 10점이네.
왜 10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똑똑한 니아 과자 받아요~ 으흠, 뭔가 문을 열어야 했지? 아라는 내가 바보인 줄 알지만~
니아는 사실 똑.똑.해. 정말루 정말로. 문 열어야 하는 거 알거든? 살금살금 하는 것도 알고. 옆에 오크 아저씨들은 계속 자네.
자, 목에 바람구멍을 뚫어줄게요. 자, 아저씨도. 그렇게 하면 어울리죠? 나 왔다고 일어나지 마요, 편하게 편하게 있어요.

영차영차. 빗장을 들면 문이 열리겠지. 자 조용조용, 죽은 아저씨들이 못 듣게. 지카리군같아가 문을 여는 동안 니아는 나머지
아저씨들도 재웁니다. 경비 서다 자면 안 돼요! 떼찌! 푸욱. 떼찌! 푸욱. 아, 이제 초소가 피투성이가 됐네. 다 아저씨들
때문이야. 피가 너무 많으니까, 꼭 피로 채운 주머니 같잖아. 또 찔러도 또 나오네? 와, 정말 많다. 니아가 좀 비워줄게요.
이제 시원하죠?

폴짝폴짝, 랄라랄라. 못생긴 오크 아찌 또 죽여줄까요? 예, 죽여주세요! 어머, 예의바르기도 해라. 어, 아저씨는 왜 깼어요. 더
자요, 네? 자, 이렇게 가슴에 칼을 박아주면 잠이 잘 오죠?

내려가니까 지카리군같아가 뿔났나봐요. 그럴 필요까지 있나? 있어? 있어? 재밌는데 지카리군도 해요~ 얼굴이 끈적끈적. 니아는
고양이세수 할 거에요! 니아아아옹 냐옹. 지카리군같아는 쳐다보지도 않네. 왜요? 왜요? 왜요? 왜요? 죽이니까 싫어? 죽이지 않고
사는 게 있어? 나에게는 선인 것이 다른 어떤 존재에게 악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어? 선이자 악인 그 위대한 게임의 모든 것을
긍정하지 않고 당신이 자연의 사자라고 할 수 있어? 없어? 있..어?

꼭 죽일 필요는 없어, 예쁜아이? 알았어, 더 안 죽일게. 어차피 더 죽일 게 없어, 히잉. 내 화살이나 돌려줘요. 필요하단
말야. 죽일 게 나오면. 더 더 더.. 화살촉이 상한 것 같아. 다시 죽여버리고 싶네. 아저씨들 잠깐 살아나지 않을래요?

어? 목소리다! 다들 숨바꼭질 하네! 니아도 끼워줘요. 잘 숨을게요, 정말로! 술래 온다! 이쁜머리가 이번에는 좀 힘들대. 정말?
우릴 찾기 전에 우와아~ 잡아버리면 되잖아. 어, 술래가 화났어. 화나기 전에 말 좀 걸어주지. 따돌렸다고 이제 놀자고
쫓아오잖아. 나비 왔어? 니아 손 좀 닦을게. 슥슥. 니아는 똑똑한 아이야.

온다온다, 뛰어와! 오크다! 이쁜아이가 붕붕붕 퍼억-! 아프겠다. 또 있어! 여기 오크 가족 사나보다. 엄마 아빠 아기 오크.
오크 세 마리가 한 동굴 있어 아빠 오크 엄마 오크 아기 오크~

어, 조용하라고요 지카리군같아? 나 소리냈었나? 미안미안~ 조용할게요. 쉬잇. 어, 손가락에 피 있다. 빨가면 사과 사아과는
맛있어 먹어봐? 먹어봐? 할짝 우에엑! 퉤퉤. 오늘의 교훈, 아빠오크피는 먹지 맙시다. 하지만 아직 엄마오크 아기오크건 못
먹어봤으니까, 맛있을지도 몰라! 덥지도 차지도 않고 따악 맞으면 되겠지? 따악 다 맞아볼래요?

퉁! 어, 공기가 흔들려. 저 오크는 왜 떨어? 추워? 무서워? 난 항상 무서운 걸. 아라 그 멍청한 미친 계집이 나한테 다
버려버렸어, 그 많은 목소리와 두려움들을. 이 안은 조용하지 않아. 조용하지… 않아… 무서워.

키라키라키라키라.. 술래가 또 온다. 지카리군같아가 그래, 강! 행! 할 수밖에 없대. 강행! 강행! 죽이자! 오크아저씨들 영원히
안 무섭게 해줄까요? 춥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게?

쿵쿵쿵쿵 쿵쿵쿵쿵. 죽으려고 달려온다. 심장이 죽으려고 뛰어. 지카리군같아가 도끼를 들어요. 와아, 산이 움직여. 폭풍우가,
해일이 앞을 막았어. 콰앙! 콰앙! 산과 번개와 바다가 내리치면 무거울 거야, 그치? 눈물날 만큼 아플 거야. 혼자 갇혀버린 어둠
속에서 울부짖을 만큼, 아파 아파 아파…

눈 감으래. 눈 감으래! 깜짝 선물 줄 거야? 언제 뜨면 돼? 언제 언제?

눈 감아도 세상이 번쩍여요. 하늘이 갈라졌어요. 오크가 아야 해요. 어어? 눈이 아야했나봐. 히히. 하하하하하. 안아프게
해줄게요. 눈 아야 고쳐줄게요. 니아가 침 바르면 다 나아~ 아니면 화살침 한 대 콰악! 놔주면. 죽으면 다 낫잖아, 응? 그래도
되죠?

아빠 오크는 피투성이…

산이 무너져내려요. 산사태가 포효하며 달려가서 오크들을 삼켜요. 크아아아아.. 우직. 철퍽. 퍼억. 어? 오크가 둘이다. 위만
있는 오크 하나, 아래만 있는 오크 하나. 위만 있는 오크 얼굴은 놀란 것 같네요. 놀랐지, 응, 놀랐지? 용용용용 용의 조각이
그렇게 무서울 줄 몰랐지? 자기는 파리 하나 못 죽일 것처럼 성인군자연하던 저 위선자한테 한 방 맞았지?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본원적인 공포에 심장이 벌렁벌렁하면서 눈물까지 찔끔 났지? 응? 내가 그러니까. 내가 그러니까!

엄마 오크는 죽었어…

피융 피융- 나는 정의의 니아시다. 어엇? 배를 붙잡고 쓰러지네요. 배아파? 아프다고 내장을 꺼내면 못써. 그럼 죽잖아~ 히히.
죽는대! 죽는데!

