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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과 석양의 도시 – 13화: 증오보다 강한 것

“증오보다 강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
– 술탄 메흐디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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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라이산드로스는 황제를 설득해 스틸리안느의 아들 아리스를 살리고, 황제와 대면시킨 후 집으로 데려와 지내게 합니다. 그는 스틸리안느가 일으킨 반란의 기억 때문에 거리에서 아리스에게 폭언을 하는 신민들을 막아서면서 루키아노플 시민으로서의 긍지를 지킬 것을 촉구합니다.

한편, 플로리앙은 나흐만에 건너가 수상한 외국 무장집단으로서 부하들과 함께 투옥당했다가 성벽에 대포로 구멍을 뚫고(..) 탈출하고, 나흐만 수도 샤이프로 향하다가 계획대로 술탄의 군대에 체포됩니다. 그것이 예니체리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군영에 갇혀있다가 바라던 대로 메흐디와 알현한 플로리앙은 루키아노플의 성벽을 무너뜨리겠다고 거침없이 장담하며 자신을 써달라고 합니다. 사람 목숨을 파리처럼 아는 메흐디 냉혹성도 이제 두려울 것이 아무것도 없는 플로리앙을 주눅들게 하지는 못하고, 메흐디는 그에게 초기형 대포를 만들어 시범을 보일 것을 허락합니다. 메흐디는 굳이 사란티움을 파멸시키려는 플로리앙의 눈빛에서 증오를 읽지만, 플로리앙은 증오라는 말은 오히려 부족하다고 합니다.

플로리앙: 저는 유혈을 원합니다. 사란티움에서 떨어지는 피로 타는 듯한 영혼의 갈증을 풀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는 제 자신의 존재를 포기할 용의도 있습니다.

비슷한 시간, 스틸리안느의 동생 세바스티아노스는 서방 국가들로부터 지원과 동맹 약속을 들고와서 외교 임무의 성공적인 수행을 알리지만, 누나의 반란과 죽음 때문에 비탄에 빠집니다. 며칠 후 그가 라이산드로스의 집에 찾아오자 라이산드로스 내외는 아리스를 데려갈까 불안해하지만, 세바스티아노스는 속세를 떠나 수도승이 되기로 했다며 오히려 아리스를 맡아달라고 부탁합니다. 에이레네는 남편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고, 부부는 죽어간 사람들과 이미 겪은 슬픔만큼 아리스와 태어날 아이와 함께 행복하자고 다짐합니다.

감상

이렇게 1부와 2부 본편 사이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2부 서장이죠. 사란티움에 있었을 때는 주인공들 이야기가 진행은 따로 해도 어느 정도는 관련이 있었는데, 다른 나라에 있다 보니 공통 과거에서 기인할 뿐 전혀 상관이 없는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군요. 그래서 제목도 한 가지로 짓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로그를 보다 보니 메흐디의 대사에서 이 두 가지 다른 이야기를 엮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메흐디의 말대로 증오와 복수심은 예측할 수 있고 믿을 만한 감정입니다. 그러나 13화에서 라이산드로스와 플로리앙은 증오보다 강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다양한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라이산드로스와 에이레네는 스틸리안느의 증오와 복수가 낳은 새로운 증오와 복수심보다 강한 것들을 발견했지요. 죄없는 어린 고아에게 부모에 대한 미움을 풀지 않는 긍지, 그리고 부모의 죄를 잊고 아이를 감싸안을 수 있는 사랑. 반면 플로리앙은 스틸리안느가 시작한 (어쩌면 그 이전 대에 그녀의 아버지와 황제로부터 시작한) 증오와 복수의 순환보다 한층 깊은 허무와 파괴욕을 발견했습니다. 긍지, 사랑, 우정, 허무, 절망, 고통은 모두 증오보다 강할 수 있는 것들이지요.

이번 화에서는 앞으로의 정세를 뒤바꿀 만한 큰 사건이 적어도 두 가지 있었지만 (플로리앙의 나흐만 망명, 서방 국가들의 동맹 결정), 이야기의 무게중심은 인물들의 깊은 감정과 관계에 있었습니다. 한편 그런 큰 사건들 역시 주요 인물들의 감정과 관계에서 나왔지요. 플로리앙의 나흐만 망명은 연인의 죽음에서, 세바스티아노스의 외교 임무 발탁은 동생을 지키려는 스틸리안느의 의지에서 나왔으니까요. 제가 인물이 동력이 되는 인물 중심적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은 인물의 내적 동기와 외적 사건 사이의 이런 유기적 연계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떠오르는 감동적인 장면들이라면 우선 라이산드로스와 아리스 사이의 대화들입니다. 고통을 넘어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건전발랄한 인물상은 마음의 계절 때도 에이레네를 통해 표현해보려고 했던 것이지만, 라이산드로스라는 인물에게서도 잘 드러나는군요. 저 두 사람이 왜 그렇게 잘 어울리는지 알만합니다. 황제에게도, 루키아노플 시민들에게도 일관적으로 용서와 자비를 주장하는 모습에서 아리스의 아버지를 지키지 못했다는 괴로움까지, 라이산드로스의 깊이와 사람됨 표현이 좋았습니다. 조금 냉소적으로 보면, 과연 니키아스의 친자일 가능성 내지 확신이 없어도 그렇게까지 했을까? 하는 생각도 재미있죠.

가장 강렬한 장면이라면 역시 메흐디와 플로리앙의 격돌이었겠죠. 극단의 정복욕과 파괴욕의 만남이었달까요. 일치하는 이해관계를 발견해가며 첨예하게 대립하는 대목은 정말 불꽃이 팍팍 튀겼습니다. 플로리앙이 최고의 주사위운을 연속적으로 터뜨리며 대활약한 장면이기도 했죠. 루키아노스와 플로리앙의 과거 고용관계를 피묻은 거울로 뒤집어보는 것 같은, 어두우면서도 인상깊은 대화였습니다. 어쩌면 지금 상태의 플로리앙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그리고 복수에 대한 플로리앙의 끝없은 갈증을 거리낌없이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 메흐디라는 점에서 나름 궁합 최고의 주종관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외에 개인적으로는 조연들 표현이 재미있었습니다. 아리스 곁에 남은 하인들의 시시각각 변하는 반응들이라든지, 플로리앙 부하들의 좌충우돌하는 모습이라든지요. 브라기가 없으니 롱기누스 용병단 기강이나 분위기가 확 달라지는 것도, 그 공백을 루카가 내키지 않지만 채우려 애쓰는 것도 흥미로웠습니다. 끝에 세바스티아노스는 마치 그동안 못 나온 거 보상해달라고 떼쓰는 것처럼 대사가 폭주했고요. 아이같지 않은 아리스가 유일하게 평범한 소년일 수 있었던 대상인 세바스티아노스가 곁에 없는 것이 어떤 영향을 줄지도 궁금하네요. 그리고 복잡하게 얽히 비밀과 거짓말, 원한과 피의 악연도…

대체로 재미있게 (그리고 길게!) 한 화였고, 인물 표현이나 주변 묘사도 재미있었지만 좀 시간을 많이 잡아먹은 건 아닌가도 싶습니다. 매화 이렇게 오래 할 수 는 없는 노릇이니 적절히 시간관리를 해야겠지요. 다음 화에는 1~2부 사이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2부를 위한 기반을 다져놓으면 적합할 것 같습니다. 플로리앙의 망명과 서방 국가들의 동맹으로 사태는 더욱 급박하게 치달을 것 같네요.

참가하고 관전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다음주에도 즐거운 플레이를 기약하겠습니다!

여명과 석양의 도시 – 13.5화: 황자의 귀환

2부 첫 테이프는 아사히라군과 하쉬르가 끊었습니다. 다음 13화에는 1~2부 사이의 일들을 다루어볼 예정인 만큼 사실 아직 안한 13화보다 시간상으로 뒤여서 13.5라고 표시를 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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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나흐만 제국의 13황자 하쉬르 이븐 마수드가 사란티움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진지 1년여, 나흐만 수도 샤이프 시의 황궁에 남루한 차림의 다리를 저는 남자가 나타나 자신이 나흐만의 13황자라며 들여보내달라고 하다가 경비에게 쫓겨날 뻔합니다. 다행히도 술탄의 귀빈인 마리사 황후의 호위대장 미하일 이바노비치가 그를 알아보고 데리고 들어가지요.

미하일과 하쉬르는 오랜만에 재회한 소회를 나누고, 미하일의 주선으로 하쉬르는 어머니와 지난 1년 황궁에서 지내고 있던 아리칸과 잠시 재회한 후 의관을 정제하고 술탄과 식사를 함께 합니다. 오가는 반가운 말들과 덕담 사이에서 술탄은 그동안 어디 있었는지, 황궁에 돌아온 의도는 무엇인지 동생을 떠보지만 하쉬르는 잘 받아넘기지요. 그리고 술탄이 불편해하는 아샤신의 새로운 독립성과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생각하며 방으로 돌아갑니다.

