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와 경이감에 대한 Wishsong님의 글에 댓글로 쓰다가 길어져서 엮인글로 올립니다.


경이감은 의식적으로 '느끼자!' 하고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닌만큼 경이감을 느끼자는 합의의 내용은 애매한 면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합의의 일환으로 진행자가 묘사하는 것들이 반드시 위협이나 단서일 필요는 없다는 암묵적 혹은 명시적 공감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경이감을 느낄 정신적, 시간적 여유를 캠페인 내에 확보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예를 들어 주인공들이 탄 우주선이 어떤 행성을 향해 가고 있는데 우주공간을 떠도는 '우주 반딧불'이 색색의 빛을 은은하게 발하면서 우주선 주변을 춤추듯 유영하고, 그들의 텔레파시로 주인공들의 머릿속에 아름다운 노래가 울린다고 하죠. 소리가 전달되지 않는 진공 속에서 듣는 노래... 그러나 이런 특이한 현상은 불행히도 90% 이상의 경우 위협으로 간주됩니다. 주인공이 함포로 달려가 우주반딧불을 몰살시켜 버린다면 경이감은 저 너머에. (먼산)

이 경우 상인들의 여행담이라든지 해서 'XX 행성 주변의 우주를 떠도는 우주 반딧불은 전혀 위험하지 않다'고 미리 주지시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얘기로만 듣던 우주 반딧불이다!' 하고 PC들이 느긋하게 즐거워할 바탕도 될 수 있겠죠. ('속으면 안돼! 마스터의 속임수야!'로 가지 않는다면 말이죠) 참가자 입장에서는 배경세계의 일관성이 더욱 탄탄하게 느껴져서 몰입감은 한층 증가할 테고, 이것은 경이감에 더욱 도움이 되죠.

이 예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진행자와 참가자간의 합의는 'PC들을 계속적인 위협 상태에 두지 않는다'는 내용일 것입니다. 캠페인 자체의 분위기는 끝없는 위협과 음모에 아무도 믿을 수 없는 비정물인데 갑자기 우주반딧불을 감상하며 즐거워하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결국 경이감을 살리려면 캠페인 분위기에 탐험과 발견이라는 느긋한 여유가 어느정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하나 생각할 점이라면 참가자는 (대개의 경우) 어린애가 아니며, 따라서 진행자가 보여주는 묘사에 앉아서 감탄하라는 것은 다소 무리한 요구일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참가자가 어떤 것에 실제로 감탄할지 스스로 얘기하는 것일텐데, 예를 들어 '거대한 지하도시가 나오면 좋겠어요'라든지 '하늘까지 닿을 정도로 높은 구조물이 있으면 좋겠어요'라든지 '초월적 지성체가 나왔으면 좋겠어요' 등입니다. 이런 것들을 얘기하면 경험치나 극점수로 포상하는 것도 좋은 동기부여겠죠.

참가자 제안 외에도, 경이를 느끼는 것 자체에 포상을 하는 것도 한 방법이 아닐까 합니다. 우주의 경이를 깊이 느끼며 감탄하는 것은 그 자체 즐거운 경험이며, 힘든 탐험생활에 새로운 동기부여를 하고, 정신의 지평을 넓히며, 지친 혼을 편안하게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경이의 순간을 충분히 음미하는 연기를 함으로써 경험치나 부상 회복을 받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죠. 경험치 획득의 조건을 참가자가 스스로 정하는 '과거의 그늘'이라면 다음과 같은 열쇠도 가능합니다.

경이의 열쇠
- 아무개에게는 우주의 신비를 느끼는 것이야말로 여행의 보람입니다. 경이를 불러일으킬만한 광경에 하던 일을 멈추고 깊은 감동을 느끼면 1XP, 가던 경로를 바꾸거나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경이로운 광경을 일부러 찾아나서면 2XP, 목숨을 걸고 우주의 경이를 찾아나서면 5XP를 받습니다. (삭제조건: 신비롭고 경이로운 경험을 피합니다.)