덥썩! 나비가 나가신다. 우적우적. 맛있쪄 나비? 와작! 꿀꺽. 잘도 먹네 이쁘기도 해라~ 음식 뺏지 말라고 아앙 물고선 눈
굴리는 것좀 봐. 걱정마요 나비~ 천천히 먹어요. 아무도 안 뺏으니까.

붕붕붕 우웅우웅. 이쁜아이가 작대기를 돌리니까 바람이 나네요. 이쁜머리가 손을 요렇~게 하니까 공기가 오크를 벌벌벌 때려요. 착한
아이는 사이좋게 놀아야지! 자, 이렇게. 피융. 이번엔 목이 갈라졌네. 쿠웅쿠웅. 지카리군같아가 오크를 가루로 빻아요.

아기 오크는 너무 아파요…

이제 놀 사람이 아무도 없어, 없어, 없어. 살아있어요? 살아있으면 죽여줄게요, 안 아프게. 나비가 퉷퉷 머리카락을 뱉네요. 피도
맛없고 털도 맛없나봐.

이제는 조용해요. 내가 가지고 싶은 그런 고요가 이곳에는 가득해요. 살점이랑 뼛조각이 흩어진 이 피투성이 진흙 위에 그냥 누워서 이
평화에 묻히고 싶어요. 하지만 그러면 안 되겠죠, 그건 정상이 아니니까.

용의 파편 아저씨는 이제 슬퍼 보이네요. 다른 인연으로 만나자고, 그때는 죽고 죽이지 말자고. 만나긴 어떻게 만나? 죽었는데.
죽였는데. 이제는 꿈에서밖에 만날 수 없어요. 깨어나면 슬퍼서 엉엉 울지도 몰라요.

샤나야…

아야! 아야! 아파요.

아파요…

내가 미쳤다고, 이쁜아이? 안타깝다고요, 지카리군같아? 내가 미쳐? 미친 건 아라야. 아라! 견딜 수가 없어서 날 어둠으로 내쫓은
그 미친년이 멀쩡한 얼굴을 하고 살아가고 있어. 난? 그녀가 참을 수 없는 모든 걸 끌어안고 언제까지 혼자 걸어가? 샤나,
엄마는 어떡해?

놀 사람만 있으면 이 안은 조금은 조용해져요. 니아는 똑똑하니까, 미치지 않았으니까 위험하고 중요한 일도 할 수 있어. 므우루를
찾자. 므우루! 므우루! 가자 이쁜머리, 이랴!

동굴이 휘잉~ 한숨을 쉬어요. 외롭고 차갑고 더러운 이 바람을 따라가면 그 끝에 내 안의 목소리들을, 하 많은 아픔을 잠재울 것이
있을까요. 견딜 수 없는 것을 마침내 견디게 될까요.

“가시죠.”

가요, 이쁜머리. 내려가요. 너와 나와 모두의 영혼에 있는 그 동굴보다 한결 자비로운 저 어둠 속으로. 아아, 내려가요. 저곳은
조용할지도 모르니까.

기묘한 일행, 대륙을 가로지르며 길고 긴 하루를 보낸 다섯은 땅에 널부러진 시체를 지나 동굴에 발을 들여놓는다. 불신과 불안,
불확실성 속에 토끼굴의 문턱을 넘은 그들의 여행은 이제 막 시작이다.

소감

이것으로 안힐라스 1기 캠페인 1화: 기나긴 하루의 기나긴 소설화가 끝났습니다. 나중에는 랜돌프 외전까지 있지만 그쪽은 먼저 본편부터 하고 써야겠군요. 1화 (7)과 (8)은 분량도 그렇고, 시점상 짝을 이루기도 해서 함께 올렸습니다. 추적자로서 아스타틴의 능력이 드러난 점이 마음에 들었고, 아라의 궁술, 크세노바의 마법, 지카리의 힘 등 일행의 장기가 전반적으로 잘 나타난 대목 같습니다. 전체적으로 이 대목의 플레이는 전술적으로 생각해서 문제를 해결해가서 즐거웠었죠. 활 쏘는 거나 시간마법의 효과 묘사 등이 신경쓰이면서도 재밌었던 기억이 납니다.

전투는 누구 시점으로 할까 좀 고민하다가 결국 니아로 낙착을 봤습니다. 쓰기 귀찮아서 자포자기한 걸지도(..) 모르지만 니아는 일행에게 문을 열어주었고 또 궁수로서 멀리서 전투를 조망할 수 있었던 인물이기도 해서 시점인물로 가장 적합하기는 했습니다. 게다가 한 번쯤은 이 인물의 머릿속을 소개하고 넘어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더라고요. 자주 들여다보는 건 정신건강에 바람직하지 못하겠습니다만… 의식의 흐름밖에는 이 인물의 시점을 활용할 길이 별로 없어서 그렇게 해봤는데 꽤 흥미로웠습니다. 정보전달 면에서는 좀 명확성이 떨어지는 게 아쉽지만, 그런 점도 이 기법의 재미겠지요.

겉으로는 마냥 헤헤거리는 니아가 내면은 의외로 어둡다고 무랑님이나 오체스님이 말씀하신 것도 기억에 남네요. 사실 저도 좀 의외였습니다만, 어찌보면 당연하기도 합니다. 니아라는 인물은 원래 인격인 아라가 노예생활과 딸의 죽음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일부를 떼어내서 생겼습니다. 아라가 추방한 감성과 충동성, 상처와 취약점의 혼합인 니아는 이성 없이 감성만 있는 불완전한 파편이고, 아라 역시 분노 외에는 감성이 별로 안 남은 불완전한 상태에서 상처를 회복하거나 제대로 성장하고 변할 수 없게 되어버렸지요. 그래서 아라에 대한 니아의 원망은 근거가 있습니다.(주:물론 이 설정은 다중인격에 대한 과학적 분석과는 별개입니다. 다중인격 자체가 북미 외에는 거의 기록이 없는, 진위 자체가 논란이 있는 병이기도 하고요.) 그런 아라가 상처입은 자신을 직면하고 극복해야 그녀의 존재는 완전해지고 회복도 하겠지요. 그건 니아에게는 개체로서의 죽음인 동시에 온전한 삶의 재개이겠고요.