감상

나흐만 궁성을 밖에서 보는 장면은 처음 해보았는데, 충직우직무식한 경비 무크타 알-하리의 모습이나 옆에서 구경하는 구경꾼 등이 재미있었습니다. 1부부터 알았던 인물들 (미하일, 아리칸, 메흐디 등)이 어떻게 변했는지 보는 것도 흥미로웠고, 하쉬르의 입궁에 대한 엇갈리는 반응과 감정들도 재밌었습니다. 하쉬르의 어머니 하사나의 오열, 미안하면서도 반가운 미하일, 기쁘면서도 마음이 복잡한 아리칸 등등.

하지만 무엇보다 세션의 중점은 하쉬르와 메흐디의 전초전이었죠. 겉으로는 한없이 정중하게, 그러나 서로 치밀하게 대결하면서 탐색하는 모습은 두 형제의 복잡한 관계의 정수였던 것 같습니다. 메흐디의 왕비 아이샤가 임신했다는 소식에 ‘형님을 닮은 영준한 후계자를 얻으시면 좋겠다’는 말이 숨은 욕이었던 것만 봐도 하쉬르와 메흐디의 과거와 운명이 얼마나 얽혀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꼭 닮은 아들 낳아서 너도 아들 손에 죽어봐라(…)) 마리사와 하쉬르의 불행을 정복의 좋은 정치적 계기로 생각하며 기뻐하는 메흐디의 모습은 메흐디라는 인물의 면모를 잘 보여주기도 하고요.

전반적으로 하쉬르라는 인물, 그리고 여석도 2부의 분위기를 괜찮게 잡은 화였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 이 인물들과 사건들이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갈지 흥미진진하군요.

여명과 석양의 도시 – 12화: 그 지독한 굴레 (1부 끝)

“처음부터 끝까지, 결혼이라는 그 지독한 굴레 속인가…”
– 루키아노스 1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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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질풍의 기사단과 함께 귀환한 라이산드로스는 도시의 치안과 황제 경호에 힘씁니다. 롱기누스 용병과 도착한 플로리앙은 하쉬르의 부하 미하일에게 네야의 체포 사실을 전해듣습니다. 플로리앙은 황궁을 습격해 네야와 황후를 모두 구하기로 합니다. 플로리앙의 의도를 파악한 라이산드로스가 의도적으로 병력을 황제에게 모은 덕분에 양쪽 모두 희생 없이 플로리앙은 심한 고문을 당한 네야를 데리고 나오고, 하쉬르는 주의가 분산된 틈을 타 황후를 모시고 나옵니다.

황궁 남문에서 합류한 황후와 롱기누스 일행은 함께 서쪽 성벽의 카리시우스 문을 돌파해 도시에서 빠져나가려고 하지만, 추적군이 몰려오자 플로리앙의 부하 브라기는 남아서 막기를 자처합니다. 플로리앙은 꼭 살아서 오라고 명령하며 네야와 황후 일행과 함께 탈출하고, 브라기는 남아서 시간을 벌다가 라이산드로스에게 죽습니다.

네야가 결국 부상을 못이기고 죽어가는 동안 플로리앙은 네야와 작별하고, 그런 그들을 따라잡은 라이산드로스는 보내주면 돌아와서 제국을 파괴하겠다는 플로리앙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은 자신의 생명으로 막겠다며 그를 보내줍니다. 하쉬르는 황후의 퇴로를 부하 샬림과 함께 막다가 결국 추적군에 쓰러집니다.

라이산드로스는 거의 자포자기에 빠져 성벽 앞에 제3 군단을 포진시킨 콘스탄티노스의 부탁으로 스틸리안느를 만납니다. 시력을 빼앗기고 유폐된 그녀에게서 황후가 폐위당하고 플로리앙이 나흐만으로 떠나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는 것과, 그녀가 아버지의 복수를 황제뿐 아니라 제국 전체에 한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아리스가 자신처럼 되는 것이 싫다는 스틸리안느의 부탁에 따라 그녀를 살해합니다.(주:소설 보신 분은 알겠지만 이 대목은 가이 게이브리엘 케이 [Guy Gavriel Kay]의 사란티움 모자이크 시리즈 [Sarantine Mosaic]에서 상당히 많이 따온 것입니다. 미리니름을 너무 많이 한 것 같아서 죄송스러운..) 그날밤 콘스탄티노스는 아내를 따르듯 자결합니다.

한편, 플로리앙은 부하들과 함께 바다를 내려다보는 언덕에 네야를 묻은 후 나흐만으로 향합니다. 하쉬르는 아샤신 본거지에 있는 움막에서 깨어나서, 샬림은 죽고 자신은 산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행운인지 불운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감상

예, 이렇게 1부가 끝났습니다. 처음의 캠페인 전체 기간을 예상한 것과 맞먹는군요. 캠페인 시작부터 뻗쳐나온 많은 극적 갈래들을 마무리하고 새 시작을 준비했다는 점에서 길면서도 만족스러웠습니다. 중간에 가끔 늘어져도 참고 뭔가 하나의 단원을 마무리한다는 만족감은 대단하군요.

다들 한동안 기대하고 있던 장면들을 실제로 진행한 만족감도 컸습니다. 네야의 죽음, 브라기의 비장한 최후 (라이산드로스가 죽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지만요), 라이산드로스와 플로리앙이 전우에서 적으로 돌아서는 순간, 하쉬르가 황후를 지키다가 쓰러지는 장면 등등. 제 개인적으로는 스틸리안느의 죽음과 콘스탄티노스의 자결도 굉장히 기대했고요. (이 인간, 죽는 걸 제일 좋아한다) 이렇게 운명이 갈린 인물들의 행방이 어떨지 흥미진진합니다.

일행 플레이를 벗어난 진행은 여전해서, 여기서도 세 주인공은 각자의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중간중간 스친다는 느낌이군요.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할 수 있다는 좋은 점도 있고 관전이 길어진다는 단점도 있지만, 관전도 대체로들 즐거워했다는 점에서 1부에 어울리는 방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2부에서는 보조 인물의 활용을 통해 일행 플레이의 장점도 취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제목의 ‘지독한 굴레’는 황제가 결혼에 대해 한 말에서 따온 것입니다. 그 내실이 사랑이든 증오이든 다른 무엇이든 끊어버릴 수 없는 인연… 스틸리안느가 인생을 내버린 원한의 시작도, 브라기가 타향에서 혼자 죽은 것도, 플로리앙의 인생이 송두리째 달라진 것도, 황제가 황후를 내친 것도, 콘스탄티노스가 자신을 기만한 아내 때문에 죽은 것도 따지고 보면 모두 결혼 내지 사랑이라는 질긴 인연 때문이지요. 다른 인연도 마찬가지로 굴레나 사슬 같은 것일지 모릅니다. 그 속에서 행복해하고 고뇌하고 죽어가는 그 ‘관계’라는 굴레는 결국 삶 그 자체일지도요.

1부 내내 멋진 플레이 해주신 세 분 참가자께 감사드리며, 2부에서 더욱 커지고 넓어지는 이야기도 다함께 즐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RPG가 질린다고 생각하는 순간 또 이런 멋진 세션으로 의욕이 팍 생기는 걸 보면 제 RPG 인생은 축복받았나 봅니다.^^

네야의 독백 2

당신이 내게 그랬죠.

어려서 권력의 잔악함을 온몸으로 보고 겪었었다고,

그래서 평생 그 분노를 잊을 수 없다고 말이에요.

내가 당신에게 그랬죠?

난 권력의 추악함과 고귀함을  하루에 모두 보았다고요.

세상이, 사는 게 뭔지도 모르던 열네 살의 그날에…

나보다 훨씬 커다란 운명을, 많은 목숨을 진 사람들

그들이 얼마나 비겁하고 잔인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숭고하게 빛날 수 있는지…

나도 알아요.

그들이 악마나 천사가 아니라 사람이란 거.

천한 나랑 사실 속내는 다 똑같은 걸요.

하지만 진 운명과 생명의 무게는 얼마나 큰지

그래서 우리 왕녀님, 얼마나 어깨가 무거우신지…

그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릴 수 있었다면

그 험한 길에 잠시잠깐 위안을 드릴 수 있었다면

그것만으로도 나는 얼마나 감사한지요.

한 철 나비처럼 태어나 스러지는 생명이

그분의 운명과 고귀한 이름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 내 조그만 이름에 허락된 유일한 불멸이겠지요.

그러니 내 사랑, 울지 말아요.

어차피 사람은 죽잖아요.

우리 사이에는 긴 세월이 없겠지만

우리 아이에게는 살아갈 날이 없고

잃어버린 시간과 기회가 조금은 슬프지만

충분히 만족해요, 이미 주어진 것에.

그분이 아니었으면 어차피 없었을 시간이잖아요.

처음부터 네야의 생명은 왕녀님 거였으니까…

그래서 네야는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당신을 만나기도 전에 죽어버리지 않은 것이,

그렇게 해주신 왕녀님을 곁에서 모신 것이,

감히 천한 내가 왕녀님을 위해 죽을 수 있었던 것이,

아내가 되고 어머니가 되는 행복한 꿈을 꾸고

지금 당신의 품안에서 마지막 잠에 드는 것이…

그러니까 웃어야죠, 내 사랑.