물론 이 방법은 지나치면 억지 춘향이 돼서 진짜 경이감은 증발해버릴 위험도 있습니다. 억지로 꾸민 감동은 없느니만 못하니까요.

마지막으로 어떤 요소가 경이를 불러일으키는지 분석해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질성과 규모, 공포, 희소성, 주제의식 관련성, 몰입감 등이 있습니다. 이질성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불가능하거나 어려운 일인데 이게 어떤 식으로든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진공 속에 생물이 살아간다거나, 마치 레이스처럼 가늘고 연약해 보이는 다리가 수천톤의 무게를 문제없이 견딘다거나.

규모는 말 그대로 규모. 물리적 규모이든 다른 의미의 규모이든 거대한 규모는 경이감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습니다. 두개의 대륙을 잇는 거대한 다리, 날개를 펼치면 하늘이 어두워지는 괴조, 인류의 전 역사에 걸쳐 진행돼 왔고 인류 전체의 운명을 포괄하는 비밀스런 계획 등이 그 예입니다.

공포의 요소가 있으면 인간은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연약하고 덧없는 것인지 느끼게 마련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자신이 보고 있는 광경의 의미는 더욱 크게 다가옵니다. 까마득히 높은 절벽에서 바다를 내다보며 느끼는 감정은 규모와도 관련이 있지만 공포와도 관계가 있죠. 마찬가지로 위의 괴조의 예도 위협을 느끼기 때문에 경이감이 증폭됩니다. 그럼에도 이 공포가 너무 큰 나머지 감동을 느낄 여지가 없을 정도가 되면 곤란하다는 점에서 균형을 맞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공포를 경이감의 요소로 활용하려면 두가지 방법 중 하나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첫번째는 그 위협이 느낌으로만 존재할 뿐 실제가 아닌 방법이 있습니다. 괴조가 엄청나게 크긴 하지만 사실은 아주 온순한 지성체이기 때문에 예의를 지키면서 도움을 청해야 한다든지 (총을 쏜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간다 = 무례), 반딧불이 머리속에 텔레파시로 얘기하는 게 불안하긴 하지만 절대적으로 안전한 생물이라는 것이 정설이고, 함부로 죽였다가는 빈축을 살 것이라든지 말이죠.

두번째는 위협이 실체이기는 하지만 PC가 어떻게 해도 그 위험에 대응할 수가 없게 처리하는 것입니다. 우주선이 웜홀로 끌려들어가는데 모든 기기가 반응을 안해서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든지. 이런 경우 참가자들은 위협에 대응하기보다는 웜홀의 신비에 관객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물론 RPG에서는 극히 제한적으로만 사용할 수 있는 기법이라는 것은 당연합니다. 아예 사용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것이 왠만하면 좋을 테고요.

희소성도 경이감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경이를 느낄만한 장면이 너무 잦아서야 크게 가치절하가 되어버릴 테니까요. 경이로운 경험을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어려움을 요구하는 것도 희소성을 확보하는 한 방법입니다. 고대 도시를 발굴하기 위한 모험이라든지 말이죠. 이럴 경우는 진행자의 묘사는 노력에 대한 대가같은 느낌도 들어서 더욱 인상깊지 않을까요.