결국 모든 재미있는 이야기에는 외면의 이야기와 내면의 이야기가 함께 가는 것 같습니다. 겉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면 사건의 나열일 뿐이지만, 인물이 변하는 그 내면의 여행이 함께한다면 사건은 의미가 생기고 이야기가 되지요. (이론적 기반이 있는 얘기는 아닙니다, 제 생각일 뿐) 그래서 동굴은 물리적 동굴이지만 동시에 존재에 난 구멍이며 마음의 어둠이기도 하고, 일상의 공간에서 혼돈으로 가는 토끼굴의 입구이기도 합니다. 그 너머에서 우리의 일행이 어떤 이상한 나라를 지나 결국 자신의 핵으로 돌아올지 저는 그들의 동행으로서, 그리고 서기로서 많이 기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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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닉스 1화 (6): 재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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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쯤 후, 허탈하고 얼굴이 굳은 채로 그들은 페어리 마을로 가는 길을 되돌아오고 있었다. 부탁받은 아카마카 열매는 구하기는
했다, 비록 반으로 쪼개진 채 아사나스의 안장주머니에 처박혀 있었지만. 열매는 따서 집어넣은지 얼마 안 되어 갈라지며 지독한
악취를 내뿜었고, 마법사가 마법으로 바람 같은 것을 부르지 않았더라면 하프엘프가 그랬듯 다들 기절이라도 했을 것이다.

“이건 뭐라고 생각해야 하는지.”

마법사가 사람 사냥꾼을 돌아보며 물어보아도 사냥꾼 역시 말없이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쓸모없는 인간 같으니. 마법사 역시 덩달아
고개를 저으며 한숨지었다. 옆에 하프엘프는 아직 창백한 채 걸음을 옮겼다.

“이게 장난이라면 이 작은 친구들은 조금 심한것 같군.”

드래고니안의 말에 아라도 완전히 공감했다. 돌아가자마자 므우루에게 항의할 생각이었다. 이런 일에 사람을 끌어내다니, 노스탤지아
놈들! 아사나스와 나란히 걸어가면서 아라는 저도 모르게 주먹이 꼭 쥐어졌다.

그 순간 쿠구궁! 하는 폭음이 숲을 뒤흔들더니 이내 나무 위로는 연기가 올랐다. 정면, 분명 페어리 마을 방향이었다. 나무들의
어머니여…

빨라진 심장박동에 맞추어 걸음은 어느새 질주가 되어 있었다. 아사나스가 옆에 나란히 달리는 동안 놀란 동료들이 쫓아왔다. 바람을
타고 기묘한 괴성 또한 들려오자 더 지체할 수가 없이 아라는 달리며 그대로 아사나스의 등에 올라타 무릎으로 박차를 가했다.
양옆으로 나무둥치와 풀섶이 무서운 속도로 스쳐갔고, 얼굴을 때려오는 나뭇가지를 피해 그녀는 아사나스의 검은 목 위로 몸을 낮게
숙였다.

마을이 가까워 오면서 공기중에 연기가 짙어졌고, 탄내가 났다. 두 인간이 고함치듯 주고받는 대화가 등뒤로 멀어져갔다. 달리며
아라는 활을 손에 들고 화살을 시위에 매겼다. 그러는 동안에도 폭음이 몇 번 더 땅을 뒤흔들었지만, 아사나스는 그럴 때마다 잠깐씩
속도를 늦추어 균형을 잡으면서도 줄기차게 마을로 달려갔다.

나무가 끝나고 아까 전의 꽃밭이 나오자 아사나스는 우뚝 멈춰섰다. 아라는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고함이 터져나왔다. 분노인지,
놀라움인지, 둘 다인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 화사하던 페어리 꽃밭은 전부 불탄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날개가 뜯긴 페어리 시체가 즐비하게 흩어져 있었고, 탄내와 폭약
냄새가 매캐하게 코를 찔러왔다. 살아남았지만 거의 정신이 나간 듯한 페어리 몇 마리만 ‘므우루’라는 이름 외에는 알 수 없는 말을
울부짖으며 배회했다.

“이럴 수가!”

숨이 턱에 닿아 도착한 마법사의 탄식이 들렸다. 가뜩이나 핼쓱한 하프엘프는 그저 경악해서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진 노예사냥꾼은 살아남은 페어리에게 달려가 그들의 언어로 뭔가 의사소통을 시도하고 있었다. 멍하니 그
지옥도 한가운데로 걸어들어간 아라는 바닥에 페어리보다 훨씬 큰 낯선 시체를 몇 구 발견했다. 땅딸막한 체구와 불끈불끈한 근육,
마지막 단말마에 벌린 입에서 삐져나온 긴 엄니에서 그녀는 세계의 어머니를 살해한 저주받은 족속, 오크를 알아보았다.

지카리공은 아무 말없이 가만히 불탄 들판과 페어리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비늘투성이 얼굴은 한없이 슬퍼보였다. 공황상태에 빠진
페어리들과 뭔가 열심히 얘기를 하던 노예사냥꾼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오크 시체 하나를 밟았다. 무력한 분노일 뿐이었다. 너무나도
많이 죽었다… 발을 잘못 디디면 시체를 밟을까봐 걷기도 조심스러웠다. 공포와 죽음과 화염의 냄새, 팍팍한 재가 숨쉴 때마다 폐에
몰려들었다. 순간 시야가 어두워지면서 의식이 멀어지려고 했다. 편안하고 따뜻한 어둠이 손짓하는 동안 오래 전의 목소리가 귓가에
대고 지금 얘기하듯 들려왔다.

저주받은 종족의 딸이 벌레같은 수명을 이어 이곳까지…

“제발… 지금은…”

아라는 숨이 가빠지면서 억지로 의식을 붙들었다. 속이 뒤집히고 눈앞이 어질어질했지만, 지금은 정신이 끊어질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이 일을 저지른 자들을 쫓아야 했다. 눈을 꼭 감은 채 그녀는 또 다른 자신을 가까스레 내리눌렀다. 사람 사냥꾼이 페어리들과
나누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귀기울이며 잠시 기다리자 가까스레 어둠이 물러가고 의식이 또렷해졌다.

“제기랄… 인간들이다.”

조심조심 눈을 뜨자 연기에 흐릿해진 햇살이 눈을 고통스럽게 찔렀다. 대화를 마쳤는지 랜돌프 에디우스는 일어서며 내뱉듯 말하고
있었다.

“인간들이 오크들을 끌고왔다고 하는군. 므우루는 그들에게 끌려간 모양이다.”

“인간…”

옆에서는 아스타틴이 낮게 중얼거리며 이를 갈았다.

“남은 페어리들을 대피시켜야 해.”

노예사냥꾼이 말했다.