내 꽃의 기사님, 꽃처럼 활짝 웃어줘야죠.

네야를 기억하면 행복하면 좋겠어요.

내가 당신 품고 행복하게

행복하게 어둠으로 내려가듯…

다시 찾아올게요, 내 사랑.

꿈속에서 당신을 찾아갈게요.

나비가 되어서… 찾아올게요…


기다림의 땅에서는…

“성벽도 일격에 무너뜨리는 철의 수레…”

노인은 성벽 문양을 새긴 검은 놀이말을 판에서 집어든다.

“사각에서 공격해오는 그림자의 사제…”

머리에 홈을 새긴 검은 놀이말이 판에서 노인의 손안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정공법도, 기습공격도 사용할 수 있는 여왕.”

왕관을 새긴 말 역시 판에서 퇴출당한다.

“이거…”

젊은이는 검은 말의 수가 한결 줄어버린 판을 씁쓸하게 내려다본다.

“곤란해졌습니다.”

“여기 이 말이 주효했군.”

노인은 놀이판 옆쪽의 홈에 치워놓은 아무 장식 없는 작은 놀이말을 가리킨다.

“단순히 병졸이라고 생각했는데, 치우니 훨씬 강한 말로 가는 길이 열리는군.”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어르신.”

청년은 부드럽지만 결의에 찬 표정으로 판을 내려다본다.

“기동력 하나는 출중한 기사가 남았으니까요.”

“쉽지 않을 게야.”

노인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턱수염을 쓸어내린다.

“처음부터 쉬운 싸움은 아니었지요.”

판에 집중하던 청년은 문득 고개를 든다. 마치 자신에게만 들리는 노랫소리에 귀기울이듯 가만히 있다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르신… 잠시 쉬었다가 하지요.”

“그러지…”

노인은 청년이 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시간은 많으니 말이네.”

노인은 판에서 집어낸 세 개의 말을 바라보며 하나하나 천천히 놀이판 옆의 홈에 떨구어 넣는다. 그리고 깊이 한숨을 쉬며 해도 달도 없이 은은히 빛나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기다리기만 하면 모든 만남이 교차하는 땅에서.

여명과 석양의 도시 – 11화: 폭풍 한가운데로

여명과 석양의 도시 11화입니다. 참가자 두 명이 사정상 불참한 관계로 그저 아군만 바라보며(..)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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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황제가 황궁으로 돌아오면서 상황은 더욱 급박하게 흘러갑니다. 황제 곁에서 하쉬르는 그가 황후에 대한 의심을 떨치지 못한 것을 깨닫고, 암살자들의 심문에서 황후에게 불리한 이야기가 나온 것을 알자 황제 곁에서 빠져나와 황후에게 귀환합니다. 황궁 경비가 네야를 데려가려고 하자 하쉬르와 황후는 한사코 막지만, 가뜩이나 황후의 상황이 위태로운데 긴장이 더욱 악화하는 것을 보고 네야는 스스로 동행을 자처합니다.

네야를 보내고 거의 넋이 나갔던 황후는 정신을 추스리며 하쉬르에게 정보수집을 부탁합니다. 부하들을 내보낸 결과 하쉬르는 스틸리안느 팔레오로가의 체포사실, 산발적 전투가 벌어지는 도시의 상황 등을 파악하지요. 그리고 스틸리안느가 무슨 억하심정인지 황후도 연루된 일이라고 증언한 바람에 네야가 고초를 겪고 있다는 것도… 하쉬르는 황후가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부하 미하일과 샬림에게 황후를 데리고 피신할 준비를 하라고 지시합니다. 미하일은 황후는 네야 없이 탈출하지 않겠지만 네야까지 구출하기에는 병력이 부족하다며, 플로리앙에게 상황을 알리기로 제안하고 인가를 받습니다.

잠시 처소에 들른 하쉬르는 아리칸에게 사란티움을 뜨라고 합니다. 아리칸은 그와 황후 일행의 탈출을 위해 배를 구해주기로 하고, 두 사람은 언제 또 만날지 알 수 없는 채 이별의 안타까움을 나눕니다. 그때 황궁에서 땅을 울리는 굉음이 들려오자 하쉬르는 사랑한다는 말을 남기고 달려가지요.

감상

끝나고 아군과 서로 이야기했듯 이것이 규모가 큰 캠페인의 재미인 것 같습니다. 사회적 배경과 인물, 인물 간 관계에 시간과 공을 들인 만큼 돌아오는 극적 재미 말이지요. 그냥 전투물이었으면 다 나가서 싹 쓸어버리면 끝이지만, 인물과 사회가 함께 호흡하는 이런 캠페인에서는 인물에 대한 사회적 제약을 강조하고 모든 인물이 잃을 것이 있기에 그 위태로움에서 안타까움과 비장미라는 감정선이 살아난다고 봅니다. 인물 군상들의 엇갈리는 감정과 은원, 역사의 무자비한 물결, 그리고 그 한가운데 휩쓸린 연인… 이런 게 장기캠페인 특유의 규모감이겠지요.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아군 말마따나 독립운동가 부부나 2차대전 때 유태인 부부 느낌이 난 하쉬르와 아리칸의 이별이었지만 (급박한 상황에서는 그런 것도 폭음으로 끊어주는 센스 (?)), 다른 인물들의 인물성과 얽히고 섥힌 인연도 흥미로웠습니다. 네야를 데리러 온 경비와 막으려는 황후라는 장면은 5년 전 일의 반복이지만, 이번에는 네야는 다른 선택을 했죠. 과거를 떨치지 못한 황제와 스틸리안느는 각자 지독한 악연에 얽매여 있고, 충직한 샬림은 나흐만에 돌아가면 오른팔이 되어달라는 하쉬르의 말에 감격합니다. (하지만 사실 하쉬르는 왼손잡이 (퍽퍽)) 이중적이고 교활한 미하일은 속으로 다른 뜻이 있기도 하지만, 한편 진심으로 자기 책무를 다해 황후를, 그리고 되도록이면 상관 하쉬르도 지키려고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플로리앙에게 알리겠다고 인가는 받았지만 실은 이미 알리고 사후인가를 받았다는 게 아군과 저의 생각)

이 무수한 의도와 음모, 마음과 인연이 결국 여명과 석양의 도시의 이야기겠지요. 국가의 흥망성쇠는 배경에 있는 이야기이고 중요하지만, 그 속에서 역사를 이끌어나가는 것도 결국 사람입니다. 그렇게 역사와 사람은 서로 이끌고 때로 싸우면서 흘러가지요. 여명과 석양의 도시에서는 그런 역사 속의 인간을 다루어보고 싶었고, 꽤 풍성한 재미를 느끼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어가면 더욱 거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참가자들 상황에 따라서는 1부 결말만 제대로 봐도 하나의 캠페인으로서는 아쉽지 않을 정도입니다.

끝부분에 꽈광! 은 역시 네야를 구하려는 플로리앙의 분노폭발…이자 황궁 공격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강제진행 성격이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정황인지는 플로리앙과 라이산드로스의 도착 부분을 하면서 정해보도록 하죠. 그 둘이 수도에 도착하면서 이제 1부 막을 내릴 준비가 되겠군요. 어떤 이야기들이 또 나올지 두근두근 기대하고 있습니다.

네야의 독백 1

오래 전, 바다 건너에서

어리기만 했던 내 삶이 위태하게 흔들릴 때

그때도 당신께서는 내 앞을 막아서셨죠.

이름도 모르셨던 아이를 위해 창과 칼과 권력에 맞서셨어요.

처음이었답니다, 네야는…

내 보잘것없는 생명을 위해 그렇께 싸워준 사람은.

살아났다는 안도보다 감사하는 마음이 더 컸고,

아름답고 용감한 당신 곁에 있어서 행복했어요.

바다와 세월을 건너 왜 우리가 다시 이곳에 섰는지

네야가 무엇이라고 또 데려가려고 하고

네야가 무엇이라고 당신께서는 또 막으시는지

원망도 하고 싶고, 울며 두려움에 주저앉고도 싶어요.

하지만 이제 나는 아이가 아니지요.

나와 이 기적을 공유한 단 한 사람 외에는 말 못한

비밀을 하나 품은 나는 지킨다는 마음을 알아요.

그들이 데리러 온 것은 실은 네야가 아니지요.

이제 내가 막아설 사람은 당신.

그들이 당신을 해치게 두지 않겠어요.

내 아이에게 부끄러운 어미가 되지 않겠어요.

아이처럼 다시 당신의 치마폭에 숨지 않겠어요.

이제는 내가 지켜드릴게요.

“그만…”

내 목소리가 떨리지는 않나요? 나 겁쟁이 같지는 않아요?

나의 여왕님, 당신을 모시는 이답게 용감하고 기품있어야 하는데.

“동행하겠어요.”

조금만 버텨주렴, 아가야.

빨리 와요, 내 사랑.

울지 마세요, 사랑하는 나의 여왕님. 다 괜찮을 테니까요.