경이로운 경험이 주제의식을 표현하는 성격이라면 감동은 더욱 증폭되지 않을까 합니다. 예를 들어 캠페인의 주제가 '자유 의지'인 캠페인을 생각해 보죠. 이 경우 인간이 자멸해 버리지 않도록 인간의 역사와 선택을 교묘하게 조종해온, 자비롭지만 압제적인 초월적 지성체와의 만남은 훨씬 깊은 의미를 가질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위에 얘기했듯 배경 세계에 대한 몰입감도 경이감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거대한 지하도시가 있다는 얘기를 여행중에 듣기만 하다가 직접 자기 눈으로 보게 된다든지 하는 경우겠죠. 여행자들은 신기한 것을 봤으면 대체로 소문을 내게 마련이며, 이 과정에서 이야기는 과장되거나 왜곡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장치에서 느껴지는 진정성은 세계의 일관성과 몰입감을 형성하는 요소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경이감의 일반적인 요소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특정 참가자들에게' 무엇이 감탄스러운지 분석해 보는 노력일 것입니다. RPG는 의사소통이 가장 중요하다는 얘기는 굳이 반복하기도 쑥스럽고 (그러면서 왜 반복하냐), 이것은 경이감을 유발하는 노력에도 예외가 아니니까요.

뭔가 얘기가 길어졌습니다만 정리해 보자면...

1. 경이를 느낄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캠페인
2. 참가자의 제안을 활발하게 받기
3. 경이를 느끼는데 대한 포상
4. 경이의 요소를 분석해서 활용

이상과 같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2006/11/16 04:28 2006/11/16 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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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진야의 방문자 2006/11/16 19: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질감을 위해서는 익숙함이 필요합니다. 상식에 벗어남을 위해서는 상식이 필요하지요. 애당초 우리와는 다른 상식을 가지는 판타지(혹은 SF)이기에 PC가 느낄 경이감과 케릭터가 느낄 경이감이 다르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겁스에 나오는 [바이킹에겐 증기기관차가 괴물]이던가 하는 구문을 인용하여 이야기를 진행했던것 같습니다.

    결론이 잘 생각이 안나는군요.
    [경이감을 느낄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플레이어에게 경이감은 마스터의 농간이 될 뿐이다!] 라는 말로 가기 쉽지만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던것 같습니다. [PC와 플레이어의 상식을 맞추자]라는 얼토당토 하지않지만 긍정적인 결론으로 갔던거 같기도 합니다. 지금이라면 [애당초 둘의 상식은 다르니까 그냥 경이감을 느낀다고 하고 말아라]로 갈 것 같습니다.

  2. nefos 2006/11/17 04: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니까 경이를 느끼는 대상이 (캐릭터가 아니라) 참가자에게 너무 포커스가 맞춰진 느낌입니다. 물론 참가자와 합의가 되어야 한다는 게 기본 베이스라 그렇겠지만요.
    경이감을 주기위한 요소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역동성은 RPG에서 표현하기가 조금 어렵다고 생각되는군요. 덧붙여, 무언가 긴박한 느낌을 주었다가 갑자기 평온한 상태로 바뀌며 펼쳐지는 장면 역시 경이감을 표현하는 한 방법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3. 로키 2006/11/18 01: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진야의 방문자// 예, 확실히 그렇네요. 우리네야 달나라에 로켓 뜨는 것만 보고도 감동하지만 많은 SF 세계에서는 항성간 여행도 당연한 걸로 여겨지는 등...

    하지만 그건 배경 세계의 정상 기준이 확실하면 어느정도 해결되는 부분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항성간 여행은 일상이지만 완전히 사막만 펼쳐진 행성은 발견된 적 없다든지 말이죠. 결국 일관성과 기대치의 문제.

    또 우리에게 일상인 것이 주인공들 입장에서는 오히려 신기한 것도 생각할 수 있겠죠. 인류가 모두 한 행성에서 발원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한다거나요.

    nefos// 뭐랄까.. 등장인물들의 경이감도 좋지만 역시 참가자가 즐거운 것이 목적이니까요. 물론 경이감을 느끼는 반응을 연기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는 함께 느끼는 게 좋겠죠.

    완급 조절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군요. 확실히 좋은 표현 방식이고, RPG라고 특별히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차원의 게이트를 탈취하기 위한 격렬한 전투,그리고 상대방 함대를 보내버리자마자 모든 것이 조용해지면서 게이트의 신비를 보게 된다든지... 완급 조절은 진행의 주요 도구이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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