“지도자가 없이 이들끼리 그냥 이곳에 방치해두는건 위험하다.”

”…이런 일을 벌인 자들은, 그냥 두면 다시 이런일이 벌어지겠지.”

지카리공은 손을 저어 주변의 파괴상황을 가리켰다. 날개가 뜯긴 채 죽은 페어리도 있었지만, 온전한 모습의 시체가 불탄 꽃 앞에
누워있는 모습도 보였다.

”.. 페어리들은 근원이 되는 꽃이 다치면 자신도 위험해지지.”

하프엘프 아스타틴이 설명하듯 말했다.

“페어리들을 대피시킨다고 해도..”

“에미넴 숲 남쪽까지 위험하다면 어디로 대피시킨다는 말이냐?”

말하며 아라는 무력감이 몰려왔다. 이만한 파괴를 저들이 자행해도 전에도 막을 수가 없었다. 어미가 되어 딸조차 구할 수 없었던
그녀가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고는 그저 한몸 살아남아 싸우는 것뿐.

이 싸움은 언제까지인가? 다시 시야의 가장자리가 어두워오자 그녀는 이를 악물며 정신을, 자신을 유지하려고 버텼다.

“돼지같은 놈들을 모조리 죽여 비료로 써주겠다.”

에디우스는 이를 드러내며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크세노바를 돌아보았다.

“마법사, 마법사!”

크세노바를 보는 그의 시선은 간절했다.

“이들을 우리가 돌아올때까지 숨겨둘수 있는 마법 같은건 없을까?”

“전 그런 쪽에는 약해서…죄송합니다.”

마법사는 고개를 저었고, 다시 눈꺼풀 뒤의 어둠이 몰려가자 아라는 상황을 생각했다. 절망에 빠지는 것은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직은 살아있었고, 아직은 싸울 수 있었으니 지고 짓밟히는 것은 그 다음 문제였다.

“근처에 노스탤지아 거점이 있다면 그곳으로 일단 피하는 것도 좋겠지.”

그녀는 아스타틴에게 몸을 돌렸다.

“갈 만한 곳이 있는가?”

“멀리 가지 못했을 터, 쫓으면 잡을수 있지 않겠나?”

지카리공의 지적에 아라는 끄덕였다. 천천히 계획의 모습이 머릿속에 잡혀가고 있었다.

“페어리들을 저 자가..”

그녀는 노예사냥꾼을 가리켰다.

”..데려가는 동안, 우리는 패스파인더와 마법사의 도움으로 므우루를 추적할 수 있습니다.”

“과연 믿을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요.”

아스타틴의 표정은 냉소적이었다. 사실 아라도 심각한 의문이었지만, 남은 페어리들을 지키면서 므우루를 구하려면 그 방법이
최선이었다.

남은 것은 과연 두 발 짐승을 잡는 저 사냥개, 다사케타를 믿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뿐.

“에미넴 숲의 기지라면..”

아스타틴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로스로리엘이로군요. 엘프들의 중심지와 가깝죠. 그들이라면..”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마치 옛 기억을 떠올리듯.

“받아줄 겁니다. 반나절 정도 걸리긴 하죠.”

“너 혼자 데려갈 수 있겠는가, 다사케타?”

아라는 노예사냥꾼을 쏘아보았다. 저 연약한 생명들을 이자에게 맡겨야 한다는 생각만 해도 불안했지만, 다른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믿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에디우스 이자가 페어리들을 위하는 마음은, 그들을 위한 분노는 진심인 것 같았다. 그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데에 걸어볼 수밖에 없었다.

“에미넴 숲 안에서라면 가능하다.”

노예사냥꾼은 당당한 눈빛으로 그녀를 마주보았다. 아라는 짧게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너는 그들의 언어를 알고, 필요하다면 지시도 내릴 수 있겠지.”

페어리들 대피에 필요한 것은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어쩌면 신뢰도 받을 수 있는 그 능력이었다. 므우루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대피
작전은 힘이 아닌 머리를 쓰는 작업이었다. 페어리와 소통할 수 없는 나머지 동료가 따라가봤자 병력 분산밖에 되지 않았다.

“만약 배신한다면… 페어리들을 위하는 것 같은 마음이 거짓이었다면…”

그녀는 에디우스 앞으로 다가가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너를 추적하겠다.”

옆에 선 아사나스가 같이 노예사냥꾼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나를…?”

다사케타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비웃음을 띄었다.

“에미넴 숲에서 감히 이 나를 추적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것이냐? 웃기는군.”

“평생 편하게 살 생각은 안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를 죽이기 전에는.”

마음을 정하니 차라리 편했다. 한 번, 이 일에 대해서는 이 자를 믿으리라. 그리고 그 신뢰가 잘못된 것이었다면 이 작자 아니면
그녀 자신의 목숨으로 대가를 치르면 되었다.

”.. 에미넴 숲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건 당신만은 아니죠.”

아스타틴이 냉정하게 덧붙였다.

지카리공이 그들 사이에 육중한 팔을 밀어넣으며 조용히 말했다.

“지금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때가 아닌 것 같네.”

아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옳았다.

“엘프들따위의 감정도, 너의 불신도 신경쓸 가치가 없다.”

노예사냥꾼은 거침없이 말했다.

“하지만 나는 이녀석들을 안전하게 대피시켜야겠어. 네놈들이 뭐라고 지껄이건 나는 간다.”

“실패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돌아서며 한 말은 경고이며, 약속이었다.

“나는 자네 과거가 어떤지 모르네.”

지카리 쿤 카타가 말했다.

“자네 말이 진심이기를 믿을 수밖에.”

3m짜리 용인이 하는 말은 어쩌면 아라 자신이나 아스타틴의 위협보다 훨씬 강력하리라. 효과가 충분하기를 바라며 아라는 아스타틴에게
몸을 돌렸다.

“패스파인더, 앞장서서 흔적을 쫓도록.”

“서두르죠.”

아스타틴은 주변을 눈으로 훑으며 걸음을 옮겼다.

“흔적을 보니 아직 떠난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아요.”

“지카리공께서 뒤를 지켜주시겠습니까.”

아라의 말에 드래고니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맡도록 하지.”

그녀는 이번에는 마법사에게 말했다.

“가자, 마법사.”

지카리공보다 앞서서 아스타틴의 뒤를 쫓는 그녀의 뒤를 크세노바는 바짝 따랐다.