그렇게 생각해야 후들거리는 이 다리가 움직이니까요.

그러니까…

플로리앙…

믿을게요.

[여명과 석양의 도시] 기다림의 땅

추석을 맞아 쉬는 대신 올리는 추석 특집…도 아니고 뭘까요. 어쨌든 전부터 구상했던 것을 올려둡니다.

기다림의 땅은 조용한 곳이다. 해나 달 없이 가끔 구름만 지나가는 하늘에 은은한 빛이 어리는 이곳은 영원한 어스름의 땅, 시간마저 멈춰서서 기다리는 곳이다. 이곳에 머물러서 기다리고 지켜보는 이들은 서두르거나 다급해하지 않는다. 누구든지 언젠가는 기다림의 땅을 지나가기에.

작은 꽃들이 색색의 별처럼 잔디 사이로 고개를 내미는 정원에 노인 하나와 청년 하나가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앉아 있다. 탁자 위에는 희고 검은 정사각형이 번갈아 무늬를 이루고 있고, 칸 위에는 흑단과 상아로 왕관, 말, 성벽 등의 모양을 깎은 검고 흰 놀이말이 늘어서 있다.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청년은 성벽 모양을 한 하얀 말을 술 달린 터번 모양을 한 검은 말을 정면으로 마주보는 칸에 내려놓는다.

“‘샤’입니다, 어르신. 아무래도 이번 판은 제가 이긴 것 같습니다.”

“그 말이 맞구먼. 좋은 솜씨야.”

흑단 놀이말과 크게 다르지 않은 터번을 쓴 노인은 고개를 끄덕인다.

“한 판 더 하는 것은 어떤가?”

“그러지요.”

청년은 정중히 미소짓고 이번에는 흰 게임말을 노인 앞에, 검은 말은 자신 앞에 배열하기 시작한다.

“시간은 많으니까요.”

노인은 게임 탁자 옆의 홈에 넣어놓았던 희고 검은 말들을 꺼내다가 판 위에 놓는다. 둘이서 말을 배열하는 동안 시간이 없는 땅에는 고요의 순간이 흐른다.

“그래, 자네는 누구를 기다리길래 남았는가?”

다시 군대처럼 정렬해 마주보는 두 진영을 넘어 노인은 청년을 평온하게 바라본다.

“부인이나 자식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머리까지 근육으로 된 바보 녀석과 그 바보에게 홀딱 빠진 제 동생을 기다립니다.”

잠시 손으로 턱을 괴며 웃던 청년은 이내 먼 곳을 보는 눈으로 쓴웃음을 짓는다.

“부인과 자식이라…”

그리고 그는 그 말을 덮어버리기라도 할 듯 질문을 노인에게 되돌린다.

“어르신께서는 누구를 기다리십니까? 역시 가족분들입니까?”

“여염집에서는 가족이라고 하겠지. 우리가 가족인지 나는 의문이 있지만 말일세.”

노인은 여유로운 미소를 짓는다.

“최소한 나를 죽인 아들 녀석들을 윽박지르기라도 하고 마지막 길을 떠나야지 않겠는가.”

“우리는 둘다 전쟁을 막으려다가 죽었군요.”

청년의 목소리는 가볍지만, 눈빛은 가라앉아 있다.

“그럼으로써 전쟁의 첫 희생자가 되었지. 흔한 이야기야.”

놀이판을 사이에 두고 두 사내는 서로 완전한 이해심을 담아 마주본다. 국가라는 거대한 놀이판 너머로 마주보며 수많은 생명과 운명의 무게를 졌던 사람들의 동질감으로. 그리고 아직 그 무게를 완전히 내려놓지 못했기에 아직 이 경계의 땅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말없이 이해하며…

풀밭이 발걸음에 바스락거리자 노인과 청년은 돌아본다. 표정이 없는 조그마한 사내아이가 다가와 청년의 다리에 기대자 그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자네를 잘 따르는 것 같더군. 아는 아이였나?”

“제 조카입니다. 세상 빛을 보지도 못하고 이리로 왔죠.”

아이를 내려다보는 청년의 미소에는 아픔이 스쳐간다.

“부모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얼굴을 한 번 보고 싶다는군요.”

노인은 작게 한숨을 쉰다.

“오래 기다릴지도 모르겠군.”

“오래 기다리기를 바라야겠지요.”

청년이 해도 달도 없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이 아이는 그의 곁을 떠나 정원을 가로질러 혼자 달려간다.

“시간은 많으니 말이네.”

조그만 발걸음이 탁탁탁 멀어지는 동안 노인과 청년은 다시 놀이판을 사이에 두고 집중한다. 반드시 다가올 만남을 기다리는, 시간을 잊은 채 숨죽인 조용한 땅에서.

해리 포터 7권이나 어스시 시리즈에 나오는 사후세계 분위기에 일부 영향을 받은 설정입니다. 기다림의 땅에서는 아무도 이름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원래 누구였는지는 캠페인을 아시는 분들은 짐작할 수 있겠지요. 물리적 실체가 없는 곳인 만큼 모습은 인식하기 나름이고, 조금 바꿔서 보면 도살장 냄새에 피투성이로 앉은 시체, 태아가 땅에 꼬물거리는 호러일지도요(…)

[여명과 석양의 도시] 게임의 규칙

이전 마음의 계절이 ‘여명과 석양의 청춘드라마’라면 이번에는 ‘여명과 석양의 막장드라마’ 판이군요. 야한 대목과 폭력적인 이미지가 있습니다. 한 고등학생 이상 관람가?

게임의 규칙

I. 절대 주도권을 잃지 말라

“이번 판은 아무래도 엑토라스의 승리 같습니다.”

새파란 하늘에는 티없이 하얀 구름이 흐르며 땅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햇살은 밝지만 너무 뜨겁지는 않고, 선선한 바람이 목덜미를 식혀준다.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는 나지막하고 음악적인 목소리는 품위에 한 치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달콤한 약속을 품고 있다.

그녀는 돌아보지 않은 채 젊은이에게 대답한다. 목소리는 낮지만, 주변에서는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듣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분명 이올라스에요. 10 듀캣을 걸죠.”

“10 듀캣에다가 입맞춤은 어떻겠습니까?”

어깨 너머로 돌아보자 그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보고 있다. 그의 눈빛은 부드럽지만 냉정하고, 철저히 계산적이다. 아마도 그녀 자신의 눈빛이 그렇듯이. 그녀는 미소를 짓는다.

“입맞춤 대신 10 듀캣을 더 걸도록 하죠.”

주변에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터져나온다. 남자는 짐짓 놀란 표정을 짓는다.

“스틸리안느 영애의 입맞춤에 10 듀캣의 가치밖에 없는지는 몰랐는데요.”

듣는 사람들이 웃기 전에 스틸리안느는 빠르게 쏘아붙인다.

“추가 10 듀캣은 니키아스 공의 입맞춤을 피하는 대가랍니다.”

좋은 공연을 본 관객이 박수치듯 주변에 앉은 귀족들은 웃음을 터뜨리고, 못 들은 사람들에게 속닥속닥 전해주는 소리가 들려온다. 동시에 그의 눈빛에도 웃음이 번지는 것을 확인하며 스틸리안느는 다시 정면으로 몸을 돌린다. 궁정 무도회의 춤처럼 정교한 대화에도, 관객의 반응에도, 날씨에도 어느 하나 어긋남이 없이 모든 것이 완벽하다.

결국 그날은 이올라스 노타라스의 승리로 끝나고, 니키아스 콤네노스 두카스 안겔루스는 시종을 통해 그녀의 시종에게 10 듀캣과 편지를 전한다. 영애의 안목에 감탄을 표하고, 10 듀캣을 되찾을 내기를 위해 훗날 찾아뵐 수 있겠느냐는 편지 내용을 그녀는 만족스럽게 확인한다. 한 치 어긋남도 없이 모든 것이 완벽하기에.

II. 약점을 보이지 말라

엄마, 바스티안은 못해요. 절 보내세요.

선택이라는 말은 때로 아무 의미가 없었다. 아버지를 볼 생각에 들뜬 동생을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까. 세바스티아노스는 모르니까, 견딜 수 없을 테니까. 그애의 눈빛이 차가워지면서 영원히 변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가슴이 터질 것처럼 흐느끼는 어머니에게 나는 눈물과 절망의 눅눅한 냄새가 싫었다. 익사하는 사람처럼 세차게 끌어안는 품이 싫었다. 어머니를 쳐다보지도, 마주 안지도 않고 스틸리안느는 그 포옹 속에 가만히 서서 맞은편 벽만을 쳐다보았다. 절 보내세요. 이 한 마디로부터 걷잡을 수 없이 펼쳐나가는 미래를 꿰뚫어보듯.

“아..”

눈을 뜨자 어둠 속이다. 은빛과 청색 달빛이 얼룩진 검은 방안은 조용하다. 가슴은 놀란 새의 날갯짓처럼 세차게 뛴다. 눈가가 왜 젖어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다섯 살이었던 그날도, 아버지 소식이 왔을 때도, 어머니가 뒤를 따르듯 돌아가셨을 때도 한 번 눈물 흘리지 않았는데.