패스파인더를 쫓아 들판을 떠나기 직전, 아라는 살아남은 페어리를 불러모으는 노예사냥꾼을 한 번 돌아보았다. 저자가 배신한다면
그때는 노스탤지아고 뭐고 상관하지 않았다. 손은 어느새 활을 꼭 쥐고 있었다.

‘나는 오히려 너의 배신을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사케타.’

어깨에 묵직하고 따뜻한 손이 와닿자 그녀는 지카리공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진 모르겠네만.”

그의 눈빛은 산의 뿌리처럼 깊고 견고하면서도 대지의 품처럼 따뜻하고 인자했다.

“지금은 나아갈 일을 생각하는게 먼저라고 생각하네.”

그래, 그랬었다. 지금은 할일이 있는 때였고, 다가올지 모르는 일은 그때의 일이었다. 불신과 원한에 걸려넘어져 오늘의 일을
그르치는 실수는 하지 않으리라. 아라는 목례해서 감사를 표하고 선두의 패스파인더를 쫓아갔다. 이 지상 위의 지옥을 만든 자들을
쫓아서.

소감

여기서도 축약이 좀 나오는군요. 원본 로그에서는 아카마카 열매를 가져오는 부분은 그냥 RP를 했지만, 여기서는 간단한 회상으로 처리했습니다. 그 외에 크세노바가 안힐라스에 도착해서 노스탤지어 지도부를 소개받는 장면도 알쿠알론데 장면 중의 회상으로 축약했지요. 어떤 장면을 그대로 쓰고 어떤 장면을 축약할지는 늘 판단하기 쉽지는 않습니다만, 대체로는 너무 많이 잘라내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쓰는 사람으로서 자꾸 편해지고 싶은 유혹이 있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시간 순서대로 쓰는 것이 원칙, 회상 등은 특별한 이유가 있을 때 사용하는 변칙이지요.

이 장면에서는 아라하고 랜디의 대립이 RP할 당시에도, 소설 쓸 때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입장이 다를 뿐이지 저것들 완전 동종혐오라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합니다만… 한편 랜디가 페어리들을 무사히 대피시킨 일에 대한 극적 뒤처리는 본편 중에는 못한 감이 있어서 2화와 3화 사이에 배치한 월광 외전 후속을 이어가면서 처리할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카마카 열매를 가져오라고 시킨 진정한 이유에 대해서는 나중에 삭풍님과 합의를 봤습니다. 헤어진 후 랜디는 어디서 뭘했나(..) 하는 외전에 나옵니다. 그거 소설화는 2화 분량을 한 다음에나 나올 것 같습니다만, 로그는 삭풍님 블로그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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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닉스 1화 (5): 잔인한 낙원 에미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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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돌프는 가벼운 어지럼증을 느끼며 나무 사이로 말을 몰았다. 제기랄, 마법 이동은 언제 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확 뒤집힌
공간과 엉망이 된 시간감각 속에 허우적거리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정상 공간으로 돌아오면 수천 리 떨어진 곳이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짓거리란 말인가.

그래도… 돌아오니 좋기는 했다. 로슬로리엘 근처는 이전에 사냥을 하던 터이기도 했으니 익숙한 곳이었다. 완만하게 경사져 올라가는
땅이나 따뜻하게 부서지는 봄 햇살, 재잘거리며 지나가는 시냇물과 머리 위에 새울음이 모두 익숙했다. 비루한 생활을 유지하려
아둥바둥하던 그 각박함에서 벗어나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혼자 지내던 시절의 기억은 가슴아플 정도로 생생했다. 남쪽으로 말을
달려 점점 낯선 땅이 나오면서 그는 말없이 그 시간에 작별을 고했다.

얼빠진 동료들과 함께 말을 (아까 그 정신나간 여자는 주인을 한입에 잘아먹을 수 있는 맹수를 탔지만) 달린지 반나절쯤 되었을까,
그들은 오른편에 바위투성이 계곡을 내려다보는 언덕길을 나란히 지나고 있었다. 그들을 여기까지 안내한, 여자가 아닌 게 아까운
귀엽게 생긴 하프엘프 꼬마가 뭔가 표지나 표식을 알아보았는지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을 탔고, 꼬마가 하는 대로 그들은 말에서 내려
말고삐를 붙잡고 조심조심 내려갔다.

이상한 다크엘프 여자는 내릴 필요도 없이 그 검은 맹수를 타고 앞서 내려갔다. 어느새 또 혼이
나갔는지 눈을 감고 흥얼거리는 주인을 태우고 지나가면서 맹수는 랜디에게 마치 경고하는 듯 노란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말이
신경질적으로 히힝거리며 버티자 랜디는 고삐를 세게 당기며 억지로 끌고갔다. 어차피 짐승 다루는 재주 같은 건 없었다. 자꾸
짜증나게 하면 확 죽여버리지 뭐.

계곡 바닥에 내려와 개천을 따라 이동하면서 랜디는 곳곳에 꽃이 눈에 띄었다. 동백과 산거울, 히아신스가 풀 사이로 수줍게 고개를
내민 모습에서 그는 이제 페어리 군락이 가까워오고 있다고 짐작했다. 그 귀찮은 날파리 녀석들 때문에 이 꼴이 되고도 또 시달려야
한다는 말인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젠장.

계곡이 끝나고 다시 땅이 평평해지는 숲으로 개천을 따라가자 멀리서 벌떼 소리와 비슷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더니,
다가가면서 점점 커졌다. 저 앞에 낮은 구릉 너머에 날리는 색색의 빛무리가 랜돌프의 눈에 들어왔다. 이제 도착했는가.

“이젠 아예 숨어 있지도 않는군.. 정신나간 녀석들.”

그는 작게 피식 웃었다. 언제 봐도 엉뚱한 녀석들이었다, 페어리는. 위험 같은 건 자각을 못하는 건가.

“원래 이런 겁니까?”

다른 녀석들보다는 그래도 그를 사람같이 대하는 여리여리하니 계집애처럼 생긴 마법사가 물었다. 여러 해 전에 붙잡았었던 엘프도
금발을 저렇게 기른 여자가 하나 있었다. 끌려가는 내내 심장이 부서지기라도 할 듯 서럽게 울다가 급기야 그가 안 보는 사이 개천에
뛰어들어 자살해 버린… 그 머리가 물길을 따라 금빛 구름처럼 퍼지던 기억을 떨쳐버리며 랜돌프는 대답했다.

“가까이 다가가면 더 정신이 없을 것이다. 각오해두는게 좋겠지.”

성가시고 멍청한 녀석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왠지 입꼬리가 치켜올라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주변 세상이 아무리 어둡고 위험해도
마냥 즐겁기만 한 그들의 웃음은 더러운 세상에 대한 도전인 것만 같았으니까. 바보같은 생각인 걸 알면서도 말이다.

“괜찮은 건가…”

마법사가 중얼거리는 소리는 웅웅거리는 소리가 더욱 커지면서 묻혀버렸다. 무수한 날갯짓과 수많은 목소리가 재잘거리는 소음 속에서
랜돌프는 그들의 언어로 ‘거인’이라는 말을 연신 들을 수 있었다.

둔덕을 올라가 그 위에 서자 페어리 마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도 눈앞에 선한 천화의 계곡만큼 크지는 않았지만, 숲의
나무들이 경비병처럼 두른 들판에 핀 각양각색의 꽃향기가 바람을 타고 취할 정도로 끼쳐왔다. 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
가운데에 무수한 페어리가 뭉쳐있는 모습이었다. 노랑, 흰색, 푸른색, 보라색, 붉은색의 빛무리가 3m 높이까지 다닥다닥 붙어있는
모습은 그대로 빛의 탑이었다. 자세히 보니 탑은 움직이는 것 같았다.

“거인거인거인거인거인거인거인거인거인거인거인!!”

서둘러 말을 몰아 언덕을 내려간 후 말에서 내려 다가가자 요정들이 일제히 떠드는 소리와 수천 개의 날개가 한꺼번에 붕붕거리는
소리가 몰려왔다.

“시끄럽다, 날파리들!”

그는 그들의 언어로 소리질렀다. 시끄럽다는 것은 페어리말을 배우면서 생존을 위해서라면 제일 먼저 배워야 했던 표현이었다. 날파리는
정신건강을 위해서였고.

“말은 하나씩, 하나씩!”

별 효과가 없는 듯 페어리들은 계속 떠들어댔다. ‘용’이라는 말도 들렸고, ‘용용용 죽겠지’ 하고 놀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짜증나는 날파리들! 고개를 절레절레하면서도 왠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혹시.. 그 말로만 듣던 드래고니안?”

마법사 녀석이 옆에 와서 서며 말했다. 아, 드래고니안이라면 그 용인족… 랜디는 더 흥미가 동해서 페어리들이 둘러싼 형체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그 속에서는 비늘이나 가끔 발톱이 보였다.

“용.. 거인.. 인간?”

하는 말을 듣고 용인지, 거인인지, 인간인지 하는 의문이라고 짐작한 랜디는 말했다.

“다. 용, 거인, 인간.”

주변이 갑자기 귀가 먹먹할 정도로 조용해졌다. 시끄럽게 떠들던 페어리들의 시선은 이제 랜디와 그 일행에게 향했다. 페어리 하나가
빛의 탑에서 떨어져 나오면서 그 뒤의 노란 눈도 랜디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마찬가지로 하나둘 페어리가 그들에게 날아오면서
드래고니안의 모습은 마치 퍼즐을 맞추듯 서서히 드러났다. 단단한 비늘이 둘러싼 깜박이지 않는 눈, 비늘로 뒤덮인 얼굴, 머리에서
시작해 목을 따라 내려오는 칼날 같은 긴 돌기, 장대한 체구에 비늘이 햇살에 반짝이며 물결치는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근육과, 한 번
휘두르면 뼈 같은 건 우습게 박살낼 수 있을 꼬리… 마음만 먹으면 바위라도 부술 수 있는 힘, 한 번 분노하면 무엇으로도 멈출 수
없을 자연재앙 같은 위력이 3m 키의 근육과 힘줄에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압도적이군…’

저도 모르게 감탄하며 랜디는 용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인간’ ‘다크엘프’ ‘하프’ 같은 소리를 떠들며 일행 주변을 맴도는
귀찮은 파리떼와 그런 그들에게 이쁘다, 놀자며 잡으려고 폴짝거리는 바보 다크엘프는 어쩔 수 없이 신경쓰였지만.

“당신이 마지막 동료로군요?”

마법사는 손을 내밀며 드래고니안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섰다. 주변에서 쉴새없이 떠들며 날아다니는 페어리에 눈길을 던지고 그는 말을
이었다.

“분위기가 좀 그렇지만…여하튼 반갑군요.”

날아다니는 페어리떼를 조용히 바라보던 드래고니안은 새로 도착한 일행을 노란 눈으로 한 번 훑어보더니 마법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용인의 입이 움직이며 날카로운 이빨이 무수히 드러나자 순간 움찔한 랜디는 잠시 후에야 그것이 미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신들이 명령서에 있던 동료들인가 보군. 반갑네.”

“좀 복잡한 관계 같지만 일단은 동료죠.”

드래고니안은 마법사의 손 정도는 우습게 으스러뜨릴 수 있을 우악스러운 앞발로 가볍게 맞잡았다. 옆에서 페어리들이 뭐라고 계속
조잘거리자 랜디는 요정어가 딸리는 것을 느끼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질리지도 않는 녀석들이군. 좀 조용히 하지 못하겠어?”

페어리들은 살해당한다느니 어쩌느니 깔깔거리며 흩어졌다. 원래 언성이란 언어를 따지지 않게 마련이다.

“나는 지카리 쿤 카타라고 하네.”

비교적 조용해진 와중에 드래고니안은 사람 머리만한 주먹으로 근육질의 강인한 가슴을 쿵 소리가 나도록 쳤다.

“듣던 대로 독특한 일행이군.”

드래고니안의 눈가가 웃는 듯 주름졌다. 그가 마법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쫓겨갔던 페어리들이 하나둘씩 몰려들어 다시 조잘대는 동안
랜디는 대체 노스탤지아 놈들은 왜 이곳으로 그들을 부른 것일까 궁금했다. 크세노바와 지카리도 그 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페어리에게서는 제대로 답이 안 나오고 지카리가 받은 명령서도 랜디와 일행이 받은 명령서와 대동소이한 모양이었다.

페어리떼가 ‘축제’ 소리를 연신 해대며 떠들자 랜디는 혹시 거울의 섬에서 여왕의 지시가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했다. 고위 페어리는
다른 종족의 언어도 알고 훨씬 정신도 제대로 박혀있으니 말이 통할 것이다.

“여왕님 어디? 여왕님이.. 노스탤지아..”

‘연락’이라는 말을 잠시 생각하다가 랜디는 입 앞에 손을 움직이며 말하는 모습을 만들다가 페어리들을 가리켰다.

“말 안했어?”