“괜찮아요?”

강하고 따스한 팔이 끌어당겨 꼭 안아주자 가슴 속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던 새는 조금씩 조용해진다. 아직 졸음에 잠긴 그의 쉰 목소리는 걱정스럽다.

“예… 예.”

스틸리안느는 마치 졸음을 몰아내려는 듯 눈을 비벼서 눈물을 지워버린다. 꿈속 어머니의 눈물이 눈가에 묻어난 것일까. 그 기억에 대한 혐오감에 몸이 떨려온다.

“악몽이라도 꿨습니까?”

머리를 쓸어넘겨주는 부드러운 손에서는 낙엽 태우는 연기와 박하꽃 냄새가 난다. 그 손을 붙잡아 입맞추고 싶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조금 물러나서 일어나 앉는다.

“아무래도 그렇죠. 귀족 처녀의 자존심도 버리고 잘생긴 불한당과 놀아나는 악몽을 꾸었답니다.”

“아, 저런.”

팔꿈치를 짚어 몸을 반쯤 일으키는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진다.

“누구라도 놀라서 깰 만한 꿈이군요. 그래서 그 불한당은 어떻게 됐습니까?”

“불한당부터 걱정하시네요. 그게 유유상종이라는 건가요?”

익숙한 독설의 흐름 속에서 그녀는 천천히 평정심을 되찾는다. 오랜 악몽을 몰아내주는 그의 온기 속에서, 내밀하고 너그러운 밤의 어둠 속에서는 두려움에서 잠시 자유로울 수 있다.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남자인지는 차치하고라도, 이용하고 버릴 남자를 이렇게까지 원하는 자신의 마음이 가장 위험했다.

“그자가 어떻게 하던가요. 이렇게… 손길로 영애를 유혹했습니까?”

발을 만지고 발목을 감싸는 손의 온기에 스틸리안느는 흠칫 떤다. 얼마나 위험한지 아는데… 그런데도 이렇게 바보같이!

“그대를 여신이라고 부르고 숭배하듯 어루만지며 순진한 처녀의 마음을 훔치던가요?”

발등에, 무릎에, 허벅지에 입술이 차례대로 닿자 자제심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달빛 속에 마주친 그의 눈에도 열정의 빛이 어린다.

“그리고 마침내 그 순결한 입술을 차지하고…”

그가 와락 끌어안으며 입맞추자 그녀는 기꺼이 입을, 몸을, 영혼을 그에게 연다. 이건 미친 짓이다. 달빛 속의 광기, 미래가 없는 소모적인 불길인 것도 알고 있다. 그는 황제가 보낸 첩자일지도 모른다. 다 알고, 다 계산하고 있는데도…

나중에, 나른한 만족감 속에 그와 함께 누워서 그녀는 달이 지는 것을 지켜본다. 잠시나마 조금 다른 꿈을 꾸면서, 어쩌면 다른 미래가 있지 않을까도 생각하며. 가슴을 갉아먹는 공허를 잠시나마 충족받은 채, 부질없는 환상인 것을 알면서, 다 알면서.

III.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라

“니키아스, 나…”

목소리는 부서진 유리조각이 되어 목을 찢으며 나온다. 떨리는 약한 목소리가 싫다.

그는 반쯤 열린 문앞에서 멈추어선다. 돌아보지는 않고, 그 작은 자비에 스틸리안느는 감사한다. 지금 그와 눈을 마주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 채, 그녀는 말하려고 입을 열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스틸리안느.”

그는 어깨 너머로 천천히, 반쯤 돌아본다. 문틈으로 희미하게 비치는 등잔빛 속에서 익숙한 얼굴의 뚜렷한 윤곽을 알아볼 수 있다.

“이런 일은 여신에게는 흠조차 되지 않게 마련입니다. 오직 자신만을 생각해요.”

그가 문을 열고 나가는 동안, 이불을 두르고 침대에 우두커니 앉은 스틸리안느는 멍하니 보기만 한다. 잡을 수도, 부를 수도 없다.

창밖으로는 푸른 달과 하얀 달이 져간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스틸리안느는 그가 말을 듣기도 전에 목소리만으로도 그녀가 할말을 알아차렸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의 대답이 무엇이었는지도, 그 의미가 하얗게 비어버린 머리에 천천히 천천히 스며든다.

마침내 그 지식이 젖어들어 이해라는 것이 찾아왔을 때 그녀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다가 이불을 있는 힘을 다해 깨문다. 비명을 지를까 두렵다. 밤의 자락을 갈기갈기 찢는 비명을 듣고 모두가 달려온다면, 그때야말로 마지막 긍지마저 내버린 후일 테니.

그가 어떻게도 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죽은 반역자의 딸이 콤네노두카이 안겔로이의 장자와 결혼하는 것은 니키아스가 황제의 신뢰를 잃는 것을 뜻했다. 여러 가문에 결혼의 가능성을 암시하며 그들의 협력을 얻어내는 니키아스가 벌써, 그리고 그녀와 결혼할 리 없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죽은 반역자의 딸과 그 여자의 사생아를 위해 그가 왜…

이불에 얼굴을 묻고 그녀는 소리없는 긴 비명을 토해낸다. 목표를 위해 이용할 남자였을 뿐인데, 어떤 광기 때문에 이 지경에… 그가 버리고 갔을 수많은 여자들처럼, 문을 닫은 그의 등뒤에 남겨졌을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스틸리안느는 천천히 고개를 들면서 그가 닫고 나간 문을 노려본다. ‘자신만을 생각해요.’ 단순하고 착각의 여지가 없는 대답.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현명한… 다른 길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것을 자신에게 인정하면서 그녀는 굴욕감과 분노가 타고 남은 재를 가슴 가득 안고 잿빛 새벽을 맞이한다.

IV. 지킬 것이 있다면 모든 것을 걸고 싸워라

의사는 실력이 최고이며, 절대적으로 비밀을 지킨다고 했다. 그녀가 시술한 환자들은 이후에도 문제없이 아이를 낳는다고 했다. 모두들 쉬쉬하는, 하지만 조금만 찾아보면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는 공공연한 비밀 중 하나.

“마음을 확실히 정하셨습니까?”

의사의 무표정하고 차분한 얼굴 앞에서 스틸리안느는 긴 순간 침묵한다. 확실히 정했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길은 있지도 않은데 가슴 속의 새는 벗어나려고 필사적으로 파닥거린다. 할 수 있다면 뱃속의 아이도 다가오는 죽음으로부터 도망칠까. 심장과 아이는 모두 그녀의 몸속에 갇혀 있다, 그녀 자신이 그렇듯이. 이 지독한 감옥을 찢어발겨 모두를 풀어주고 싶다는 충동을 억누르듯 그녀는 눈을 꽉 감는다. 잠을 제대로 잔지 너무 오래 되었다…

의사가 조용히 일어서자 의자가 바닥을 가볍게 긁는다. 그 소리가 귀에 크게 울리면서 머리가 지끈거린다.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하실 수 있는 수술이 아닙니다. 가보십시오.”

마치 누군가 손을 붙잡아서 당긴 것처럼 멈칫멈칫, 부자연스럽게 스틸리안느는 팔을 뻗어 의사를 제지한다. 그리고 누군가 고개를 잡아 움직이듯이 천천히 끄덕인다. 선택이라는 말이 아무 의미가 없는 막다른 길에 서서. 의사는 표정의 변화 없이 가볍게 한숨을 쉰다.

“침상 위에 누우십시오.”

자리에 눕자 신분을 숨기려고 얼굴을 가린 너울 너머로 깔끔한 하얀 석회 천장이 보인다. 가만히 누워 심장 소리에 귀기울이며 스틸리안느는 어려서 시골 별장에 새하얗게 내렸던 눈을 떠올린다. 눈밭 한가운데 지독히도 붉었던 선혈의 기억이 눈을 태울 듯 선명하다.

별장 일꾼의 아들은 솔개를 하나 길들여 마당의 닭과 싸움을 붙이고는 했다. 세바스티아노스는 몇 살 위였던 그 아이를 강아지처럼 졸졸 쫓아다녔고, 새들의 싸움을 조마조마하면서도 두근거리며 지켜보곤 했다. 몇 번 쪼이면 물러나는 수탉의 모습을 보기 지루해진 스틸리안느는 홱 돌아서서 집안으로 들어갔지만, 평소라면 누나 뒤를 쫓아왔을 바스티안은 들어올 줄을 몰랐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놀란 세바스티아노스의 비명과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스틸리안느는 벌떡 일어나서 마당으로 달렸다. 그리고 눈밭 한가운데 튄 피를 보고 우뚝 섰다…

의사가 들어와 지독한 냄새가 나는 갈색 액체가 든 잔을 건넨다.

“드십시오. 잠이 드실 것입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면 모든 것이 끝나 있겠지. 얼룩진 핏자국만을 남기고.