그 말에 이카무카가 필요하느니 어떻느니 떠들던 페어리들의 조잘거림에는 이윽고 ‘므우루’와 ‘패달랭이꽃’이라는 말이 자꾸 나왔다.
곁눈으로는 미친 다크엘프가 뭔가 엄청 황송해하며 드래고니안과 악수하고 인사하는 모습이 보였다. 저 여자는 비늘투성이에 키가 3m는
돼야 사람처럼 대해주나?

“므우루! 므우루!”

므우루를 외치며 페어리 한 떼가 우우 나무 사이로 몰려가는 동안 어디선과 음악이 들려왔다. 돌아보자 그 엘프 튀기 녀석이 나무
하나에 기대앉아 류트를 조율하고 있었다. 할일없이 몰려다니던 페어리 빛무리가 하나하나 호기심에 겨워 하프엘프를 중심으로 꽃이나
풀잎에 내려앉았고, 어차피 ‘므우루’를 찾으러 몰려간 녀석들은 보이지도 않을 만큼 멀리 가버렸으니 랜디도 팔짱을 끼고 나무에 기대
구경했다. 다른 일행들도 풀밭에 앉거나 서서 지켜보았다.

조율을 마친 하프엘프는 고개를 들고는 갑자기 관객이 생긴 것에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페어리들은 일제히 ‘해~!’라며 환호성을
울렸다. 랜디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주하라는데? 할일도 없는데 들어보자고.”

하프엘프는 여기까지 오면서 랜디에게 던지던 경멸스러운 시선도 잊을 만큼 긴장해 있었다. 귀여운 녀석 같으니라고.

잠시 머뭇거리던 하프 녀석이 연주를 시작하자 부드럽고 풍성한 음색이 꽃밭을 감쌌다. 그 속에는 햇살 속에 뛰노는 냇물의
웃음소리가, 잎사귀를 때리는 따뜻한 빗물이, 밤에 읊조리는 외로운 노래가 있었다. 들으면서 랜디는 그가 가장 자유롭던 시절,
하나의 포식동물로서 죽고 죽임의 순환 속에 그저 존재했던 때로 되돌아갔다. 혼자 뛰어들어 목욕하던 달빛이 시원한 강물, 숙소에
몸을 누이면 바람에 춤추던 나무들의 바스락거림, 천화의 계곡에 가득했던 그윽한 꽃향기가 이 순간 그와 함께했다.

어느새 들판의 페어리들은 꽃 위에 자리를 잡고, 혹은 공중에 뜬 채 연주를 듣고 있었다. 몇몇은 음악에 맞춰 빙빙 돌며 그들만의
춤을 추고 있었다. 거대한 드래고니안 지카리도 제자리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음악에 빠져 있었고, 그의 어깨나 머리에 어느새 와서
앉은 페어리들도 그를 따라하듯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마법사는 작은 미소를 띈 채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고, 무표정하게 앉은
다크엘프는 눈빛이 가끔 불안하게 흔들렸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눈을 감고 음악을 연주하는 하프엘프, 아스타틴이라는 그 꼬마의 표정이었다. 짜증스럽고 사람을 멀리하는 데다
인간이라면 바로 아르릉거리던 저 건방진 꼬마놈은 류트를 잡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입술에 띈 가볍고 슬픈 미소를 띈 채
아무 경계도, 걱정도 없이 음악에 빠져든 그 모습에 랜디는 문득 저 녀석도 돌아갈 수 없는 시간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것을 잘 알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음악을 연주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러나 영원히 동료로서, 혹은 친구로서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 그러기에는 가로막힌 것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이 순간, 음악
속에서는 말이라는 것이 필요없었다. 그저 귀와 영혼을 열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뒤편에서 조용한 날개소리가 웅웅 다가오자 랜디는 몸을 돌렸다. 아까 날아갔던 페어리들을 이끌고 푸르게 빛나는 페어리 하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날개가.. 하나, 둘, 셋.. 열세 장이었다. 천화의 계곡에서 가장 높은 페어리가 날개가 여덟 장이고 페어리
여왕이 열여섯 장이라는 데 생각이 미친 랜디는 이쪽이 꽤 대단한 페어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긴 튜니카를 날리며 그 고위
페어리—아마도 므우루—가 지나가자 은은한 꽃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우스운 일이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연주하는 아스타틴을 보며 랜디는 그가 연주를 멈출까봐 잠시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므우루와 따르는
페어리들의 조용한 접근은 나무 사이를 지나가는 산들바람만큼의 방해도 되지 않았고, 페어리들이 가만히 자리를 비켜주는 가운데
므우루는 음악에 이끌린 듯 아스타틴 앞으로 가서 꽃 하나 위에 살짝 내려앉았다.

마지막 음의 메아리만을 남기고 음악이 천천히 잦아들자 청색으로 빛나는 페어리는 손을 들어 갈채를 보냈고, 다른 페어리들도 박수치며
환호했다. 눈을 뜬 아스타틴은 앞에 모여든 페어리들의 수와 그들의 반응에 어안이 벙벙해 보였다.

“감사합니다, 악사님.”

그에게 인사하며 페어리는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들의 축제를 이렇게 훌륭한 음악으로 축하해 주셔서.”

“아, 아닙니다..”

아스타틴이 말을 더듬는 동안 므우루는 몸을 돌리며 일행 모두에게 공통어로 말했다.

“모두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드려요. 용의 파편 또한 만나서 반갑습니다.”

눈을 뜬 지카리는 므우루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반갑네, 작은 친구.”

므우루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제 친구와 가족들이 폐를 끼쳤나보군요.”

주변의 페어리들이 그렇다느니 안 끼쳤느니 떠드는 소란 위로 다크엘프가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면 될지 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축제의 준비죠.”

므우루의 대답은 망설임이 없었다.

“어떤 준비입니까?”

“곧 있을 4월의 축제는 페어리들에게 가장 큰 축제중 하나랍니다.”

푸른 페어리는 날개를 팔랑거리며 살짝 떠올랐다가 도로 내려오며 꽃에 발을 딛었다.

“손님들에게 어려운 것을 부탁할 생각은 없습니다.”

“퍽이나 한가하시군요, 요정이여.”

다크엘프는 고개를 저었다.

“오크의 활동이 늘었고 에미넴숲을 이미 인간들이 침탈하고 있건만…”

그녀의 시선은 잠시 랜디에게 향했다. 재수없는 계집 같으니라고.

”…축제라니.”

“죄송해요.하지만 불안해서요.”