여덟 살 스틸리안느는 우는 세바스티아노스를 가로막으면서 일꾼의 열두 살짜리 아들의 얼굴을 후려쳤다. 팔레오로고스의 후계자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이제 남은 건 동생밖에 없어요, 신이여 부디 자비를-) 당장 말하지 않으면 황궁의 고문실에서 코를 베어내고 눈을 뽑아버린다는 말에, 가뜩이나 얼이 나가있던 소년은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세바스티아노스는 누나의 손을 잡아당기며 소리질렀다. 누나 하지마! 그게 아냐!

소년이 안고 있던 것이 눈밭에 툭 떨어졌을 때에야 스틸리안느는 눈앞을 가린 핏빛 안개가 걷혔다. 구겨지듯 눈밭에 처박혀 움직이지 않는 솔개… 도망치지 못하게 한쪽 다리에 묶었던 실이 피가 방울진 깃털에 엉켜 바람에 흔들렸다.

마당에서 제일 큰 수탉도 이겼던 솔개의 시체를 잠시 보다가 스틸리안느는 고개를 돌려 마당을 살폈다. 얼굴에 눈물이 얼룩진 채 얼어붙어 서있는 소년을 마주보고 싶지 않아서 그런다는 것은 자신에게도 인정하지 않았다. 마당 저편에, 까다롭게 꼭꼭거리며 병아리 주변을 맴도는 자그마한 암탉이 눈에 들어왔다. 암탉의 부리와 깃털에는 피가 맺혀 있었다.

잔은 내용물을 길게 쏟으면서 포물선을 그린 끝에 바닥에 산산조각이 난다. 스틸리안느는 너울 너머로 의사를 마주보며 천천히 일어나 앉는다.

“더러운 킨다스 마녀.”

목소리가 낯설다. 으르렁거리는 승냥이, 울부짖는 암늑대, 꼭꼭거리는 암탉. 이성이 있는 존재의 목소리가 아니라고, 아주 멀리서 그녀는 생각한다.

“이 일을 누구에게라도 얘기하면 다시는 아무것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하게 해주겠다.”

의사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잠시 마주보다가 돌아서서 바닥에 흩어진 잔 조각과 약물을 쳐다본다.

“기물을 파손하실 생각이라면 나가주십시오.”

한쪽 팔로 배를 감싼 채 스틸리안느는 자리에서 비틀 일어난다. 잔을 치우려던 의사는 마치 부축하려는 듯 다가오지만, 그녀의 눈빛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물러난다. 스틸리안느는 가져왔던 돈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려 하지만, 손이 떨려서 주머니가 풀어지면서 바닥에는 반짝이는 금화가 흩어진다. 의사가 뭐라고 말하는 것 같지만, 이해하지 못한 채 그녀는 밤거리로 나선다.

자신만 생각하라고? 찬바람 속에 허허로운 웃음이 터져나온다. 그래주지, 이 후레자식. 네 이야기 같은 건 듣지 않겠어. 너같은 건 생각하지 않아. 오직 나만, 그리고 나의…

밤의 도시에서 어두운 미궁을 헤매며, 스틸리안느는 어릴적 시골의 눈밭 위를 걷고 있다. 발밑에는 걸음걸음마다 붉게 물든 눈이 버석거리며 부스러져내린다.

V. 사랑에 빠지지 말라

대리석 벽을 따라 날아오르는 천사들은 낯익은 얼굴을 하고 있다. 자신이 남에게는 저렇게 보일까, 스틸리안느는 생각한다.
무표정하고 차가운 얼굴마다 감히 범접할 수도 없이 초월적인 것을 바라보는 그들은 이해할 수도 다가설 수도 없는 존재들이다.
저들을 만든 조각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차가운 바닥에 혼자 죽어가면서 그는 천사들과 같은 초월을 보고 있었을까?

하지만 그녀를 오늘 이곳까지 이끌어온 것은 신도, 어떤 초월성이나 신성도 아니다. 그보다는 훨씬 인간적이고 세속적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진창을 딛고 이곳까지 왔다. 천사들은 천상의 신성, 태양의 찬란한 빛만을 우러르겠지만 그녀는…
그녀는 이 땅 위에 살아간다. 지극히 현실적인 것들을 위하여. 구름과 광휘가 아닌 단단한 바닥을 딛고 그녀는 무수한 시선
사이로, 성당을 장식한 천상의 영광 아래 제단으로 걸어간다.

제3 군단의 장교 콘스탄티노스 미크루라케스를 연회에서 만났을 때에 그녀는 그에 대해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아내 마리아 블라스티아가 5년의 결혼생활 끝에 죽었을 때 두 사람 슬하에는 아이가 없었다. 율리아노폴리스 근무지에서 그가 정부로 두었던 여자도 둘이 관계를 지속한 동안에는 아이가 없었다. 콘스탄티노스와 헤어진 이후 그 여자는 다른 남자와 아들을 낳았다.

황궁 연회에서 그와 처음으로 시선을 맞추고 미소지으면서 스틸리안느는 그의 전처와 옛 정부를 생각하고 있었다. 날씨와 소문에 대해 가벼운 대화를 나누면서 그녀는 콘스탄티노스라는 남자에게 모든 것을 판돈으로 걸고 자신을 도박판에 올려놓았다.

사랑을 필요의 일종이라고 한다면 콘스탄티노스만큼 남자를 뜨겁게 사랑한 일은 평생 없을 것이다. 남편과 아버지가 되어줄 남자, 귀대 날짜가 걸려서 서둘러 결혼할 수 있는 남자가 필요했다. 다른 아이가 없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남자라면 더욱 좋았다. 그래서 콘스탄티노스 미크루라케스는 그녀에게는 꿈같은 이상형이었다. 그녀를 등뒤로 버려두고 문을 닫던 그 뒷모습의 기억이 아무리 아파도, 달빛 속의 열정이 때로는 못 견디게 그리워도 그것은 죽어버린 꿈일 뿐, 그녀에게는 새로운 꿈이 필요했다. 그리고 필요한 만큼 더 절실하게 그 꿈을 사랑했다.

그 소박하고 강직한 콘스탄티노스가 그녀를 보는 눈길에 열정의 불길이 어린 순간 설레는 마음은 진짜였다. 사슴을 함정으로 몰아가는 사냥꾼의 가슴이 뛰는 흥분이 진짜이듯이. 만난지 채 한 달이 안 되어 그가 참지 못하고 청혼했을 때 흘린 눈물도 진짜였다. 사막을 헤매이다 멀리에서 녹지를 발견한 여행자의 안도감만큼 진실한 감정이 있을까.

제단 앞에 무릎꿇기 직전에 스틸리안느는 다시 한 순간 차가운 대리석 천사들에게 눈길이 간다. 무표정하고 엄숙한 환희에 빠진 그들은 하나같이 그녀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녀에게 그리도 열렬하게 구애했던 조각가는 여지가 없이 거절당한 후 미친 듯 작업에 몰두했고, 마지막 천사를 완성한 다음날 아침 작업 도구로 손목을 그은 싸늘한 시체를 인부들이 발견했다. (새하얀 대리석 위에 붉게 흐르는 피.) 니키아스가 예술가의 죽음을 낙상으로 무마한 덕분에 성당은 예정대로 문을 열 수 있었다.

콘스탄티노스 옆에 나란히 무릎을 꿇으면서 그녀는 조각가의 죽음이 잠시 가슴에 남는다. 끝내 모르는 사람이었던 소녀 때문에 재능과 목숨을 내던진 그 무모함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그 파괴적인 불길을 통과해 소녀는 여인이 되었고, 하얀 대리석 위에 선명했을 붉은 피의 가르침을 가슴에 단단히 새긴다. 다시는 누구에게도 자신을 망칠 힘을 쥐어주지 않으리라, 그렇게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VI. 길을 정했다면 끝까지 걸어라

콘스탄티노스가 아이를 번쩍 들어올리자 까르륵거리는 웃음소리가 정원에 울려퍼진다.

“많이 컸구나, 이녀석!”

아리스가 조막만한 손을 내밀어 콘스탄티노스의 코끝을 만지자 그는 웃으며 아이를 던졌다 받고, 스틸리안느는 아리스가 꺄악 웃으며 공중을 날 때마다 가슴을 졸이면서도 미소짓는다. 머리에 햇살이 따뜻하고, 정원의 나무에서는 새가 지저귄다. 한여름의 정원에서 아리스가 웃는 세상에는 어둠도, 두려움도 한 점 없다.

“그동안 잘 지냈소?”

옹알거리는 아리스를 꼭 안은 채 콘스탄티노스는 다른 팔로 그녀를 끌어당겨 이마에 입맞춘다. 그 포근한  체온과 넓은 가슴에 안겨 스틸리안느는 그에게 웃어준다.

“그럼요. 율리아노플은 어땠나요?”

“당신과 아리스가 없었지. 보고 싶었소.”

막 대꾸하려는 순간 뒤에서 작은 헛기침이 들린다.

“죄송합니다, 나으리, 마님. 나으리를 빨리 뵈어야겠다고 하셔서…”

연기와 박하꽃 향. 잠시 돌아보지 않고 서서 스틸리안느는 태연하고 무심한 표정을 얼굴에 갑옷처럼 두른다. 콘스탄티노스에게 아리스를 받아들고 그녀는 천천히 돌아선다. 남편은 이미 그녀를 지나쳐 손님에게 다가서고 있다.

“니키아스 공. 이곳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오시자마자 이렇게 찾아뵈어서 죄송합니다, 콘스탄티노스 경. 시간을 많이 빼앗지는 않도록 하지요. 건강하셨습니까, 스틸리안느 부인?”

눈이 마주치는 순간 가슴이 욱신거린 것은 오랜 감정의 습관일 뿐.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헤집어진 옛 상처의 고통 앞에 그녀는 자신을 다잡고, 낯선 사람을 빤히 쳐다보는 아리스를 꼭 끌어안는다.

“어서 오세요. 두 분 말씀 나누시지요. 마실 것을 올려보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부인. 그쪽은 아리스 공자인가요? 아주 잘생긴 아드님이군요. 두 분 많이 자랑스러우시겠습니다.”

그녀는 엷고 차가운 미소를 짓는다.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라고 말하던 목소리가 다시 귓전에 울려온다.

“감사합니다, 공. 당신을 꼭 닮았죠, 여보?”

“당신을 더 닮은 것 같은데.”

콘스탄티노스는 웃으며 그녀의 한쪽 손을 잡아 손등에 입맞춘다.

“먼저 들어가보겠소.”

“예.”

그녀는 인사하고 지나쳐가는 니키아스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품안의 아들, 그녀의 얼굴에서 떠날 줄 모르는 그 순진무구한 눈빛과 포근한 아기 냄새에만 정신을 집중한다. 그녀와 아이를 쳐다볼 자격조차 없는 남자와 그런 남자 앞에서 아직도 마음이 흔들리는 자신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발소리는 등뒤로 멀어져서 사라져간다.

가끔 그녀는 꿈을 꾼다. 이것으로 만족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은 그런 꿈. 권력에 가족을 잃고 피눈물 흘린 사람이 어디 그녀뿐일까. 무사히 살아남았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운은 좋았다. 이걸로 끝내도 되지 않을까. 그래야 하지 않을까.

그러다가 또 다른 꿈을 꾸고는 한다. 엄마, 바스티안은 못해요. 어머니의 눈물, 그녀에게 반갑게 고개 돌리던 아버지. 절 보내세요.

전쟁이나 다름없이 싸워서 얻은 행복에 잠기다가도 순간순간, 스틸리안느는 자신이 온전히 살아남지 못했다는 사실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시린 공허를 채우는 피의 꿈을 꾼다. 평온한 일상의 틈새에서 끝없이, 언제나.

아리스가 배가 고픈 듯 품안에서 칭얼거린다. 조그마한 등을 토닥여주며 스틸리안느는 집으로 돌아선다.

“미안해, 아리스.”

보드라운 머리칼에 입맞추고 그녀는 아들의 귀에 속삭인다.

“엄마를 용서하렴.”

그러나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용서를 비는 것 자체가 얼마나 뻔뻔한 짓인지도. 칭얼대는 아리스를 안고 그녀는 조용히 햇살 가득한 정원에 등을 돌리고 집안으로 들어간다. 생명을 끌어안고 죽음의 그림자를 끌며, 가슴에는 재와 폐허 가득한 채 삶의 전장 한가운데로.

솔개를 길들여 닭과 싸움붙이는 얘기는 고등학교 때 들은 것인데 계속 기억에 남았었습니다. 이름없는 인물 중 하나는 (스틸리안느는 아랫것들 이름에 관심이 없뜸) 짐작하시겠지만 본편 캠페인에 등장했던 인물입니다. 스틸리안느에게 얻어맞았던 소년은 지금도 어디선가 잘 살고 있을 것 같은데, 언젠가 등장할지도 모르죠.

여명과 석양의 도시 – 10화: 폭풍이 몰아치다

오늘 한 10화입니다. 지난주에 이어 고마우이 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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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북쪽으로 간 라이산드로스와 플로리앙은 제3 군단장 콘스탄티노스에게 환대를 받으며 율리아노플에 도착합니다. 한편 루키아노플에 남은 하쉬르는 스틸리안느가 무슨 일을 꾸미는 게 분명한 와중에 평온한 나날이 더 불안하고, 부하를 시켜 도시 내 용병들의 동태를 살피게 해서 약간 이상한 것을 발견하지요.

시찰을 나가려던 라이산드로스와 플로리앙은 하쉬르의 전갈을 받고 불안해하고, 콘스탄티노스와 라이산드로스는 서로 처가의 반역사를 끄집어내며 다투는 추한 모습을 보입니다.

한편 추수기원 축제 때에 하쉬르는 미사 직전에 황제가 성당에 소수의 호위만 두고 성당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불길한 예감에 달려와서, 변절한 호위병들에게서 황제의 목숨을 구합니다. 황제는 하쉬르에게 감사하며 즉시 황궁으로 향합니다.

그 다음날, 시찰을 돌던 라이산드로스와 플로리앙은 반란이 일어났다는 전갈에 콘스탄티노스가 막는데도 바로 부대를 이끌고 회군합니다. 다시 루키아노플을 향해…

감상

드디어 1부 막장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는 10화입니다. 이것저것 인물들의 감정과 과거가 터져나오고 있어서 흥미롭군요. 하쉬르가 맹활약해서 4명을 상대로 암살 기도를 막아낸 것이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하겠고, 라이산드로스의 귀환 결심이 목숨보다 제국과 가족이 우선인 그의 사람됨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 제국 최고의 무인들이 마누라 때문에 싸우는 게 제일 재밌었어요 (음훼훼). 술먹으며 완전 어깨동무 분위기였다가 아내가 걸리는 얘기가 나오자 서로 찌질해지는 모습이 참 인간적이었달까요. 사람 그렇게 추해지는 거 완전 좋아하는 1人.

하쉬르가 황제를 구해내는 판정은 길어져서 본플레이 시간 이후에 마쳤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것저것 캠페인에 대한 잡담도 했죠. 여기에도 앞으로의 전개에 대한 생각이 나와있으니, 앞으로 서로 얘기해서 조정해가면 될 것 같습니다. (전개라기보다는 곁가지이지만 개인적으로는 황후와 플로리앙에 대한 생각이 제일 막장안습..)

추석 때문에 쉬는 게 아쉽지만, 2주 후에도 살짝 긴장감을 유지하면서도 이제 편안하게 흐름을 타며 첫 1/3을 마칠 수 있으면 좋겠군요. 모두 추석 끝나고 건강한 모습으로 뵙겠습니다!

여명과 석양의 도시 – 9화: 탄환이 떠난 순간

여명과 석양의 도시 9화입니다. 로그 제공해준 아군에게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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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플로리앙은 약속대로 총을 직접 제작해서 아리스에게 선물하고, 아리스는 사격을 굉장히 빨리 익혀서 그를 놀라게 합니다. 네야는 임신했다는 소식으로 그를 까무러치게(?) 하지요. 플로리앙과 라이산드로스는 제3 군단의 주둔지인 율리아노플로 출정을 나가고, 네야와 아쉬운 작별을 나눈 플로리앙은 돌아오면 네야에게 청혼하기로 결심합니다. 한편 하쉬르는 아샤신 수뇌부를 다시 만나 그가 메흐디에게서 자유로워지려는 계획에 최소한 밤해는 하지 않겠다는 그들의 약속을 받아냅니다.

감상

저번에 전개 계획을 참가자들에게 이야기한 효과를 이때도 톡톡히 보았습니다. 네야 임신 설정도 비극을 고조시키는 용도로 만들었고 (저 아니라능! 이방인님이 제안한 거라능!), 여러모로 지금 나오는 전개의 목적을 아니까 방향성도 있어서 참가자들도 재미있어하는 것 같군요.

제목은 좀 고민했었는데, 총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해서 ‘탄환이 떠난 순간’으로 했습니다.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게 되는 바로 그 순간처럼, 그동안의 은원과 인연이 걷잡을 수 없이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한 느낌이랄까요. 스틸리안느의 계획, 플로리앙과 네야, 아리스의 손에 쥐어준 총, 아샤신 수뇌부와 접촉한 하쉬르, 플로리앙과 라이산드로스를 북쪽으로 보내는 황제의 결단 등. 어떤 일이든 어느 순간에는 그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하게 마련이죠. 총성도 없는 총의 방아쇠를 당기고, 나중에야 탄환이 떠난 게 어느 순간인지 깨닫는… 그리고 깨달은 때에는 이미 너무 늦어있겠죠.

요약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라이산드로스 내외의 닭살도 재밌었고, 플로리앙의 감정표현과 하쉬르가 능동적으로 운명을 개척해가는 모습도 인상깊었습니다. 다들 스틸리안느가 무슨 짓을 하려나 걱정은 하면서도 당장 어떻게 할 수는 없는 점도 복잡다단한 도시캠페인 혹은 정치물의 성격이 잘 산 것 같습니다. 문을 박차고 들어가 다 죽이려면 할 수는 있겠지만 그 다음부터가 너무 복잡해지니..(…) 그게 사회 속에 살아간다는 것의 복잡함이자 묘미인 것 같습니다.