므우루의 눈썹이 약간 처지자 랜디는 다크엘프에게 새삼 짜증을 느꼈다.

“불안한 분들 치고는 즐거워 보입니다만.”

다크엘프 여자는 코웃음을 쳤다.

“뾰족하게 굴지 마.”

랜디는 보다 못해 끼어들었다. 대체 뭘 바라는 것인가, 저 여자는. 다들 저처럼 뻑뻑하게 굴다가 미쳐버리라고?

“저녀석들에게 있어서 축제는 무엇보다 중요한 행사다. 그런 행사를 앞두고 평소와 달리 뭔가가 느껴졌다면 불안해하는게 당연한
것이다.”

천화의 계곡에서 페어리의 여름 축제를 보았던 일은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그 웃음과 음악, 춤의 향연에 랜디는 어떤 좋은 술을
마셨을 때보다도 기분좋게 취했었고, 세상에 이런 순수한 기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었다.

제길, 천화의 계곡이 위험하다고 순진하게 믿고 목숨을 걸 준비가 되어있던 그 멍청이가 맞군. 그는 혼자 쓴웃음을 지었다. 여자는
랜디를 흘깃 돌아보고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더 따지고 들지도 않았다.

“저희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에미넴 숲에서 아카마카란 열매를 좀 구해다주셨으면 하는 간단한 일입니다.”

“열매..?”

길쭉한 모양새에 가시가 삐죽삐죽하다는 설명에 랜디는 장에서 한 번 만나 술을 마신 늙은 사냥꾼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가시가
뾰족한 아카마카 열매는 까기도 어렵고 맛도 지독하게 쓰다고… 별로 축제에 쓸 만한 것이 아닐 텐데?

“그래서 힘센 노스텔지아 여러분이 도와주신다면 안심이 되지 않을까 해서 요청했답니다.”

므우루는 손을 모으며 미소를 지었다.

“이 열매는 어디에 있습니까?”

다크엘프가 묻자 숲속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찾을 수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다크엘프는 돌아서며 아사나스라는 맹수를 불렀지만,
랜디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았다.

“그런데… 아카마카를 어디에 쓰실 생각이지?”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무척 쓴 열매다. 도저히 먹을수는 없지.”

“그…그랬죠.그래도 구해다 주시면 좋겠네요.”

페어리는 말을 더듬으며 그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확실히 그게 축제에 필요한게 맞겠지?”

“물론이랍니다.”

므우루는 올려다보며 열심히 말했지만, 지나치게 빠르게 하는 대답이 거짓말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뭐라고 더 따지기도 전에
지카리의 웅웅 울리면서 살짝 쉭쉭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끔은 이런 일도 좋겠지. 도움이 될 만한 일이니 시키지 않았겠나?”

“아 역시 든든하시네요 파편의 일족께선.”

므우루는 도망치듯 지카리의 견고한 몸집 뒤에 숨어버렸다.

“부탁드려요, 꼭.”

드래고니안이 육중한 몸을 일으키자 땅이 가볍게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물론 노력할거네.”

일어선 그는 웃으며 므우루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속이는 게 있다면 잃게 될 것도 걱정해야 될거야.”

푸른 페어리는 금방이라도 식은땀을 흘릴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무엇을 감추는지는 몰라도 랜디는 그런 그녀가 불쌍했다. 3m짜리
도마뱀에게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분명 속이 타는 경험일 것이다.

“가시지요.”

다크엘프 여자는 일어선 드래고니안에게 가볍게 목례했다. 숲을 향해 걸어가던 그녀는 문득 멈추며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거기 사람 사냥꾼은 안 와도 좋다. 등뒤를 걱정하는 것은 질색이니.”

웃기고 자빠졌네. 미친 계집이 맹수를 끌고 숲으로 걸음을 옮기는 동안 랜돌프는 땅에 침을 뱉었다. 뒤에서는 페어리들이 ‘실패’니
‘두목’ 같은 말을 떠들고 있었다.

“이번에도 죽도록 고생할지도 모르겠군…”

도대체 이 날파리들과는 무슨 악연인지. 그는 목을 우둑우둑 풀며 동료들과 함께 숲속으로 향했다.

소감

쓸 때 원래의 로그에서 가장 변형과 축약이 많았던 부분으로 기억합니다. 역시 RPG와 소설은 꽤나 다른 매체이니 때로는 과감한 변경도 필요하겠지요. 여기서는 주로 대사 순서를 바꾸고 일부 생략하는 수준이었지만, 아스타틴의 연주 부분은 원본 로그와 많이 다르게 가공했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변화에도 벌벌 떨다가 이번 분량을 거치면서 각색하기가 좀 편해졌던 것 같군요. 소설 쓰면서 지금까지 제일 많이 가공했던 건 그 연주 장면이랑 재촬영 분량 중 아시타와 아스타틴의 메타포노비아 도착 대목이었던 것 같습니다. 후자는 기본 사건은 같았으니 변형이라기보다는 장면 시점을 바꾸고 정보를 추가한 것에 가깝지만요.

이 장면에는 랜디의 시점을 많이 활용하고 인물에 대한 제 생각도 집어넣어서 이상하지 않은가 좀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이방인님이 생각하시는 랜디와 비슷하다는 말씀에 안심했습니다. 노예사냥꾼 출신이며 한 번도 그 점을 뉘우친 적이 없는 랜돌프는 도덕적으로나 사회통념상 가장 껄끄러운 인물이라서 시점을 잡기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만, 똑같은 ‘사람’이라는 점만 기억하면 크게 어렵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 ‘사람같다’라는 사실은 랜디에 대해 가장 불편한 점이기도 한 것 같아요. 범죄의 성격이 워낙 거식하다 보니 강간은 차원이 다른 악이라고 (외부 사이트, 영문) 생각해고 싶은 경향도 있습니다만, 실은 노예상이나 강간범이라고 해서 다 공감이 불가능한 사이코패스는 아닐 테니까요. 소수의 병적 인격장애자를 제외하면 결국 악이나 범죄란 대부분 상상할 수 없는 정신세계의 산물이라기보다는 누구든지 조금 비겁해지고 양심의 가책을 조금 외면하면 저지를 수도 있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보통 사람의 작품일 것입니다. 편의나 이익, 욕망 앞에서 원칙을 잃지 않는 부단한 노력 없이는 누구든지 환경에 휩쓸려 악을 저지를 수 있지요. 대개의 악은 괴물이 아니라 사람이 저지르기에 결코 먼 얘기가 아니라는 것이 랜디 같은 인물의 교훈이라면 교훈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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