여명과 석양의 도시 – 8화: 여우굴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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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하쉬르는 황후에게 플로리앙 암살 기도의 배후에 대해 알아낸 것을 밝힙니다. 황후는 스틸리안느가 황제에게 원한을 품은 이유를 얘기해주고, 스틸리안느가 나흐만의 사주를 받고 있는지 정보를 캐내게 아리칸을 회유할 것을 은근히 종용합니다. 그리고 만약 스틸리안느를 암살하라고 명령한다면 그가 명령대로 할지도 확인하지요. 그렇게까지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플로리앙은 콘스탄티노스 미크루라케스의 저택 (실은 처가인 팔레오로고스 가문 저택이지만)에 찾아가서 사병 감찰을 합니다. 사병 수를 대단히 정직하게 보고했을 뿐만 아니라 사병을 2/3가 아닌 9할을 내어놓겠다는 말에 그는 스틸리안느의 의중을 알아보려고 직접 만날 것을 청하고, 둘은 서로 상대를 치열하게 떠봅니다. 그러다가 스틸리안느의 어린 아들 아리스가 엿듣는 것을 알아차린 플로리앙은 아이에게 친절하게 대해주고, 아리스가 라이산드로스의 선물을 자랑하자 자신도 연습용 총을 만들어주기로 약속합니다. (영악한 꼬마 같으니! (…))

하쉬르는 아리칸과 둘이 각자의 입장과 미래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아리칸은 자신은 얻을 것이 있는 나흐만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하쉬르는 자신과 형인 술탄 사이의 악연과 협박 관계를 밝히며, 최소한 자신을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게 해야 한다는 목표를 얘기하지요. 그 목적을 위해 아샤신 지도부와 다시 접촉해야 한다고 부탁하자 아리칸은 불안해하면서도 승낙합니다. 그리고 내일 일은 잠시 내일로 남겨두고 러브러브~

감상
좀 흐름이 늘어지는 느낌이고 저도 답답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있던 전개를 참가자들에게 그냥 알려주고 나니 참가자들도 한결 방향 감각이 생기는 듯했습니다. 미래 구상은 밝히기도 하고 안 밝히기도 하는데 (라이테이아 전기나 공화국의 그림자 때는 안 밝히고, 역할극 할 때면 보통 밝히고), 이 경우는 얘기하는 게 적당해 보였습니다. 주인공들 자신이 지도자격 위치에 있는 인물들인 만큼, 그들이 스스로 미래를 알지는 못해도 참가자가 어느 정도 방향성을 알고 자신감 있게 RP하는 건 중요한 것 같아요. 물론 이건 현재의 계획일 뿐이고 실제로 어떻게 될지는 저도 모릅니다.

그렇게 뭔가 물꼬가 트이고 나니 오늘의 흐름은 한결 괜찮은 느낌이었습니다. 하쉬르 이야기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한 점이 특히 큰 성과인 것 같네요. 황후가 (굇수 에이레네를 곁에 두고) 아리칸의 정체를 알아내고 하쉬르에게 그녀의 감정을 이용하라고 종용까지 하는 걸 보면, 술탄의 하렘에 있을 때는 쥐죽은 듯 살았던 건 내숭이었던 거야?!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군요. 뭐 한편 그녀의 말마따나 황후의, 아내의 입장은 또 다르기는 하죠. 여러모로 사촌언니 키네니아를 닮아간다는 느낌이 드는 그녀였습니다.

한편 어느 정도 기반과 위치가 있는 인물들인 주인공들 설정과, 그들의 설정과 이야기가 중심인 캠페인 성격상 각자 따로 노는 건 좀 어쩔 수가 없군요. 각자의 생활이 있는 상태에서 가끔 스쳐가는 정도의 느낌입니다. 이야기끼리 극적 연관성은 있긴 한데, 늘 같이 다니기엔 좀 먼 당신들이랄까요. 이런 류의 이야기가 왜 RPG에 흔한지 않은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전 언더월드 3기와 같은 도시·일상물 캠페인에서 겪은 어려움이 생각나기도 하고요. 생각해보면 도쿄의 달도 일행은 거의 유지하지 못했죠. 몰려다니는 대신 좀 더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RPG라는 매체로 다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해볼 만한 것 같습니다.

한편 ‘여우굴 속으로’라는 제목은 스틸리안느를 찾아가는 플로리앙의 대사에서 따온 것이지만, 어떻게 보면 이번 플레이의 세 장면 모두에 적용이 있는 제목이기도 합니다. 따지고 보면 스틸리안느를 여우라고 한다면 마리사 황후나 아리칸도 여우 중의 불여우거든요. (자애로운 황후니 주인공 중 하나의 연인이니 하는 위치로 무장하고 있다고 내 눈까지 속일 수야!) 그리고 그런 여우의 굴로 들어간다는 것은 상대가 주도권을 쥔 영역으로, 위험으로 뛰어든다는 뜻이기도 하겠죠. (다른 생각 했다면 나파요 나파요) 아군과도 얘기했지만 뭔가 은근히 이 캠페인 주제는 ‘여자 말을 잘 들어야 산다’로 가는 느낌입니다.

결론적으로 재밌는 플레이를 함께해주신 이방인님과 아군에게 감사감사~ 이번에 못온 뱀프군은 다음에 봐요!

여명과 석양의 도시 외전 – 보레알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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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아리스의 다섯 살 생일을 구실로 검을 선물하러 팔레오로고스 저택으로 간 라이산드로스는 아리스의 예리하고 영특한 모습에 죽은 친구 니키아스의 아들이라는 확신을 얻습니다. 그는 검을 선물하고, 아리스가 검을 잡을 나이가 되면 검술을 가르쳐주기로 약속하지요. 아리스와 혈연이 없는 사람이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우면서도 라이산드로스와 에이레네는 할 수 있는 한 아리스 곁에서 아이를 훈육하고 지키기로 결심합니다.

감상

나왔습니다 일일드라마 여명과 석양의 도시! 아리스 미크루라케스 출생의 비밀..입죠. 매우 복잡한 정치적, 감정적 상황 속에서 아리스라는 인물은 폭풍의 중심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리고 폭풍 중심은 고요하게 마련인..(…) 서로 정치적으로, 인간적으로 적인 사람들이 한 아이에 대한 사랑만은 똑같다는 사실은 어찌보면 참 신기하지요. 스틸리안느도 여기서는 정말 이 여자가 악역인가 싶을 정도로 정중했고요. (따지고 보면 면전에서 특별히 악당짓 한 건 없긴 하죠. 등뒤에서 비수 찌르는 게 특기…)

그래서 인간의 갈등은 명백한 선악으로 나누기 어려운 것일지도 모릅니다. 결국 다 인간 얘기니까요. 누구 말마따나 악당도 어머니는 사랑하고, 영웅도 기분 안 좋은 날은 있게 마련. 스틸리안느가 아무리 독한 여자라도 아들을 지독하게 사랑하는 건 사실이고, 라이산드로스 내외가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니키아스의 유일한 흔적인 아리스를 억지로라도 데려오고 싶은 유혹이 없을 리 없죠. 그래서 인간은 다 숭고하고 이기적이고 헷갈리도록 복잡한 것 같습니다.

이 외전의 중심이자 백미는 라이산드로스와 아리스의 대화였다고 봅니다. 처음 보는데 꽤나 서로 파장이 맞는다는 느낌이었달까요. 역시 피는 못 속이는 건지… 꽤나 좋아했던, 그리고 좋아하는 인물인 니키아스와 비슷하면서도 분명 다른 사람이라는 점에서 재미도 있고요. 앞으로도 여러 해 라이산드로스는 아리스의 영웅일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과연 언제까지나 그럴지는 모르지만요!

저도 석한군도 이 복잡한 가족·정치사의 결과는 비극일 거라고 예상하지만, 그 비극을 내다볼 수 있다 하더라도 스틸리안느도, 라이산드로스도, 에이레네도 아리스를 그만 사랑할 수 있을까요. 미래가 정해진 것은 인간이 원하는 것, 선택하는 것, 행동하는 것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라는(주:씰: 운명의 여행자들 [1999년 가람과 바람] 중) 게 사실이라면, 그 정해진 미래는 그들의 삶이고 그들의 진심이겠지요. 어쩌면 바꿀 수 있더라도 바꾸지 않을…

제목인 보레알리스는 아리스가 검에 붙인 이름입니다. ‘북방’이라고 부르는 것은 검의 깨끗한 윤곽과 북풍처럼 차가운 빛도 있겠고, 라이산드로스의 검과 말이 동과 서의 방위 이름이 붙은 것을 따라하는 의미도 있겠고, 거의 집에서 떠나있는 아버지 콘스탄티노스가 북풍처럼 빨리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일지도 모르죠. 나중에는 어쩌면 사란티움에 불어닥치는 혹독한 원한과 피의 바람이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자 어느 용자가 그꼴 나기 전에 영아살해좀..(타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